앉아 있기 위하여 움직입니다

신동숙의 글밭(154)


앉아 있기 위하여 움직입니다


하루의 생활이 앉아 있기 위하여 움직입니다. 뻐꾸기 소리에 눈을 뜨는 아침에도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 바로 움직이기보다는 이부자리에 그대로 앉습니다. 말로 드리는 기도보다는 침묵 속에 머무르는 고요한 시간입니다. 


고요한 아침을 그렇게 맞이하기로 하는 것입니다. 앉았는 자리가 먼 동이 트는 산안개가 고요한 어느 산기슭이면 보다 더 좋겠지만, 골방에서도 가슴엔 밝은 하늘이 펼쳐집니다. 밤새 어두웠을 가슴으로 숨을 불어 넣으며 더 내려놓으며 새날 새아침을 맞이합니다.



20년 전쯤에 요가를 배우며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12가지 기본 동작을 아사나라고 하는데, 요가 수행자들의 몸수행의 방편이었던 아사나는, 앉아 있기 위하여 움직이는 조화로운 몸동작인 것입니다. 보다 더 오래 앉아 있기 위하여 보다 더 깊은 수행으로 나아갑니다. 


몸을 앞으로 뒤로, 왼편으로 오른편으로, 앉았다 일어났다 업드리고 누웠다가, 때론 비틀기도 하면서 온몸의 근육을 다양하게 움직이는 이유는, 온몸 구석구석 빈틈 없이 숨을 불어넣기 위함입니다. 막힌 곳 없이 숨을 불어 넣으니 저절로 피 돌기가 잘 되는 것입니다. 건강은 저절로 따라오는 그림자처럼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런 몸으로 앉아 있는 것입니다. 더 오랜 동안 앉아 있기 위함입니다.


숲의 인디언들은 나무를 보며 서 있는 사람이라고 했고, 사람을 보며 걸어다니는 나무라고 하였습니다. 살아갈 수록 더욱 분명해지는 한 가지의 생각이 있습니다. 사람이 나무처럼 꽃처럼 제자리에 머무를 수 있다면, 일상을 살아가다가 틈틈이 머물러 앉아 있을 수 있다면, 지구별 이 땅에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결코 과장된 말도 허황된 말도 아닙니다.


한 가지의 예로 요가 동작 중 다들 힘겨워 하던 동작이 있습니다. 상체를 앞으로 구부려 손끝으로 발끝을 잡고, 상체와 하체를 반으로 접는 동작입니다. 예전에 쓰던 일명 폴더 폰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 하다 보면 몸은 접히지 않고 등은 산처럼 솟아 오르고 저도 모르게 숨은 턱턱 걸리며 몸도 마음도 턱 걸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대로 멈춤 동작을 지속하는 일은 온몸에 진땀이 나는 일이 됩니다. 내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는 순간입니다. 이때에도 흐르는 물같은 비결이 하나 있습니다. 


먼저 들숨 날숨의 호흡이 거칠에 지지 않게 하는 일입니다. 호흡의 평온함은 그대로 마음의 평온함으로 이어집니다. 모든 순간의 호흡을 편안하게 유지하는 일입니다. 호흡의 숨결은 그대로 몸의 근육결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몸이 더 나아가지 않을 때 숨을 들이 쉬고, 몸의 굳은 부분을 알아차리며, 숨을 내쉬면서 그 부분에 힘을 푸는 일입니다. 숨과 몸과 의식, 그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면서 지속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5분 이상 지속할 수 있다면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내 몸이 폴더 폰이 되는.


그러기 위해선 내 몸을 바라보는 의식이 매 순간 깨어 있어야 합니다. 움직임의 삶에 익숙한 우리들에겐 한 순간 깨어 있지 못하고, 의식이 무의식이 되는 순간, 숨은 턱 막히려 하고, 마음 따로 몸 따로 낑낑거리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깨어서 숨을 편안하게 유지하며, 숨을 내쉴 때 조금씩 굳은 부분에 힘을 풀면서 한 동작을 지속하는 일. 몸이 멈추고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고요한 시간입니다. 깨어 있는 것은 바라보는 의식입니다.


