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공생의 세상을 향하여



“고난 앞에서 모른 체 돌아설 권리는 없다. 불의 앞에서 사람들은 짐짓 다른 곳을 바라본다. 그러나 누가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우선적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이다. 고난이 그에게 우선권을 준다.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 지금 슬퍼하는 사람을 돌보는 것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일보다 더 시급한 의무이다.”(Matthew Fox, Original Blessing, Bear & co, p.286에 인용된 엘리 비젤의 말)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며칠 사이 제가 아침저녁으로 걷는 효창공원에 흰철쭉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꽃들이 질서 있게 자리바꿈을 하는 것을 보면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을 금할 길 없습니다. 산수유꽃이 다 떨어지고 복사꽃이 시들해져서 서운했는데, 새로운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나고 있습니다. 새 소리도 제법 활기찹니다. 농가월령가는 이 꽃 저 꽃 기웃거리며 분분히 나는 범나비의 자유로움을 바라보면서 “미물微物도 득시得時하여 자락自樂함이 사랑홉다”고 노래합니다. 생명은 크거나 작거나 무엇이든 아름답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볼 눈이 열린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을 뿐입니다. 분주한 사람의 눈에는 띄지도 않을 작은 생명들도 각자의 본분을 다하며 우주의 장엄한 춤을 추고 있습니다. 토마스 베리 신부는 지구라는 행성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서로 기대고 있다고 말합니다.

“각 존재는 지구 공동체의 모든 다른 존재들에 의해 지지된다. 역으로 각 존재는 공동체 내의 모든 다른 존재들의 복리에 기여한다. 이와 같은 창조적 관계로 이루어진 복합체를 형성하는 데에 바로 정의正義가 있다.”(토마스 베리, <위대한 과업>, 이영숙 옮김, 대화문화아카데미, p.91)

지지받는 동시에 기여하는 것, 그 창조적 공생 관계야말로 생명의 신비입니다. 그 신비를 눈으로, 마음으로 확인해야 하는 이 아름다운 계절에 마치 고치 속을 파고들 듯 칩거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쓸쓸합니다. 이제는 가정을 제외한 어떤 공간에서도 마스크를 써야 한다지요? 그만큼 지금 상황이 엄중하다는 이야기일 겁니다. 봄은 우리를 밖으로 자꾸 불러내려 하지만, 가급적 다중이 모인 장소에 가지 않는 것이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선제적으로 비대면 예배로 전환한 뜻을 잘 헤아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사진/김승범


세상이 참 소란스럽습니다. 도처에서 성난 음성이 들려옵니다. 칼과 창날이 부딪는 소리 못지않게 우리 심정을 날카롭게 만드는 것은 사람들이 주고받는 거친 언사들입니다. 서 있는 자리가 다르면 세상 풍경도 사뭇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리에서 보는 풍경만이 진실이라고 믿는 순간 그는 어리석음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저는 지나치게 선명한 입장을 크게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흑과 백으로 가르기에는 세상일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참과 거짓, 선과 악, 빛과 어둠은 칼로 두부모 가르듯 산뜻하게 가를 수 없습니다. 참, 선, 빛을 지향하지만 내 속에 있는 거짓, 악, 어둠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르다 보면 유머가 사라집니다.
삼척의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선생님 한 분이 학생들과 함께 쓴 책과 더불어, 올해 맡은 6학년 학생들이 쓴 문집을 한 권 보내주셨습니다. 늘 심각한 책을 보다가 아이들의 글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낄낄거리게 되었습니다. 그 순진하고 거침없는 아이들의 표현이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전혜원 어린이의 동시 한편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제목은 ‘동생 놈’입니다. 제목을 잡는 솜씨부터 남다르지요? 1연입니다.

동생이 갑자기 와서 날 때린다.
같이 게임하다가 지면
지 잘못도 내 잘못이라고 한다.
그냥 갑자기 화를 낸다.
“이게 다 누나 때문이야!”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게임은 승패가 있게 마련이고 서로 규칙을 어기지 않았다면 승복하면 좋으련만 동생은 패배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습니다. 물론 동생의 입장에서는 화가 날만도 합니다. 누나가 굳이 자기를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동생에게 좀 져주면 어때.’ 동생의 마음속 생각일 겁니다. 그러나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습니다. 분하고 서운한 마음을 풀 길이 없으니 누나 탓이라며 누나를 때리는 겁니다. 그 귀여운 구타는 누나가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였을 겁니다. 어이없는 상황입니다. 누나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시의 2연입니다.

동생이란 존재는 참 수학책 같다.
문제는 많은데 답이 없다.
자주 봐도 정말 이해할 수 없다.
난 수학 따윈 포기했으니
동생도 포기해야겠다.

이 어린 시인이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동생’과 ‘수학책’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시적 언어가 우리를 잡아당기는 까닭은 무관해 보이는 것들을 연결시킴으로 우리 정서에 틈을 만들기 때문일 겁니다. 누나가 동생을 보고 ‘수학책’ 같다고 말한 것은 문제는 많은데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답이야 왜 없겠습니까? 다만 수학에 취미가 없다 보니 수학은 그야말로 해답 없는 영역이 된 것이지요. 이 어린 시인은 자기가 수학을 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습니다. ‘그게 난데, 뭘 어쩌겠느냐’는 듯 천연덕스럽습니다. “난 수학 따윈 포기했으니/동생도 포기해야겠다.”라는 구절에서 저는 큰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시를 읽는 이들은 ‘동생도 포기해야겠다’는 말이 심각한 관계단절의 선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압니다. 가끔은 귀찮기도 하지만 어떡하겠습니까? 동생인 걸요.

