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지만


작실속 속회, 유치화 청년 집에서 모이는 날이다.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캄캄해져야 일손을 놓고 집에 돌아오는 사람들, 그제야 씻고 저녁 먹고 하면 어느덧 시간은 저만큼이다. 일찍 모이자고 약속했으면서도 밤 10시가 넘어서야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치화 씨가 주변에 모임을 알리러 나간 사이 치화 씨 어머니가 툇마루에 촛불 하나 밝히고 사람들을 기다렸다.


아직 유치화 청년 집에는 전기가 없다. 오랫동안 비어 있어 전기가 끊긴 집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둘이서 살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나 사는 내력은 길고도 슬프다. 삶이란 저리도 기구하고 질긴 거구나 싶다.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을 기다리며 흔들리는 촛불 앞에 둘러 앉아 나누는 이야기는 불에 관한 이야기였다.

 

“옛날엔 등잔불 아래서도 명주 올이 잘 보였는데.”

“기름 있기 전엔 산에 가 산초라는 열매를 땄지요. 그 열매를 짜 그 기름으로 불을 켰어요.”

“그러고 보니 동네에 전기 들어 온지 이제 막 10여년이 됐네요.”

 

흐린 불을 핑계 삼아 공과 책을 덮고 그날 예배는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나눴다. 잘 아는 찬송을 두 곡 부르고 ‘가난하지만’이라는 말씀을 나눴다. 웬일인지 예배를 드리는 동안 마음은 어느 때보다 넉넉했다. 가난하더라도 넉넉하고 떳떳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위엔 온통 개구리 울음소리, 푸른빛의 군무, 반딧불이 나는 밤이었다.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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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감지기가 울렸다

 



열 감지기가 울렸다
가게 문 입구에서 37.4도

순간 나는 발열자가 된다
"입장하실 수 없습니다."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에어컨을 틀지 않았던 것이 원인임을 스스로 감지한다

나는 혼자 있을 때
에어컨을 틀지 않는다

집 안에서는 선풍기를 돌리고
창문을 조금 열어둔다

차 안에서는 뒤에 창문 두 개를 다 열고
보조석 창문을 반쯤 열고
운전석 창문은 이마까지만 내린다

비록 이마와 등줄기에 땀이 맺히더래도
여름인데 몸에서 땀이 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이런 나는 가족들 사이에선 꼰대가 되기도 하고
밖에선 발열자가 되어서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한다

인도 델리의 재래 시장인 빠하르간즈
5월로 접어들던 무렵의 무더위를 몸이 기억한다

에어컨을 틀지 않고선 
숨조차 쉴 수 없었던 무더움

그곳의 초여름 더위는 무더움을 넘어선 무서움이었다
무더위로 인해 길바닥에 쓰러져 죽어가던 생명들

나 한 사람이 에어컨을 틀 때마다
지구의 체온이 티끌 만큼 올라간다는 생각을 거둘 수가 없다

입구에서 잠시 땀을 식히신 후 들어오시라는 
사람의 말소리가 한 줄기 바람처럼 들려온다

혼자 가게 입구에 서 있으면 민망하기도 하고
미안하지만 속마음은 이렇게 반응을 한다

여름에 땀이 나고 체온이 오르는 건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왜들 호들갑인지

내 몸도 자연의 일부분이라며
여름엔 풀잎들도 땀이 맺혀 꽃망울을 틔우는데

땀이 맺힌 이마를 스치며 지나는 한 줄기 바람의 손길을
하늘을 울리며 곧 쏟아질 것 같은 비의 속 깊은 울음을

이렇게 살아 있는 지구를 온몸으로 느끼며
비와 함께 울다가 해와 함께 맑게 갠 하늘의 둥근 무지개를 바라보며 감사와 기도의 두 손을 모으리라

마당에 토마토가 빨갛게 익어가듯
한낮에 내 얼굴도 빨갛게 익었다가

저녁이면 돌담 위에 박꽃처럼 하얗게 피어
밤하늘에서 달과 별을 찾다 보면 

무더위도 함께 지낼만 하다며
이마를 스치는 바람의 손길이 가슴속까지 슬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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