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마음의 초점

신동숙의 글밭(225)


진실, 마음의 초점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셨으니. 그렇다면 온전한 사랑을 위한 그 원수란 나에게 있어 어떤 대상일까? 그러한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이 단순한 말씀이 이어져 생각은 강을 이룬다. 처음같이 영원히 마르지도 그치지도 않는 샘물처럼 이 진리의 말씀에 오늘도 내 영혼이 마른 목을 축이듯 생각의 두레박을 내린다.


오늘날 당장에 원수를 꼽자면, 개인적인 원수보다는 공적인 원수가 먼저 떠오른다. 코로나19의 2차 위기를 다함께 조심스레 지나는 이 시기에 있어서 사회 공적인 원수란, 유독 자기들만의 구원과 욕망을 위해서 온전하신 하느님과 이웃 사랑을 등지고 얼굴에서 마스크를 벗은 채 대면하여 떠드는 자들일 것이다. 그런 원수까지도 예수는 사랑하라 하셨으니, 오늘 하루를 살아오면서 고개를 들려던 내 교만의 아성에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고 허무시는 듯하다.


그리고 사랑하라. 사랑 중에서 가장 온전한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덕 있는 사람이 사랑하는 이에게 바라며 주고자 하는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자녀가 부모에게 바라는 사랑은 어떠한 사랑일까? 만약에 부모가 그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헛된 욕망과 그릇된 자아상을 심겨준 후 자녀를 부모의 욕망을 따르는 대리자쯤으로 만들어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일부 왜곡된 자아상과 자녀상을 지닌 부모들의 자녀에게서 심리적인 분열을 일으키는 사례가 많다는 학술적인 보고가 심리학에서는 심심찮게 거론되고 있다. 가령 돈과 성공을 위해서 원치도 않는 자녀의 손에 청진기와 칼을 잡혀주는 재력가의 부모와 그 자녀 사이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불일치 같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서로가 일치되지 못하는 마음은 삶에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불폅화음은 불행의 감정과 닮아 있다. 일치에서 오는 만족감과 행복감보다는 분열과 세상의 욕망에 이끌려 다만 주어진 하루를 시계추 속에서 흔들리다가 맞이하게 되는 그들의 저녁은 어떠할까? 반면에 서로가 말이 통해서 나와 너가 일치되는 기분이란, 사람이 느낄 수 있는 행복감 중에선 최상의 행복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최고의 배우자는 서로 말이 통하는 상대라는 통계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자녀가 부모에게 바라는 사랑이란, 자녀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주는 투명한 사랑이라는 얘기가 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부모 자신이 자기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일치, 나와 상대를 있는 모습 그대로 볼 수 있다면, 또한 상대가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비추어 줄 수 있다면, 그래서 서로가 말이 통하고, 마음의 초점이 맞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좋다는 말만으로는 충분치 않을 것이다. 그런 일치란 하늘과 땅이 함께 춤추며 기뻐할 일인 것이다. 함석헌 선생은 그의 시 <얼굴>에서, 사람이 살면서 그런 얼굴 하나를 만나고 죽을 수 있다면 잘 살아온 인생이라고 했다.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런 얼굴 하나를 만났던가 스스로를 돌아본다. 그리고 먼저 나 자신이 그러한 얼굴일 수 있을까 하는 성찰을 해본다. 학창 시절 방학 숙제였던 탐구 생활이 바깥으로 시선을 향하게 했다면, 이제는 시선을 거두어 내면으로 향하는 진실 탐구는 언제나 자기 탐구에서 시작된다. 


나와 마음의 초점이 맞는 상대를 만나기 위해선 먼저 자기 마음의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의 두 눈동자가 맞추어야 할 마음의 초점이란 진실이다. 사물이든 현상이든 나 자신의 마음속이든 상대방이든, 있는 모습 그대로 보기 위한 시선은 진실된 시선인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나와 홀로 있을 때의 내 모습이 살아갈수록 점점 일치되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 구도와 순례의 지향점일 것이다. 법정 스님의 말씀에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비밀이 많아진다는 것은 그 영혼이 탁해지는 것'이라던 말씀이 등불 같다. 진실이 무엇이기에?



그러하기에 동서양의 선지식들과 영성가들은 하나같이 그토록 진실을 강조했던가? 진리와 사랑의 길을 걸어가던 그들의 앞선 발자국이 어둔 세상에 별자리처럼 어둔 가슴에 고마운 별빛으로 빛난다. 곰곰이 생각할 수록 감동과 고마움의 물결이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 '진실'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일화가 하나 있다. 그 옛날 연세대학교를 다니던 두 학생이 성철 스님을 만나기 위해 가야산을 올랐다고 한다. 그 중 한 친구는 공연히 친구를 따라서 절에 갔다가 우연히 만난 성철 스님이 시키는 삼천배를 두고 말대꾸를 했다가, 되려 성철 스님으로부터 "니는 만배 해라!"는 말에 오기가 나서 기어이 만배를 마친 후 당당히 스님에게 한 말씀을 청했다고 한다.


그때 들었던 성철 스님의 한 말씀은 "자신을 속이지 마라."였다. 그 시절에도 이미 커다란 깨우침, 구경각을 이루었다고 세상에 널리 소문이 난 스님이었기에 뭔가 특별한 한 말씀을 해주실 거라 잔뜩 기대를 품었던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평범한 한 말씀에 공연히 실망만 하고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로부터 며칠 동안 그 한 말씀이 마음에서 떠나질 않던 그 학생은 덜컥 무거운 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남을 속이지 마라는 말보다 '자신을 속이지 마라'는 말씀의 엄중함에 다시 산을 찾은 그 청년은 그대로 성철 스님의 제자가 된다. 그가 바로 성철 스님의 맏상좌인 원택 스님이다. 구도의 첫걸음은 진실인 것이다. 


