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만남

한희철 얘기마을(149)


따뜻한 만남



모든 진료 활동을 마치고 돌아가기 전 군의관은 찬찬히 하루 동안의 안타까움을 말했습니다. 진료를 받은 마을 분들의 대부분이 전해 드린 몇 알의 약만으론 해결되기 어려운 병이었다는 것입니다. 보다 근원적이고 장기적인 진찰과 치료가 필요한 분들인데, 공연히 허세나 부린 것 아닌지 모르겠다며 미안해했습니다. 


그러나 압니다. 그런 하루의 시간이 고마운 게 단지 병명을 짚어주고 몇 알 약을 전해준 데 있지는 않습니다. 쉽지 않은 훈련을 마쳐 피곤할 텐데도 귀대를 앞두고 하루의 시간을 마을 주민을 위해 할애한 그 마음이 무엇보다 고마운 것입니다.


그저 논밭이나 망가뜨리고 당연한 듯 돌아서곤 했던 해마다의 훈련인데, 그렇지 않은 모습을 대했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도 고마웠던 것입니다. 훈련 나온 군복 입은 의사들께 받은 진료, 따뜻한 만남이었습니다. 


-<얘기마을>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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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은 떨구어 주시는 씨앗

신동숙의 글밭(280)


소망은 떨구어 주시는 씨앗


저는 바라고 원하는 기도 앞에 언제나 떨며, 두렵고 머뭇머뭇 조심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장소, 어느 종교, 어느 누가 드리는, 어떠한 형태의 기도라고 해도 기도에는 힘이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제가 드린 기도대로 이루어질까 싶어서 기도 앞에 언제나 머뭇거리며 주저하게 되는 마음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특정 종교 생활에 꾸준히 성실히 몸 담을 수 있는 배경이 되는 뒷심은, 기도의 힘을 맛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주위에 여러 종교인들의 얘기를 통해 종종 듣게 되면서 그러리라 짐작해봅니다.


하지만 그 기도란 우리네 어머니들이 장독 위에 정안수를 떠 놓으시고 하늘의 달을 바라보며 홀로 두 손으로 빌던 소박한 기도가 예배당에서 드리는 새벽 기도와 다르지 않다는 점 또한 엄연한 사실입니다. 


우주의 하늘은 이미 모든 생명에게 두루 공평하게 열린 하늘입니다. 기도란 장소와 형식보다는 마음의 간절함에 달린 영역입니다.


물론 혼자서 태우는 한 개비의 장작불보다는 함께 여럿이 어울려 태우는 모닥불이 아울러 받게 되는 커다란 상생의 힘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도 새벽이면 예배당이나 성당 또는 조용한 사찰이나 안전한 숲을 찾아서, 제 자신이 한 그루 나무가 되어 고요히 말없이 앉아 있고픈 적적한 마음이 늘 하늘 같습니다.


바라고 원하는 기도 앞에 떨며, 스스로가 머뭇머뭇 주저하며 스르르 내려놓다 보면 어느덧 제게 있어 기도란, 그저 머물러 앉아 있는 고요한 시간으로 흐를 뿐입니다. 시간을 잊은 그곳은 생산성과 효율성과 경제성이라는 현대인에게 익숙한 논리와 가치는 발붙일 수 없는 성역이 됩니다. 


저의 이런 한 생각은 이십대 초반부터 생긴, 미리 짐작해 볼 수 있는 기도의 힘에 대한 믿음이 생기면서, 늘 머뭇머뭇 엉성하게나마 흘러오는 내면의 풍경입니다. 




만약에 기도의 자리든 마음 한 구석에라도, 나의 요구와 필요를 채우려는 육신의 안일과 분노와 탐욕과 어리석음으로 가득 채운 무거운 기도를 잔뜩 입으로 꺼내었거나 설령 마음에 품었다가, 그것이 나중에 어느날 현실이 되고 난 후의 뒷일을 미루어 짐작해봅니다.


그때 가서 '이게 아닌데!' 하는, 그제서야 온전치 못한 바램을 저 혼자서 원을 세워 집중해서 살아오느라 아까운 인생을 낭비했다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온다면, 얼마나 애석할까 싶은 그런 마음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러한 기도의 힘에 대한 믿음이, 주신 씨앗처럼 제 가슴에 떨어지고부터는, 기도란 부족한 제 자신을 채우려는 원하고 바라는 기도가 아닌, 보다 바르고 온전한 기도를 찾아야겠다는 구도의 길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이루어진 후에도 후회의 얼룩을 덜 남기도록.


바르고 온전한 소망의 기도를 찾기 위해선 바르고 온전한 법, 곧 진리를 바라보며 따르는 구도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한 마음을 먹는 일에 있어서도 조심스러움과 한 생각을 일으키는 일에 있어서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하였습니다. 모든 생명을 낳는 것은 씨앗같은 한 마음과 한 생각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제가 걸어온 진리를 찾는 여정이란, 더욱 더 부족한 제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바를 날숨마다 지우고 또 지우는 길이었음을 어렴풋이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의 제 자신이 그 구도의 선상에 있는지 스스로를 거듭 호흡처럼 감찰하며 되돌아보는 일이 어느덧 버릇이 되었습니다. 


내면의 땅을 고르고 넓히는 일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 지난한 작업을 해올 수 있었던 것은 마음을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양심이 가리키는 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원하거나 바라지 않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기도가 소망이 없는 허망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망의 의미가 보다 더 온전해지는 일입니다. 모자란 나의 소망이 아닌 보다 온전한 진리의 소망에 더 가까워지는 일입니다. 


기도란 나를 내어맡기는 시간이 됩니다. 모자라고 틀어진 나를 온전한 품에 안기우듯 맡기는, 위로와 치유와 안식을 누리는 고요함과 침묵 속에서 비로소 내면이 충만한 사랑방이 바로 기도의 자리가 됩니다.


척박한 자갈밭 같은 나의 아집과 나의 욕심과 나의 의지를 내려놓고 비운 빈 마음밭에 눈물로 비를 뿌리다 보면, 어느날 문득 떨구어 주시는 씨앗 한 알이 바로 진리의 성령이 떨구어 주시는 소망이 아닌가 하고요. 성경에서도 언제나 우리에게 소망의 씨앗 주시기를 원하나, 문제를 삼는 것은 언제나 인간의 마음밭입니다.


그렇게 받은 온전한 소망의 씨앗이란, 처음엔 미세하지만 분명하여서 세월의 흐름 속에 믿음의 싹이 트고, 진리의 땅에 더욱 뿌리를 내리며, 머리를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바람에 꺾이거나 매 순간 흔들린다 하여도 해맑게 웃을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삶으로 꽃 피울 수 있는 참된 소망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처럼 온전한 진리의 영이 떨구어 주신 진리의 온전한 소망이란, 애써 욕심껏 채우려는 모자란 나의 욕망이 아님을, 날숨을 따라서 나를 비우고 내려놓으려는 고요함 속에, 토마스 머튼 신부님이 표현한 갈망의 침묵으로 그저 머물러 앉아 날숨마다 나를 비운 빈 마음밭에, 진리의 성령이 떨구어 주고 가시는 씨앗 한 알이 참된 소망이 아닌가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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