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을 품은 기다림의 시간

소망을 품은 기다림의 시간 


“지혜 있는 사람은 하늘의 밝은 빛처럼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한 사람은 별처럼 영원히 빛날 것이다.“(단12:3)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늘 임하시기를 빕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력의 새로운 시작인 대림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끝과 시작이 손을 잡고 시간의 한 사이클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신비합니다.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하셨던 말씀이 새삼스럽게 다가옵니다.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창8:22). 계절의 변화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헤아리고, 그 시간의 갈피에 깃든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기다림의 절기입니다.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소망을 품은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은 아직 오지 않는 대상을 우리 삶 속에 모셔 들이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다가오는 대림절기에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주님을 모실 준비를 착실히 하면 좋겠습니다. 신앙은 종말론적 미래를 앞당겨 살아내는 일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여기서 시작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시간과 공간이라는 밭에 씨를 뿌리는 농부들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뿌리느냐에 따라 세상의 모습 또한 달라질 겁니다.

날이 많이 차가워졌습니다. 교회 현관 앞에 나란히 놓아두었던 국화 화분을 다 안으로 들여놓았습니다. 오늘 아침 교육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은은한 국화향이 저를 반겨주었습니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다가오는 모든 이에게 향기를 나눠주는 꽃의 너그러움이 참 고마웠습니다. 향기를 굳이 드러내려고 호들갑 떨지 않는 그 담담함이 더욱 귀하게 보입니다.

방역 단계가 올라가면서 교회 모임이 또다시 어려워졌습니다. 공간 수용 인원의 20% 정도의 출입만 허용한다고 합니다. 주기적으로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 같아 혼란스럽습니다.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투덜거린다고 하여 상황이 좋아질 리 없으니 일단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상황이 더 나빠지면 대림절 내내 비대면 예배를 진행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영혼이 불안의 물결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영혼의 닻을 단단히 내려야 할 때입니다.

교회를 그리워하는 마음, 교우들과의 친밀한 교제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하는 분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 마음을 왜 모르겠습니까? 김소월의 시 ‘가는 길’은 그리워하는 마음의 풍경을 우련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립다/말을 할까/하니 그리워//그냥 갈까/그래도//다시 더 한 번”. 그립다고 말을 할까 망설이다가 그 말을 발설하는 순간 그리움이 밀려옵니다. 그냥 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주저주저하다가 다시 돌아보는 그 미묘한 마음을 시인은 절묘하게 포착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도 이런 것이겠지요?

얼마 전 좋은 벗들과 함께 읽었던 다산 정약용의 시가 떠오릅니다. 유배지에 머물면서 썼던 시인지라 그 고적함이 쓸쓸함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가동귀家僮歸’라는 시입니다. 가동은 집안일을 돌보는 하인을 가리키는 말 같습니다. 그는 다산의 가족들이 보내는 편지를 간직한 채 천 리 길이 넘는 먼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를 통해 건네진 편지를 읽으며 다산은 가족들의 따뜻한 온기를 느낍니다. 그러나 가동이 돌아가고 난 후 더 큰 적막감과 쓸쓸함이 몰려와 그를 확고하게 사로잡았습니다.

“편지를 받으니 이야기 나누는 듯하였는데
사람이 떠나고 나니 다시금 적막하다
아무 일도 말도 없으니 하늘은 막막하고
길만은 변함없이 아득하겠구나
새재의 길은 일천 구비요
탄금대 물길은 두 줄기라네“

귀양살이하고 있어 그 땅을 벗어날 수 없지만, 마음은 ‘가동’을 따라 집으로 가고 있습니다. 굽이굽이 휘돌며 이어지는 새재 길이며 두 줄기로 뻗어 나가는 탄금대의 물길도 눈에 선합니다. 그 재를 넘으면 한양길이 활짝 열릴 터이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그저 한 쌍의 제비가 머물며
온종일 울어대니 사랑스럽구나
집소식 들어서 좋다 했는데
새로운 근심 갈래갈래 일어나네
못난 아내 날마다 운다고 하고
어린 자식 볼 날은 그 언제일까
박한 풍속 참으로 안타깝구나
뜬 말에도 아직은 불안하기만“

