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사라짐, 아름다움의 순환 속에서

존재, 사라짐, 아름다움의 순환 속에서





“좋은 때에는 기뻐하고, 어려운 때에는 생각하여라.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 그러기에 사람은 제 앞일을 알지 못한다.”(전7:14)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이번 주에는 며칠 앞서 편지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주일 직전보다는 주중에 소식을 나누는 것이 더 좋겠다는 제안 때문입니다. 별고 없이 잘 지내시는지요? 함께 시간의 흐름을 타고 지낼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격절의 시간이 길어지니 그리움이 깊어갑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가을빛이 왠지 너누룩해 보입니다. 오늘이 한로寒露네요. 찬 이슬이 내리는 때가 다가왔습니다. 그래서인지 바람이 서늘합니다. 농가월령가는 이맘때의 풍경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제비는 돌아가고 떼기러기 언제 왔노. 벽공碧空(푸른 하늘)에 우는 소리 찬 이슬 재촉는다. 만산滿山 풍엽楓葉(산에 가득 찬 단풍잎)은 연지臙脂(화장할 때 두 볼에 찍어 바르는 붉은 색)를 물들이고, 울 밑에 황국화黃菊花는 추광秋光(가을 빛)을 자랑한다.”

아직 본격적인 단풍철은 아니지만 그래도 계절이 깊어가고 있음을 날로 실감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공원 곳곳을 붉게 물들이고 있던 꽃무릇이 다 시들었습니다. 꽃대 위에는 마치 사위어버린 불꽃같은 꽃의 잔해가 남아 허망한 열정의 시간을 돌아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꽃대 아래도 잎들이 조금씩 피어나고 있습니다. 소박하고 조촐하게 피어나는 여뀌는 자기를 도드라지게 보일 생각이 아예 없는 것 같아 더욱 마음이 갑니다. 공원 곳곳에 서양등골나물 흰꽃이 만발입니다. 외국에서 들어온 생태교란종이라지만 눈꽃을 이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 제법 그럴싸합니다.

식물들은 묵묵히 자기 시간을 살아갈 뿐입니다. 사람만 홀로 유정하여 쓸쓸하다느니, 허망하다느니 요란을 떨 뿐입니다.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Wislawa Szymborska, 1923-2012)는 ‘두 번은 없다’라는 시에서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고 노래합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시간은 그런 의미에서 유일한 시간입니다.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입니다. 삶이 아무리 힘겹고 공허해도 살아 있다는 것은 그래서 아름답습니다. 소멸할 것임을 알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그러므로 아름답다”

존재, 사라짐, 아름다움이 이렇게 아름답게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쓸데없는 불안이 우리 영혼을 잠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전도서 기자는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전3:11)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맛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 멋진 가을날 우리의 시간이 그런 아름다움으로 채워지면 좋겠습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가 행했던 성찬식의 후일담이 곳곳에서 들려옵니다. 낯선 경험이기는 했지만 대체로 은혜로운 시간이었다고들 말씀하시더군요. 빵과 포도주를 준비하는 과정부터, 의례에 동참하는 일이 능동적으로 이루어졌기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어느 부부는 ‘빵과 포도주’를 서로에게 건네며 “이는 당신을 위해 주시는 우리 주님의 몸입니다.” “이는 당신을 위해 흘리신 주님의 피입니다.”라고 말할 때 가슴 깊이 뭔가가 들어온 것 같더라고 증언하시더군요. 한 공간에서 성례를 집행하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주님은 우리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은총으로 모두를 감싸주셨습니다. 공간적으로는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은혜의 자장 가운데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해마다 이 무렵이면 교회 야외예배를 준비하느라 분주했습니다. 기차를 전세 내서 갔던 것 기억나시지요? 어린 시절 수학여행을 가는 것처럼 설렜던 그 감정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김유정 역 앞 식당에서 때 맞추어 익어가던 춘천닭갈비의 맛도 떠오릅니다. 함께 걸으며 도란도란 나누었던 이야기의 내용은 다 잊었지만 그 장면만큼은 머리에 오래 남아 있습니다. 참 좋았던 시절입니다. 불광동 팀 수양관도 잊을 수 없습니다. 노천극장에서 드렸던 예배의 기억도 새롭습니다. 새들도 찾아와 즐겁게 노래를 불러주었었지요. 잔디밭에서 나누었던 커피 향이 그립기만 합니다.

저는 어제 오늘 아름다운 원로 분들의 얼굴을 한 분 한 분 떠올리며 가상의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함께 해 온 시간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기쁨과 슬픔의 시간을 함께 건넜다는 사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코로나19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하루 나들이를 기획하고 있었을 테지요. 먼 곳을 찾아갈 수는 없었지만, 버스를 타고 오가며 보는 경치며, 차 안에서 주고받는 대화가 참 아름다웠습니다. 바람에 가만히 흔들리는 코스모스와 갈대, 그리고 잔잔한 햇살이 고즈넉했습니다.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풍경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집니다.

