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치다



쌀이며 담배며 콩이며, 그동안 지은 농작물에 대한 수매가 있었다. 늘 그래왔던 대로 원하던 양도 아니었고 기대했던 가격에도 미치지 못했다. 


잠깐뿐이긴 하지만 그래도 농촌에선 유일하게 만져볼 수 있는 목돈의 기회이기도 하다.
쌀 미(米)자는 원래 八과 八을 합쳐 놓은 글자, 88세를 米壽라 한다. 쌀 한 톨 먹으려면 농부의 손 여든여덟 번이 가야 한다. 


농사 중 가장 많이 손 가는 게 잎담배농사라 하니, 담배는 여든여덟 번 손 가는 쌀보다도 더 손이 가는 셈이다. 재처럼 작은 씨를 모판에 심을 때부터, 몇 번이고 같은 빛깔, 같은 상태의 잎을 추리는 조리에 이르기까지 여간한 많은 품이 드는 게 아니다.

이곳에선 수매하는 일을 ‘바친다’고 한다. 잎담배 수매에 응하는 걸 ‘담배 바친다’고 한다.
‘바친다’라는 말이 아프다. 값을 매기는 쪽이 받는 쪽이니 아무래도 듣기 좋은 말로 얘기하는 것이 값 받는데 유리할 거라는 기대심리였을까, 관(官)을 어렵게만 생각해온 오래된 시간 탓일까. 그저 몇몇이 모여 의견을 모으면 그대로 값이 정해지는 숱한 공산품들을 두고, 필요 없는 걸 불쌍해서 사주는 듯, 선심 쓰듯 정해준 가격 앞에 땀 흘려 지은 농작물을 바쳤다. 

애써 거둔 먹거리를 두고 팔았다 않고 바친다 하는 농민의 뜻을 언제나 올바로 헤아려 바치는 곡물을 소중하게 받을지.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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