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런 날



이웃집 변관수 할아버지는 두고 두고 나를 부끄럽게 합니다. 허리는 다 꼬부라진 노인이 당신의 농사일을 꾸려나가는 걸 옆에서 지켜보노라면 어느 샌지 난 숨이 막혀옵니다.


노인 혼자 힘으로는 엄두가 안 나 보이는 일을 할아버지는 묵묵히 합니다. 논일, 밭일, 할아버지의 작고 야윈 몸으로는 감히 상대가 안 될 일감입니다. 씨 뿌리고, 김매고, 돌 치워내고, 비료 주고, 논둑 밭둑 풀을 깎고, 오늘 못하면 내일 하고 내일 못하면 모레 하고, 세월이 내게 숨을 허락하는 한 내 일 내가 해야지, 지칠 것도 질릴 것도 없이 할아버진 언제나 자기걸음입니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뙤약볕 쏟아지면 그 볕 다 맞고, 어느 것도 논과 밭에서 할아버지를 떼 놓을 것이 없습니다.

 


평생 농사를 지으며 켜켜 가슴에 쌓였을 답답함과 괴로움 막막함과 쓸쓸함을 어떻게 다 이겨내신 것인지, 잡풀 베어내는 당신 손에 들린 퍼런 날의 낫처럼 허튼 생각 수없이 베어냈을 가슴속 또 하나의 시퍼런 날은 무엇일지, 할아버지를 바라보면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에 턱 턱 숨이 막힙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는 내 가슴속의 한 날. 교만으로 그 날 있다 해도 무디고 녹이 슨, 어디에도 퍼렇게 빛나는 살아있는 날이 내겐 없기 때문입니다. 

-<얘기마을> (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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