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모습



그 분은 늘 그곳에 있었습니다. 원주 A도로와 B도로 사이 중앙시장 골목, 해가 한 중간에 떠올라야 잠시 햇빛이 건물사이로 비집듯 비취는 곳입니다. 몇 가지 과일을 상자에 담아 펼쳐 놓고 장사를 하는, 주름이 많은 아주머니입니다.


가끔 나는 그곳을 지나게 되는데 골목을 지날 때마다 멈칫 발걸음을 멈추곤 합니다. 아주머니는 과일을 팔고 있을 때도 있지만 대개는 다른 모습입니다. 조그만 좌판 위 그분은 정갈한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책을 읽곤 했습니다.


낡은 성경책입니다. 표면의 붉은색이 허옇게 변해버린, 아주 낡은 성경책이었습니다. 읽던 곳 바람이 덮지 못하도록 성경 귀퉁이엔 빨래집개를 꽂아 두었습니다. 허름한 옷차림에 오가는 사람들 마다하지 않고 틈틈이 성경을 읽는 그분의 모습은 내겐 성스러움입니다.


제단 위 제복 입고 성경 든 사제보다도 내겐 더 거룩한 모습입니다. 골목을 지날 때마다 나는 잠시 멈춰 서선 저만치 그분을 봅니다. 생의 거룩한 자리에 무릎 꿇은, 한 거룩한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얘기마을> 1989년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얘기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앞으로 걷는 게  (0) 2021.07.13
새총까무리  (0) 2021.07.12
거룩한 모습  (0) 2021.07.11
버스 개통  (0) 2021.07.09
죽은 제비  (0) 2021.07.08
어린왕자의 의자  (0) 2021.07.07
posted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