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한 비는 그칠 줄 모릅니다



찬비가 종일 내리던 지난 주일은 윗작실 이한주 씨 생일이었습니다. 이하근 집사의 아버님이신 이한주 씨가 73세 생일을 맞았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양말을 포장하여 작실로 올라갔습니다. 집 뒤론 산이 있는, 윗작실 맨 끝집입니다.


방안에 들어섰을 때 마을 아주머니들이 둘러앉아 음식을 들고 있었습니다. 상을 따로 차리신다는 걸 애써 말려 같이 앉았습니다. 비만 아니었다면 모두 들에 나갔을 텐데 내리는 비로 일을 쉬고 모처럼 한데 모인 것입니다.


비꽃이 피듯 이야기꽃이 피어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갑니다. 장에 다녀온 얘기하며 비 맞아 썩고 싹이 나고 하는 곡식 얘기하며, 몸 아픈 얘기하며. 


그중 치경 씨 얘기엔 모두들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바로 그날, 어릴 적 식구들과 흩어져 소식이 10년 넘게 끊겼던 치경 씨가 물어물어 어머니를 찾아온 것입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이유로 모든 가족들이 흩어졌던 것인데, 지난번에 치화 씨가 10년 만에 돌아와 엄마랑 살고, 이번엔 치화 씨 동생 치경 씨가 찾아온 것입니다. 


생사나 알았으면 좋겠다고 그동안 남모르는 눈물 많이 흘렸던 치화 씨 어머니는, 찾아온 아들을 보며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 어쩔 줄을 몰랐다고 합니다. 내린 비로 물길 찾은 앞 시내처럼 돌아온 아들 붙잡고 울기도 많이 울었답니다.


스물세 살의 건장한 청년이 된 치경 씨, 10년 넘게 헤어져 살았지만 그래도 그 얼굴엔 아버지 모습 선하게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고, 피붙이란 그런 거라고들 했습니다.


다니는 공장에 출근하기 위해 가야 한다며 치경 씨가 차 타러 나가자 하루만 자자고, 모처럼 왔는데 하룻밤만이라도 자고 가면 안 되냐고, 빗길 비 맞으며 눈물로 따라가는 노모의 안쓰러운 모습을 모두가 보았던 것입니다.


수원에 나가 있는 이하근 집사 얘기를 하면서도 아주머니들은 또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이하근 집사의 부인 박영순 씨도 일하러 같이 다니게 되어, 야근을 할 때면 집에 우상이와 병부, 어린 자식 두 명만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혹 어떨까 싶어 밖으로 문을 잠그고 일하러 가는데, 날 밝아 돌아와 보면 우상이와 병부는 제각기 쓰러져 잠을 자고 있다는 것입니다. 7살인 우상이는 그래도 괜찮다고, 엄마 아빠 고생하더라도 빨리 돈벌어 좋은 집 마련하자고 그랬답니다.


모든 게 어디 남의 일이겠습니까. 아픈 얘기 나누며 모두가 함께 눈물에 젖는 건 주변의 일들이 모두 내 일 같기 때문입니다.


타작도 못한 채 들에서 비 맞으며 썩고 있는 곡식들을 두고도 눈물어린 마음은 이웃을 향합니다. 그런 마음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비는 그칠 줄 몰랐습니다.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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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향(聞香)

 



하얀 박꽃이 더디 피고
하얀 차꽃이 피는 시월을 맞이하며

하얀 구름은 더 희게
푸른 하늘은 더 푸르게

무르익어가는 이 가을 하늘이
먼 듯 가까운 얼굴빛으로 다가오는 날

들음으로써 비로소 열리는 
하늘문을 그리며

문향(聞香)
차꽃의 향기를 들으며 생각합니다

올해도 감사히
모든 꽃들이 제 향기를 내뿜을 수 있음은

꽃들을 둘러싼 
없는 듯 있는 하늘이 

늘 쉼없는 푸른 숨으로
자신의 향기를 지움으로 가능한 일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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