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과 소멸이 한 자리에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9)

생성과 소멸이 한 자리에

 

설 명절을 즐겁게 보내셨는지요? 고향에라도 다녀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역귀성이니 해외여행이니 설날 풍경이 좀 달라졌다 하지만 고향을 찾아가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습니다. 귀성행렬을 볼 때마다 돌아가 안길 품이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적막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설이 되면 늘 찾아뵙던 어르신들이 한 분 두 분 세상을 떠나신 후 이제는 찾아갈 곳이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부모님이든 스승이든 찾아뵐 어른이 없다는 것처럼 쓸쓸한 일이 또 있을까요? 나이 든다는 것이 쓸쓸한 이유 중의 하나는 꾸짖어줄 사람이 점점 사라진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저야 그래도 가족이 있으니 그 쓸쓸함을 쉽게 해소할 수 있었지만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 이주 노동자들, 격절된 곳에서 지내야 하는 사람들의 쓸쓸함과 비애는 해소되기 어려울 겁니다.

설 전날 아내와 만두를 빚으면서 참 고요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밀대로 밀가룩 반죽을 밀고 있자니 인생길에서 제법 먼 곳까지 흘러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후회도 아쉬움도 아닌 묘한 안도감이 밀려왔습니다. ‘이 험악한 시대에 안온한 행복감이라니!’ 하는 자책감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시간이 즐거웠습니다. 전축에서 울려나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참 어울리지 않는 세팅이었지만 글렌 굴드의 연주를 집중해서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이번 설은 처음으로 형님 댁에 가지 않고 집에서 지냈습니다. 출가한 아들·딸 내외와 손자 손녀들을 맞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한 세대가 가고 또 다른 세대가 오면서 역사는 이어지는 것이겠지요. 모음이 많은 말랑말랑한 언어로 아이들을 어르고 보듬어 안으면서 그 아이들이 살아갈 시간을 축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들·딸 내외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고 나자, 소음에 자리를 내주었던 고요함이 집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고요함은 우리를 성찰의 자리로 이끌어갑니다. 일상의 분잡과 소음 속에서 저만치 물러서 있던 심원한 삶의 실상이 슬며시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그 시간 속에 머무는 것이 진정한 쉼이요 치유임을 알겠습니다.

그 덕분일까요? 모처럼 아침에 가든하게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즐겁게 글 한편을 쓰고 난 후, 그 여흥을 몰아 청소 삼매경에 빠졌습니다. 집안 구석구석을 쓸고 닦고, 베란다에 있는 화분들까지도 정리했습니다. 겨우내 위태롭게 목숨을 이어오던 화초들이 이제는 한숨 돌리게 됐다는 듯이 생기 있어 보였습니다. 형태를 잡아줄 것은 잡아주고, 정리해 줄 것은 정리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무심한 주인의 돌봄을 받지 못해 말라비틀어진 것들도 있었습니다. 미안한 마음으로 그것들을 뽑아내는 데 문득 코 끝 가득 향긋한 냄새가 배어들었습니다. 로즈마리였습니다. 로즈마리는 죽어서도 향기를 머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향기는 저를 몇 년 전에 방문한 적이 있던 밀라노의 암브로시오나 미술관으로 데려갔습니다. 사실 그때까지 그 미술관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았습니다. 스포르체스코 성 박물관에서 미켈란젤로 만년의 걸작인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보고 난 후였기에 그곳은 가지 않아도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래도 다양한 회화작품을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내리는 비를 무릅쓰고 그 미술관에 찾아간 것입니다. 사람들이 많지 않았기에 미술관 입구에 앉아 다리쉼부터 한 후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것이 바로 카라바조(Caravassio, 1571-1610)의 <과일 바구니(Basket of Fruits)>라는 작품이었습니다. 제가 굳이 ‘만났다’는 표현을 쓴 까닭은 그 만남이 카라바조라는 사람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저를 이끌어 갔기 때문입니다. 카라바조가 그 작품을 그린 것이 1596년이라고 하니까 그의 나이 25세 때입니다. 한창 혈기방장한 때입니다.