그리고 서양의 영성가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 구도의 길, 그리스도를 따르는 첫걸음은 '진실'인 것이다. 8.15 광복절날 광화문 아수라장 집회 이후부터 폭풍처럼 어수선해지려는 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책꽂이를 살폈다. 작년 가을에 읽고서 책꽂이에 꽂아둔 브레넌 매닝의 <어리석은 자는 복이 있나니>를 다시 펼쳤다. 연필로 밑줄까지 그으면서 분명히 보았던 내용인데 새롭게 읽히며 새롭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그래서 거듭 연필로 밑줄을 그으며 곰곰이 뜻을 가슴으로 되뇌이며 몇 날 며칠을 읽었다. 이 책을 거듭 읽으면서 마음에 기쁨이 샘솟는 이유는 이 책을 소개해 주신 분이 개신교 목사님이기 때문이다.


교회와 목사라는 호칭을 땅바닥으로 떨어뜨린 일부 대형 교회 목회자와 그들이 앞세운 전** 사태를 두고, 교회개혁실천연대의 고문인 방인성 목사님은 뼈 아픈 말씀을 하셨다. 삼대째 목회자 집안이라고 하시며 요즘 아들로부터 학교에서 우리 아버지가 목사라는 말을 부끄러워서 차마 할 수가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시며, 참담해 하시는 모습을 영상으로 보게 되었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만 같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는지, 비추어 헤아릴 수 있는 것은 그동안 보아온 선현들의 빛나는 가르침들이다. 옛말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던가. 알고 보면 사람의 거짓 자아는 무너질 수 있어도, 본래 하늘이란 단 한 번도 무너진 적이 없는 것이다. 본성처럼 투명한 하늘은 이 땅에 욕심을 쌓아둔 적이 없기에 무너질 것도 없고 늘 투명한 하늘인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복이 있나니>, 브레넌 매닝이 우리들 영혼에 불태운 횃불 같은 말씀을 등불 삼아, 이 어지러운 혼돈과 어둠 속에서 하나의 등불을 비추고자 한다. "진실 추구의 첫걸음은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겠다는 결단이다."(20쪽), "복음은 우리에게 괴로우리만치 정직해질 것을 강요한다.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는 진실해야 한다."(64쪽), "우리의 가장 내밀한 생각까지 읽으시는 하느님 앞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진실성이란 겉사람과 속사람을 점점 일치시켜 나간다는 뜻이다. 그러려면 단순히 자신에게 진실해야 한다. 그래야 어떤 인간적 요소도 우리를 거짓되게 만들 수 없다."(65쪽) 이 대목들을 읽자니, 동양의 성자 성철 스님의 법문인 "자기를 속이지 마라."와 한치도 다르지 않은 구도자의 첫걸음이자 한결같이 걸어가야 할 구도의 길과 닮았는 생각이 든다.


북미인들이 열광하는 수도승이자 영성 작가인 토머스 머튼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준엄한 심판의 빛을 면케 해주는 거짓 평안이 아니라, 계시된 쓰라린 진리를 과감히 수용하고, 타성과 이기주의를 버려 성령의 요구에 전적으로 복종하고, 간절히 기도로 도움을 청하고, 하느님이 명하시는 모든 수고에 마음껏 자신을 바칠 수 있는 은혜다."(64쪽) 불교에서 말하는 삼보(三寶,불 법 승)에 귀의하는 마음이자 깨달음의 구경각에 이르고자 진리를 추구하는 수도승의 순례길과 역시나 다르지 않다. 자유이신 하느님은 어느곳에서나 불고 싶은데로 부는 성령의 바람인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첫걸음은 진실인 것이다. 예수가 말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하신 온전한 사랑의 첫걸음은 진실인 것이다. 그 사랑의 길로 나아갈수록 겉과 속이 일치 되는 진실된 삶을 살게 될 것이기에. 그리하여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보며, 고요히 맑아진 나를 통해 너를 있는 모습 그대로 비추어 바라보며, 없이 계시는 투명한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진실에 초점을 맞춘 눈. 마태복음 8복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느님을 볼 것임이오.'


대중의 두리뭉실한 눈보다는 눈 밝은 한 사람의 시선이 나는 언제나 두려웠다. 사랑에도 눈 먼 사랑이 있다. 요즘처럼 사랑을 제일로 외치는 교회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맹목적이고 맹신적인 사랑은 눈 먼 사랑이다. 마치 앞을 못 보거나, 두 눈의 초점이 맞지 않아서 똑바로 볼 수 없는 안타깝고 답답한 그런 사랑 말이다. 사랑의 눈동자는 진실에 초점을 맞추어야 똑바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는데 어떻게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할 수 있을까? 가깝게는 나 자신의 모습부터. 작은 풀꽃 하나도 두 눈의 초점을 맞추지 않고는 그 형체를 똑바로 볼 수 없듯이, 마음속에 피어나는 풀꽃 같은 한 마음도 진실의 두 눈동자로 매순간 새롭게 초점을 맞추어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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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지 못한 삶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72)


고르지 못한 삶



“날씨가 고르지 못해서 힘들지요?”


수요 저녁예배 성도의 교제시간, 피곤이 가득한 교우들께 그렇게 인사했을 때 김영옥 집사님이 대답을 했다.


“날이 추워 걱정이에유. 담배가 많이 얼었어유.” 


잎담배를 모종하고서는 비닐로 씌웠는데도 비닐에 닿은 부분이 많이 얼었다는 것이었다.


날이 추우면 얼어 죽고, 비가 안 오면 말라죽고, 많이 오면 잠겨 죽고, 그나마 키운 건 헐값 되기 일쑤고.


고르지 못한 일기.

고르지 못한 삶.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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