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난합니다

한희철의 얘기마을(132)


우리는 가난합니다


“우리는 가난합니다.”


더는 허름할 수 없는 언덕배기 작은 토담집, 시커멓게 그을린 한쪽 흙벽엔 그렇게 쓰여 있었다. 또렷한 글씨, 5학년 봉철이었을까, 중학교 다니는 민숙이였을까, 누가 그 말을 거기에 그렇게 썼을까?


아까운 줄 모르게 던진 나뭇단 불길이 반딧불 같은 불티를 날리며 하늘 높이 솟고, 갑작스런 부음에 놀라 달려온 마을 사람들이 불가로 둘러섰을 때, 불길에 비친 까만 벽의 하얀 글씨.


“우리는 가난합니다.”




보건소장님의 연락을 받고 작실로 올라갔을 땐, 이미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입으로 코로 흰 거품을 뿜으며 아무 의식이 없었다. 혈압 240-140. 손전등으로 불을 비춰도 동공에 반응이 없었다.


변정림 성도. 한동안 뵙지 못한 그를 난 그런 모습으로 봬야 했다. 갑상선 이상으로 목이 크게 부어올라 여러 해 고생하던, 짧지만 함께 신앙생활 하던 그는 더없이 초라하고 고통스런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그의 고통을 덜자고 한땐 폼 잡아, 아니 가난하지만 주머니를 정성으로 털어 돈을 모으기도 했던 우리들. 감수해야 할 수술의 위험을 본인이 꺼려 결국 두세 번 병원 들락거린 것이 고작이었던, 그걸 핑계 삼아 혹 누가 물으면 우린 그래도 우리 나름대로 할 바를 했습니다 하는 대답거리를 가짐으로 그럴 듯이 그의 아픔으로부터 거리를 뒀던 우리들. 괴롭고 초라한 그의 모습은 ‘그래 너희들 마음일랑 내게서 얼마만한 거리였냐?’ 되묻고 있었다.


변정림 성도는 얼마 전 광철 씨에게 전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가슴에 “젊은이여 일어나라!”라는 히브리어가 쓰인 티였다. 


일어나라고? 이상하게도 그 말은 참담한 마음속을 가시처럼 걸어 다녔다. 하나님이 지켜 달라고, 어찌 보면 의례적인 기도를 드리는 동안 그는 서럽디 서러운 삶을 마쳤다. 기도하는 사이 숨을 거뒀다는 사실 외에는 누구도 위로를 찾을 수가 없었다.


둘러선 마을 사람들과 불을 쬐다 문득 발견한 글자 “우린 가난합니다.”가 옷에 쓰인 “젊은이여 일어나라.”와 겹쳐선 그냥 울고 싶었다.


못 풀고 간 설움, 꽁꽁 못질하듯 가슴 속에만 담고 간 설움을 그냥 울고 싶었다. 쯧쯧, 그나마 떼거지 된 거 아니냐며, 혀를 차는 한줌 동정 속에서.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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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순하게 하는 소리

신동숙의 글밭(266)


귀를 순하게 하는 소리




낮동안 울리던 귀를

밤이면 순하게 슬어주던


풀벌레 소리 멈추고

가을밤은 깊어갑니다


오늘밤엔 창문 틈으로 들려오는

가을비 소리에 귀를 기울여봅니다


우리의 귀를 순하게 하는 

자연의 소리는 늘 가까이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지 멈추어 

귀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어느 곳에서든 

누구나 들을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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