 

 

바구니 속에는 사과, 배, 포도 등의 과일과 나뭇잎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도판이 아닌 원본 앞에 설 때마다 색채가 주는 감동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을 미술관에서 처음 보았을 때가 떠오르네요. 저는 한동안 그 앞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변화산 산정에서 초막 셋을 짓고 거기서 살고 싶다고 말했던 베드로의 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카라바조의 정물 역시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작품 속에 등장하는 과일은 싱싱하지 않습니다. 나뭇잎은 이미 오가리들어 있고, 과일들도 시들어 있습니다. 언뜻언뜻 썩은 부분조차 보입니다. 시간에 빗대 말하자면 정오가 아닌 오후 4시 무렵이 화폭에 담겨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찌하여 카라바조는 그런 순간을 그렸던 것일까요?

그림은 대상에 대한 모사가 아니라 자기 마음을 그리는 것이라는 말이 빈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 과일 바구니에 담긴 것은 카라바조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빛과 그늘, 영원과 시간, 생성과 소멸이 한 자리에 있었습니다. 빛이 만들어내는 생기가 영원을 떠올리게 해준다면, 빛이 통과하여 빚어낸 시듦은 소멸을 떠올리게 해줍니다. <과일 바구니>는 이탈리아에서 그려진 최초의 정물화라고 합니다. 르네상스 이전의 회화 작품들은 주로 신화 혹은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카라바조는 그 관습적인 틀을 깨뜨렸고, 이전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영원과 시간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제가 그 그림 앞을 쉽게 떠날 수 없었던 것은 어렴풋하나마 카라바조라는 인물이 구현하고 있는 시대와의 불화와 그로 인해 그가 겪어야 했을 외로움이 절절하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카라바조는 당시 화단의 관습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한 반항아였다고 합니다. 그의 삶을 특징짓는 단어는 ‘싸움’과 ‘도주’입니다. 그는 불꽃같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폭력 사건에 휘말려 들 때가 많았고, 싸움 끝에 사람을 죽인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그는 이탈리아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그림 가운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이 있습니다. 생의 말년에 그린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림 속에서 소년 다윗은 오른손으로는 칼을 들고 왼손으로는 골리앗의 잘린 머리를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카라바조가 그린 다윗의 얼굴은 우리가 통념상 생각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자신의 전리품을 바라보고 있는 다윗의 얼굴에는 승자의 의기양양함이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수심에 차 있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죽은 자에 대한 깊은 연민에 사로잡힌 것일까요? 골리앗의 얼굴 역시 바라보는 이들에게 연민을 자아냅니다. 크게 벌어진 입, 뜨고 있지만 이미 눈빛이 흐려지고 있는 두 눈, 그리고 고뇌에 찬 듯 보이는 미간의 주름…. 놀라운 것은 카라바조가 골리앗의 모습을 자기 얼굴로 형상화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이 인생의 패배자라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저물녘의 쓸쓸함이 그의 시선을 규정짓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죽어서도 향기를 남기는 로즈마리로부터 카라바조의 <과일 바구니>를 거쳐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에 이르기까지 두서없는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수 절기와 더불어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은 삶과 죽음, 시간과 영원, 빛과 어둠이 날카롭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등을 맞대고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어둠을 내포하지 않은 빛은 찬란하긴 하지만 깊이감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소멸의 계기를 내포하지 않은 생성은 활기차긴 하지만 불안정합니다. 승자들의 의기양양한 노랫소리가 패자들의 아픔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드는 무정한 세월입니다. 약자들과 패자들에 대한 연민조차 스러진다면 우리 사회는 정말 욕망의 전장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제 봄기운이 완연합니다. 선드러진 발걸음으로 걷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참 좋아 보입니다. 분주하더라도 가끔 시간을 내 공원 산책이라도 하시면 좋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김기석/청파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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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인간이고자

김기석의 톺아보기(1)

참으로 인간이고자

- 지금 여기 정의로운 생명 평화 -

 