무심히 바라보니 금실 좋은 제비 한 쌍이 처마를 넘나들며 온종일 재재거립니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니 그리움이 더욱더 깊어갑니다. 차라리 소식을 듣지 못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집안 소식 듣고 나니 오히려 근심이 더 깊어갑니다. 객지에서 고생하는 남편을 생각하며 날마다 우는 아내며, 죄인의 아들인지라 앞길이 막막하기만 한 자식들 생각에 가슴이 미어집니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염량세태炎涼世態입니다. 좋은 시절에는 뻔질나게 드나들던 이들도 형편이 어려워지자 이러쿵저러쿵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야박한 세상에 눌려 행여 가족들의 마음에 그늘이라도 깊어지는 것은 아닐까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스스로 자기 마음을 다독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서라 이 또한 달게 받으리
세상살이 본래부터 괴로운 것을”

염려한다고 하여 상황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니, 지금은 이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푸접없는 세상이라 하여 울분을 터트리다가는 자신이 먼저 망가질 수 있음을 그는 알아차린 것입니다. 삶은 본래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가끔은 견뎌야 할 만큼 괴로울 때도 있는 법입니다. 괴로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오히려 우리 내면을 허약하게 만듭니다. 괴로움은 회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뚫고 가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러합니다. 기다림의 시간은 우리 마음을 그리스도의 마음에 접속하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대림절은 영원한 생명의 회임기懷妊期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 몸을 빌려 이 땅에 오려 하십니다. 불확실함과 혼돈과 공허가 가득한 세상이지만, 영혼이 맑고 따뜻한 사람들이 더욱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숨이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속에 부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병중에 계신 분들에게도 하나님의 치유 손길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차가운 날이 당분간 계속된다고 합니다. 옷 따뜻하게 입으시고, 목도리도 꼭 두르고 다니시면 좋겠습니다. 몸은 멀리 있어도 우리가 한 몸 공동체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루하루 맑고도 선선한 미소로 시대적 우울을 몰아내십시오.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2020년 11월 26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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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눈물

한희철 얘기마을(156)


할아버지의 눈물 



정작 모를 심던 날 할아버지는 잔 수 모르는 낮술을 드시곤 안방에 누워버렸습니다. 훌쩍훌쩍 눈물을 감추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도 달랠 수도 말릴 수도 없었습니다.


모를 심기 훨씬 전부터 할아버지는 공공연히 자랑을 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모심는 날을 일요일로 잡았고, 흔해진 기계모를 마다하고 손모를 택했습니다.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는 일곱 자식들이 며느리며, 사위며, 손주들을 데리고 한날 모를 내러 내려오기로 했던 것입니다. 두 노인네만 사는 것이 늘 적적하고 심심했는데 모내기를 이유로 온 가족이 모이게 됐으니 그 기쁨이 웬만하고 그 기다림이 여간 했겠습니까.


기계 빌려 쑥쑥 모 잘 내는 이웃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논둑을 고치고 모심기 알맞게 물을 가둬놓고선 느긋이 그날을 기다려왔습니다.


그런데 모심기로 약속한 날, 정작 모심으러 들어온 건 둘째 딸네뿐이었습니다. 모두 온다고, 오겠다고 전화론 그랬는데, 그런 전화 믿고 자랑도 했고 일꾼도 그만큼 적게 맞췄는데 결국은 둘째 딸네뿐이었던 것입니다. 


속상한 할아버지 마음 말 안 해도 알기에 술 드시는 할아버지를 아무도 말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할아버지 마음 위로하듯 하루해론 벅찬 일을 벅차게 해냈을 뿐입니다.


모심기 전날 밤, 신작로 곳집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자식들 밤늦도록 기다리며 어둠 속 줄 담배 피우던 할아버지 모습을 본 이는 따로 없었다 해도.....


-<얘기마을>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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