이렇게 한 동작을 5분 이상 지속할 수 있다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 역시도 그랬고, 1분의 시간도 길게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요가를 예로 드는 이유는 머물러 앉아 있기 위함입니다. 예전에 제 자신이 요가를 배우며, 또 저보다 뒤에 배우려는 분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면서, 지금껏 앉아 있는 일에 대한 생각을 더 깊이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일상을 살아가다가 깨어서 홀로 앉아 있을 수 있다면, 사람도 나무와 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내내 떠나지 않고 제 곁을 맴도는 생각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이 주변을 바람처럼 서성이고 맴도는 마음의 부름 같습니다.



앉아 있는 일은 비로소 내면으로 들어가는 일, 스스로 깊어지는 일입니다. 내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산책길이 됩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과 마주하게 된다면, 그것은 처음이기 때문입니다. 저에겐 태초의 혼돈과 어둠처럼 다가왔습니다. 그 속에서 한 점 별빛을 많이도 더듬어 찾았습니다. 


지금도 늘 낮과 밤처럼, 도로 위에 터널처럼 지금도 아무렇지도 않게 어둠은 찾아오고 아침 해는 돌고 돌아서 찾아옵니다. 오르내림처럼 들나듦처럼 들숨 날숨처럼. 그렇게 제가 움직이는 것이겠지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한 순간도 잠자는 순간에도 쉼없이 움직이는 제 생각과 마음에 안식을 주기를 원합니다. 앉아 있음은 안식이 됩니다. 토머스 머튼의 말처럼 태초의 에덴 동산이 되고, 살아서 미리 체험하는 천국이 됩니다. 비로소 머물러 앉아 고요한 안식을 누리기를 원하며, 오늘 하루도 틈틈이 더 앉아 있기를 소망합니다.


어린 나무의 싹이 굵은 나무가 되고, 꽃씨가 꽃이 되는 그 보이지 않는 선명한 길이, 단지 제자리에 머물러 앉아 있기 때문은 아닌지 거꾸로 생각해봅니다. 사람이 푸른 나무가 되고, 아름다운 꽃이 되는 길을, 말없이 알려 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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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와 됫박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94)


 상처와 됫박


이따금씩 떠오르는 사람 중에 변관수 할아버지가 있다. 나이와 믿음 직업 등과 상관없이 얼마든지 정을 나눌 수 있는 분으로 남아 있다. 변관수 할아버지는 단강교회가 세워진 섬뜰마을에 살았는데, 허리가 ‘ㄱ’자로 꺾인 분이었다. 언젠가 할아버지는 논둑에서 당신 몸의 상처를 보여준 적이 있다. 6.25때 입었다는 허리의 상처가 결정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해마다 겨울이 다가오면 할아버지가 이번 겨울을 잘 나실까 싶은 생각이 들곤 했다. 겨울잠에 들기라도 한 듯 바깥출입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겨울 지나 봄 돌아오면 제일 먼저 지게를 지고 나타나는 분이 변관수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의 몸도 기역자, 그 위로 삐쭉 솟아오른 지게도 기역자, 지게를 진 할아버지의 모습은 묘한 형상을 만들어내곤 했다. 논둑 밭둑에서 달래를 캐는 날엔 꼭 사택에 들러 한 움큼 달래를 건네주던 정 많던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 집에는 됫박이 하나 있었다. 할아버지 말로는 ‘부엉이가 방귀 뀐’ 소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소나무의 어떤 부분에 병균이 침투하면 그 부분이 크게 부어오르듯이 두툼하게 변한다. 일종의 상처일 터였다. 그 부분을 잘라내어 ‘부엉이 방귀 뀐’ 부분은 동그랗게 파내어 됫박으로 쓰고, 가지 부분은 됫박의 자루로 쓰는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는 벌써 오래 전, 할아버지 집에 있던 검붉은 빛 선명한 부엉이 방귀 뀐 됫박은 어디에 남았을지 모르겠다. 따로 됫박을 쓸 일도 드문 세상, 어쩌면 할아버지와 함께 이 땅에서 사라진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문득 떠오른 ‘부엉이가 방귀 뀐’ 됫박은 묘한 의미로 다가온다. 어쩌면 상처가 됫박이 된다는.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도, 다른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품의 크기나 깊이도, 어쩌면 그가 입은 상처 혹은 그가 이겨낸 상처와 관련이 있을 거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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