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씨



‘목회수첩’을 쓰기가 점점 어렵다.
실은 쓸 만한 얘기 거리들도 별로 없다.


뭔 좋은 소식이라고 어둡고 눅눅한 얘기들을 굳이 계속 쓰는가.
아프고 설운 얘기들, 결국은 나와 함께 사는 이들의 이야기인데.
그걸 나는 무슨 기자나 된 듯 끼적이고 있으니. 

그러나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남아있는 한 멈추지 않기로 한다.
고발이니, 의미 부여니, 변명처럼 이유를 댈 건 없다.


그냥 하자.
화로에 불씨 담듯 아픔을 담자.
꺼져가는 불씨 꺼뜨리지 말자.

-<얘기마을> 19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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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속의 빛이 어둡지 않은가?



“가장 절실한 인간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위대한 장군이나 성직자가 아닙니다. 지금 배고픈 사람, 지금 추위에 얼어 죽어가는 사람, 지금 병으로 괴로워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 온갖 괴로움 속에 허덕이는 사람만이 진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이오덕과 권정생이 주고받은 아름다운 편지,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 한길사, p.233에 나오는 권정생의 말)

주님의 은혜와 평화를 빕니다.
벌써 9월에 접어들었습니다. 별고 없이 잘들 계신지요? 격절의 세월이 한없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앞에 당도한 시간은 하나님의 선물임이 분명합니다.

 

“좋은 때에는 기뻐하고, 어려운 때에는 생각하여라.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 그러기에 사람은 제 앞일을 알지 못한다”(전 7:14).

 

‘알지 못함’, 어쩌면 이게 유한한 우리 인생의 비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뜻한 바가 이루어졌다고 너무 으스댈 것도 없고,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낙심할 것도 없습니다. 인생의 지혜는 우리에게 당도한 삶의 현실을 잘 갈무리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디딤돌로 삼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요? 흐리고 힘든 날도 있지만, 맑고 상쾌한 날도 있는 법입니다. 어떤 날이 다가오든 우리 내면의 빛이 어둡지 않다면 꽤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지난 주 금요일 저녁에는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우리 교우의 첼로 독주회에 다녀왔습니다. 서정적인 첼로의 선율 속에서 모처럼 마음의 안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피아노와 첼로가 소리를 주고받기도 하고, 다른 소리 위에 또 다른 소리가 유연하게 포개지며 만들어내는 화음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나찌가 만든 절멸수용소에서도 수감자들이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지요? 음악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저는 한 장면을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는 파리에서 베를린으로 날아가 그 유명한 관문인 ‘체크포인트 찰리’ 앞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2번인 ‘사라방드’를 연주했습니다. 그것은 억압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면서 자유를 갈망했던 사람들에게 바치는 일종의 애가였을 겁니다. 저는 신문에서 그 연주 장면을 스크랩 해두고 가끔 꺼내 보곤 했습니다. 음악의 위대함을 전율하며 느꼈던 순간이었습니다.

토요일에는 국립극장에서 오페라 ‘박하사탕’을 보았습니다. 영화 ‘박하사탕’을 원작으로 하여 세심하게 인물들을 재배치하여 만든 작품이었고,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작곡가 이건용 선생님이 여러 해에 걸쳐 대작을 작곡했습니다. 이틀 연속으로 이런 모임에 가는 게 쉽지 않았지만 우리 교우 가족이 오페라 제작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관람했습니다. 광주민주화항쟁을 배경으로 한 그 오페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한 개인의 삶이 어떻게 으깨지고 망가지는 지를 처연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속에서 빚어지는 사람들의 연대와 사랑의 아름다움 또한 가슴 시리게 드러냈습니다. 인간의 숭고함은 극한의 상황 속에서 드러나는 것임을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국립극장 앞에서 택시를 잡아탔습니다. 등을 뒤로 기대고 편히 쉴 생각이었는데 연세가 지긋하신 기사님이 말을 걸었습니다.

“공연을 보고 오시나봐요.”
“예.”
“무슨 공연이었나요?”
“‘박하사탕’이라는 오페라였어요.“
“요즘 공연자들의 형편이 말이 아니라는데 그래도 공연을 할 수 있었군요.“
“네.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공연자들의 형편을 그렇게 잘 아세요?”
“예, 사실 우리 집 아이들 셋이 다 국악을 했어요.”
“그렇군요. 지난 2년 동안 많이 힘들었겠어요.”
“큰 아이는 경기 민요를 하고, 작은 아이는 판소리를 하고, 막내는 한국 무용을 하는데요. 공연이 끊겨서 어려움이 많았지요.”
“아유, 자제분들이 재능이 많으시군요. 혹시 선생님도 국악을 하시나요?
“나야 뭐, 하하, 우리 나이 또래 사람들이 하는 정도지요 뭐. 내 아내는 프로는 아니지만 한국 무용을 꽤 잘해요.”

