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가에서

한희철의 얘기마을(139)


강가에서


점심상을 막 물렸을 때 어디서 꺼냈는지 소리가 사진 한 장을 들고 와서는 “아빠, 바다에 가자.” 하고 졸랐습니다. 무슨 얘긴가 싶어 사진을 봤더니 언젠가 강가에 나가 찍은 제 사진이었습니다. 이제 두 돌이 지난 소리는 아직 강과 바다를 구별 못합니다. 얼핏 내다본 창 밖 봄볕이 따사롭습니다.


“좋아, 가자.”


신이 난 소리가 벌써 신발을 챙겨 신고 문을 나섭니다. 아내가 규민이를 안고 나섰습니다. 흐르는 냇물을 따라 강가로 갑니다. 냇물 소리에 어울린 참새, 까치의 지저귐이 유쾌하고, 새로 나타난 종다리, 할미새의 날갯짓이 경쾌합니다.


서울에서 있는 결혼식에 대부분의 마을 분들이 올라간 탓에 그 넓은 강가 밭이 모처럼 한적합니다. 파란 순이 돋아 나온 마늘밭이 당근 씨 뿌리느라 새로 갈은 검은 흙과 어울려 더없이 푸릅니다.


남한강, 쪽빛 강물이 언제라도 변함없이 흐릅니다. 햇빛에 눈이 부신 은빛 물결을 밟고 건너온 바람이 시원하고 맑습니다. 그야말로 바람이 답니다.



강가를 따라 곱게 깔린 모래밭에 털퍼덕 주저앉은 소리가 신이 났습니다. 간지럽도록 부드러운 모래를 제 발에 뿌리기도 하고, 두 손을 강물에 담갔다가 팔락팔락 햇볕에 털어내기도 합니다.


동그란 징검다리를 만들며 퐁퐁 물 위를 달리는 물수제비, 소리도 아빠를 따라 돌멩이를 던져 보지만 그때마다 제 발 앞에 폭폭 빠질 뿐입니다.


종이배를 접어 띄웁니다. 쉽게 뒤집혀, 뒤집힌 채로 떠내려가는 종이배를 향해 소리가 손을 흔듭니다. 그래도 종이배는 소리의 기억 속으로 오래도록 흐를 것입니다.


엊그제 백일이 지난 규민이가 엄마 품에 안겨 잠이 깊지만 아무래도 강가 바람이 아기에겐 찹니다. 더 있고 싶어 하는 소리를 달래 집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길 소리가 흥얼흥얼 노래를 합니다. 


“토끼야 토끼야 산 속의 토끼야. 

겨울이 되면은 무얼 먹고 사느냐.”


겨울이 되어도 걱정이 없다는, 기분이 좋을 때마다 부르는 어린 딸의 노래는 묘하게도 그때마다 내 가슴을 덥혀주곤 합니다.


그날 밤 규민이가 몇 번 기침을 했지만 걱정은 없었습니다. 엄마 아빠 그리고 소리가 일찍 잠든 규민이 머리맡에 나란히 앉아 기도를 했으니까요. 우리 모두를, 우리가 기억하는 모든 이들을 건강하게 해달라구요.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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