대면예배를 드리지 못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에도 우리 교회의 새 식구가 되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아름다운 공동체에 대한 목마름 때문일 겁니다. 아직 대면하여 사귈 수는 없더라도 그분들이 청파교회에 속한 지체임을 기쁘게 여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새 교우들에게 우리 교회를 소개하고 교회생활을 안내하는 새교우 교육은 영상을 통해 시행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에 감리교회의 감독 선거가 열립니다. 각 연회의 감독과 4년 임기의 감독회장을 선출하는 중요한 모임입니다. 들어서 아시겠지만 감리교회는 오랫동안 감독선거로 인해 분열을 거듭해 왔습니다. 소송과 시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부끄럽지만 그게 현실입니다. 올해도 감독회장 선거를 앞두고 아주 심각한 갈등 상황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어느 때부터인지 교회의 지도력이 심각한 위기에 처했습니다. 거룩한 영적 직무를 위임받은 이들이 세상의 추문거리로 전락하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올해는 어느 분들에게 감독의 직임이 맡겨지든 그분들이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으로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모세가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며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본 장인 이드로는 신실한 사람들을 뽑아 일을 나누라고 권고하면서 그 기준을 정해줍니다.

“또 자네는 백성 가운데서 능력과 덕을 함께 갖춘 사람,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참되어서 거짓이 없으며 부정직한 소득을 싫어하는 사람을 뽑아서, 백성 위에 세우게.”(출18:21)

능력과 덕을 함께 갖춘 사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 거짓이 없어 부정직한 소득을 싫어하는 사람이라야 사심 없이 백성의 문제를 다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감독의 직임은 명예로운 자리도 아니고, 높은 자리도 아닙니다. 섬김의 자리입니다. 우리의 전도된 현실을 놓고 비웃고 손가락질만 할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절실하게 기도를 올려야 합니다. 우리들 개인의 문제를 위해서도 열심히 기도해야 하지만, 우리가 속한 공동체와 감리교회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운 후에 재야로 물러가면서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이런 약속을 합니다.

“나는 당신들이 잘 되도록 기도할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일을 그친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나는, 당신들이 가장 선하고 가장 바른길로 가도록 가르치겠습니다.”(삼상12:23)

이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여전히 세상은 소란스럽지만 평화로운 세상의 꿈은 포기될 수 없습니다. 이 아름다운 가을날,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0년 10월 8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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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걸음이지 않도록 누군가

신동숙의 글밭(251)


헛걸음이지 않도록 누군가




가을날 산길을 걷는 걸음이

헛걸음이지 않도록 

누군가


떨어진 잎 사이로

도토리 알밤이 반질반질 


땅바닥을 보며 걷는 걸음이

헛걸음이지 않도록

누군가


집안에 뒹구는 

종이 조각들 차곡차곡


하늘을 보며 걷는 걸음이

헛걸음이지 않도록

누군가


까맣게 태우는 밤

별들을 흩어 놓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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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열쇠

한희철의 얘기마을(110)


소리의 열쇠


“한희철 목사님”

“강은미 사모님”

“한소리”

“한규민”


저녁 무렵, 마당에서 혼자 놀던 소리가 날이 어두워지자 집으로 들어옵니다. 문이 닫혀 있습니다. 그러자 소리는 닫힌 문을 두드리며 차례대로 식구 이름을 댑니다.


짐짓 듣고도 모른 체 합니다. 소리는 더 큰 목소리로 또박 또박 식구 이름을 다시 한 번 외쳐댑니다. 웃으며 나가 문을 열어줍니다. 소리가 히힝 웃으며 들어옵니다. 손에 얼굴에 흙이 가득합니다. 


며칠 전 문을 열어 달라 두드리는 소리에게 아내는 식구 이름을 물었습니다.


“누구니?”

“소리”

“소리가 누군데?”

“한소리요.”

“아빠가 누구지?”

“한희철 목사님”

“엄마는?”

“강은미 사모님”

“동생은?”

“한규민”


그제서야 “응 소리가 맞구나” 하며 문을 열어 주었던 것입니다. 한두 번 그런 일이 더 있자 아예 소리는 문을 열어달란 말 대신 식구 이름을 대게 되었습니다. 식구 이름을 대는 것이 소리에겐 ‘열려라 참깨’가 된 것입니다. 세 살 난 딸은 그렇게 문을 엽니다.



그런 소리의 모습을 보며 나는 기도의 의미를 생각합니다. 식구 이름을 대는 것, 그게 문 여는 일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만, 엄마 아빠는 그 뜻을 알고 있고 원하는 대로 문을 열어줍니다. 그건 서로의 약속이기도 하며 따뜻한 이해이기도 합니다. ‘문 열어 달라’는 직접적긴 말보다는 나란히 식구 이름을 대는 어린 딸의 재롱을 기쁨으로 받으며 기꺼이 문을 여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 아니 마땅히 구할 것조차 알지 못한 채 기도라는 형식을 빌어 그분께 아뢰더라도 그분은 우리 마음 헤아려 우리 기도를 들으실 것입니다. 사실 우리 마음속 깊은 탄식을 어찌 꼭 맞는 말로 담을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서툰 우리들의 기도도 하나님은 제대로 받아 주심을 나는 믿습니다. 닫힌 문 앞에 서서 식구 이름을 나란히 외워대는 어린 딸에게서 나는 쉽지  않은 그 믿음을 배웁니다.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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