기사님은 기분이 좋아 보였습니다. 큰길가에 내려달라고 하는 데도 굳이 아파트 앞까지 차를 몰면서 “차가 올라가는 거니까 내가 힘들 건 없어요”라고 말하며 껄껄 웃었습니다. 유쾌한 저녁이었습니다. 그 기사님은 지금 형편이 어렵기는 하지만 아들과 딸이 자랑스러운 것 같았습니다.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밖으로 내놓게 마련입니다. 내 속에 기쁨이 있으면 다른 이들에게 친절해지고 너그러워집니다. 그러나 근심과 걱정이 우리를 뒤흔들고 있을 때는 사소한 일로도 화를 내고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세상이 온통 나에게 적대적인 것처럼 느껴져 우울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감정이 흔들릴 때마다 자기 마음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치유자이신 하나님께 가져가야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빵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는 것을 보고 정결법 위반이라며 나무랐습니다. 그 때 주님은 전통을 지킨다 하면서도 율법의 본 정신을 저버린 그들을 꾸짖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 15:11).

 

지금 하는 말과 행동은 우리 내면의 풍경을 고스란히 반영합니다. 성급함, 난폭함, 비방, 무절제, 불평, 불경, 교만함 등은 우리 속에 자리잡고 있는 혼돈과 어둠을 드러냅니다. 주님의 권고를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은지 살펴보아라”(눅 11:35).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는 말이 조금도 과장이 아닙니다. 본本과 말末은 각각 나무 목木 자를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자의 자형을 보면 ‘본’은 뿌리를 가리키고 ‘말’은 열매를 가리킴을 알 수 있습니다. ‘본’이 중요하고 ‘말’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본립도생本立道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본이 바로 서면 나아갈 길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뿌리가 튼튼해야 열매도 좋은 법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고전 13:13)라고 말했습니다. ‘항상 있는 것’ 바로 그것이 기본입니다. 그것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우리는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눠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편의상의 구분일 뿐입니다. 대체 시간이란 무엇일까요? 어거스틴도 동일한 고민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도대체 시간이 무엇입니까? 아무도 묻는 이가 없으면 아는 듯하다가도 막상 묻는 이에게 설명을 하려 들면 말문이 막히고 맙니다.”(성아구스띤, <고백록> 제11권 14장, 최민순 역, 성바오로출판사, p.324)


시간에 대한 탐색을 거듭하던 어거스틴은 결국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 이렇게 세 가지 때가 있다 하는 것이 그럴 듯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후에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구절이 나옵니다. “과거의 현재는 기억이요, 현재의 현재는 목격함이요, 미래의 현재는 기다림입니다”(앞의 책, 제11권 20장, p.330). 인간은 시간을 기억, 목격함(직관), 기다림의 형태로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을 정화하는 것이 거룩함에 이르는 길이겠지요. 과거는 믿음으로, 현재는 사랑으로, 미래는 소망으로 정화해야 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이렇게 시간과 연결됩니다. 이 세 가지가 우리 삶의 토대가 될 때 흔들리지 않고 걸어갈 수 있습니다.

세상 도처에서 위험에 직면한 이들이 참 많습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고통에 반응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이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은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거룩한 소명입니다. 마르티니 추기경이 움베르토 에코와의 대화에서 들려준 말이 귀에 생생합니다.

“인간의 생명을 존중한다는 것은 살아 있는 구체적인 한 사람을 책임지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 존재의 존엄성은 단지 내 쪽에서 내린 호의적인 평가나 인도주의적인 충동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름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 존재는 단지 ‘나’라든가 ‘나의 것’, 또는 ‘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앞에 있는 어떤 것입니다.”(움베르토 에코·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무엇을 믿을 것인가>, 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p.56)


지금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에게 충실한 것이 생명 존중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삶을 부단히 연습해야겠습니다. 우리 삶의 현장은 바로 우리가 의젓한 사람으로 지어져가는 일종의 도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보화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시기를 빕니다.

2021년 9월 2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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