우리 어른들의 어법 속에도 이런 여유와 여백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영화 ‘미나리’로 영국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배우 윤여정 씨의 수상소감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는 “고상한 체하는 영국인들이 나를 알아봐줬기에 매우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고상한 체 하는 사람들snobbish people’이라는 말은 자칫하면 큰 오해를 살 수도 있는 말입니다. 거만하다, 속물적이라는 뜻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단어 선택을 유쾌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이게 영국적 고상함인가요? 사람들이 그 말에 박수를 보낸 것은 그 속에 비난하거나 조롱하는 태도가 담겨 있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똑같은 언어도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달리 받아들여지는 법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정말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어를 가려 쓰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속에는 각자의 세계관과 태도가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언어가 달라져야 세상이 달라집니다. 언어는 상대가 있는 법입니다. 상대의 언어가 거칠어지면 나의 언어도 따라 거칠어집니다.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거친 언어를 주고받다보면 마음 또한 멀어집니다. 교만과 자애심에서 나온 말은 다른 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깁니다. 단정적인 언사는 대화의 의지를 차단합니다.

피루스의 승리(pyrrhic victory)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피루스는 기원전 3세기 아드리아 해 건너편에 있던 에피루스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의 영웅인 아킬레우스와 알렉산더의 후예라고 생각했습니다. 대제국을 건설할 욕망을 품고 있던 그는 로마와의 전투에 코끼리 부대를 끌고 나가 승리를 거두었다 합니다. 그러나 그 전투에서 가까운 친구와 용맹스러운 장군들 그리고 엘리트 병사들을 많이 잃었습니다. 피루스의 승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얻은 승리를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 사는 게 꼭 이 모양이 아닌가 싶습니다. 상대를 존중하지 않고 멸시하고 조롱하면서 거두는 승리는 사실은 이중의 패배입니다. 우리가 함께 서 있는 신뢰의 토대를 허무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성령 안에서 구속의 날을 위하여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은 모든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친절히 대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엡 4:29-32)

지금이야말로 이 말씀을 꼭 붙들어야 할 때입니다. ‘덕을 세우는 데 필요한 말’이라 해도 적절한 때를 분간하며 해야 합니다. 듣는 사람의 입장을 늘 살펴야 합니다. 악의를 버리고 서로 친절히 대할 때,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벌써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7년이 되었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부터 바꾸겠습니다”라고 다짐했던 우리 마음도 어지간히 무뎌졌습니다. 하지만 그 날의 아픔을 여전히 생생하게 경험하며 사는 분들도 계십니다. 세월호 이야기만 나오면 질색을 하는 분들도 있는 줄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상처 입은 어린양이 우주의 중심에 계시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지극한 아픔을 외면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그 아픔에 동참하지는 못한다 해도, 여전히 신원되지 않은 한을 품고 살고 있는 이들을 조롱하거나 외면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아름답고 찬란한 봄날, 우리 마음 깊은 곳에도 그리스도의 꽃이 피어나기를 빕니다. 주님의 변함없으신 사랑이 모든 이들을 감싸주시기를, 그리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는 이들을 위로해 주시기를 빕니다.

2021년 4월 15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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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려드는 어두운 예감



작실 병직이 네가 이사를 갔다. 지난 여름 성경학교 연극 발표 시간엔 아합 왕 역을 맡아 참 멋있고도 씩씩하게 연극을 잘 했던 병직이, 병직이 네가 문막으로 떠났다.


설정순 집사님 내외가 떠난 것은 의외였다. 곧 환갑의 나이. 아무래도 떠나기엔 늦은 나이 아닌가. 그냥 내 논 부쳐도 남는 게 없는 판에 남의 땅 빌려 붙이려니 그 사정 오죽했으랴만, 두 사람이 이제 나가 무슨 일을 어찌 할까 짐작이 잘 안 된다. 빨갛게 잘 익은 산수유나무를 사이에 둔 아랫작실 양담말 앞뒷집이 모두 텅 비어 버렸다. 


며칠 있으면 종하 네가 이사를 간다. 팔십이 넘은 할머니 밑에서 살던 종하 종일이 종석이가 결국은 떠나게 됐다. 다 모여야 열 명뿐인 학생부에 종하, 종일이가 빠지면 그 구멍은 휑하니 클 것이다. 재워 주는 건 걱정 없으니 이사 가서라도 버스 타고 오라고, 보내기 아쉬운 교회 식구들은 거듭거듭 같은 얘길 하지만 그것 또한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사진/김승범


교회 옆집인 승학이 네도 망설이고 있다. 지난번 종설이 종숙이가 그런 것처럼 승학이 승혜 승호를 원주 시내로 내보내려는 것이다. 시내에 집을 마련해서 보내려 하는데 아이들만 보낼 수는 없고 할머니 할아버지께 부탁을 드리자니 노인네들 내쫓는 것 같아 쉽지 않아 망설이고 있다.


끝정자 연미 네도 떠난다는 얘기가 있다. 수원 인근에서 일을 하는 연미 아버지, 방이 마련 되는대로 떠날 모양이다. 그러면 연희 연미 연경이 경호 경민이도 떠나게 된다. 학교도 마을도 교회로 그만큼 비게 된다. 


밀려드는 어두운 예감.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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