오늘의 세상

 참 고운 얼굴이 없어?/하나도 없단 말이냐?/그 얼굴만 보면 세상을 잊고,/그 얼굴만 보면 나를 잊고,/시간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고,/밥을 먹었는지 아니 먹었는지 모르는 얼굴,/그 얼굴만 대하면 키가 하늘에 닿는 듯하고,/그 얼굴만 대하면 가슴이 큰 바다 같애,/남을 위해 주고 싶은 맘 파도처럼 일어나고,/가슴이 그저 시원한,/그저 마주앉아 바라만 보고 싶은,/참 아름다운 얼굴은 없단 말이냐?/저 많은 얼굴들 저리 많은데,/왜 그리 다 미울까, 다 더럽기만 할까!”(함석헌, <얼굴> )

무정한 세월은 변함없건만 인간사는 어지럽기 이를 데 없다. 인간뿐인가. 인간이 지구별의 최상위 포식자가 된 후 만물이 다 신음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인간이 초래할 다섯 번째 멸절을 내다보고 있다. 사람들은 조금씩 기후 변화의 심각성을 자각하는 듯하다. 지구촌의 한쪽에서는 폭우에 시달리는데, 다른 쪽에서는 극심한 가뭄에 타들어간다. 사막은 점점 확장되어가고 있고, 바다 생태계도 황폐해지고 있다. 식물의 개화 시기가 앞당겨지고, 꿀벌들은 집단 폐사되고 있다. 빙하가 녹아내리면서 빙하 속에 갇혀 있던 이산화탄소가 대기 중에 방출된다. 원시림은 속절없이 훼손되고, 지표수나 지하수가 고갈된다. 하지만 그런 '불편한 진실'은 개발론자들이 연주하는 모든 게 잘 될 것’(everythings be all right)이라는 노래 속에 파묻혀 경청되지 않는다.

발전 강박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저마다 행복의 신기루를 좇아 분주하다. 분주함이 신분을 나타내는 징표가 된 이후 우리는 느림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라르고아다지오는 외면당하고 빠른 비트의 음악이 선호된다. 한때 느리게 살기담론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재빨리 소비되고는 스러졌다. 공원에서도 사람들은 느릿느릿 걷기보다는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빠른 속도로 걷는다. 뭔가에 쫓기며 살고 있는 이들에게 걷기는 사유를 위한 시간이 아니라 운동을 위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성공의 사다리 윗 단을 차지하기 위해서도 체력은 필수다. 피트니스 센터와 성형외과는 쇼핑센터와 더불어 현대인들의 새로운 신전이다. 자기를 끊임없이 노출해야 하는 전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기꺼이 그 신전의 등록 신자가 된다. 세상의 모든 것을 사고 파는 것으로 환원시켜버린 소비사회가 도래하면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를 매력적인 상품으로 포장하기 위해 분주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행복해졌는가? 사실 이런 질문은 진부하다. 오로지 자기를 향해 정위된 삶, 총체성을 잃은 채 삶의 한 부분에만 집착하는 삶은 진정한 행복과 거리가 멀다.

많은 학자들이 신자유주의체제에 확고하게 편입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가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베를린 예술 대학교의 한병철 교수는 외적인 강제가 아니라 주입된 욕망에 의해 추동되는 사회를 가리켜 피로사회라 했다. 항우울제 복용이 증가하고, 우울증과 자살이 늘어나고, 외부의 요구에 대한 몸의 불특정한 반응인 스트레스가 많아지는 것이 그 징후라 할 것이다.

한 교수는 사회의 도덕적 기반이 취약해지면서 진실이나 정직이라는 보편적 가치가 작동되지 않게 된 현실로 인해 세상은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는 곳으로 변했다고 말한다. 그곳에서 깊은 사유의 공간은 허락되지 않는다. 정치의 호흡도 짧아진다.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한 교수는 이런 사회를 가리켜 투명사회라 했는데, 투명사회는 곧 새로운 통제사회이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감시자가 되는 동시에 자발적으로 자기를 노출한다. 나르시시즘이 강화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문화사회학자인 엄기호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그런 사회 현실에 접근한다. 그는 우리사회를 단속사회라는 말로 요약한다. ‘단속이라는 말은 중의적이다. ‘쉴 새 없이 접속하고 끊임없이 차단한다는 뜻도 있지만, 낯선 타자들과 불필요하게 연루되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단속한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없이 열려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폐쇄된 세계인 셈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동일성에 대한 과잉 접속타자성에 대한 과잉단속으로 양극화 되어 있다. 낯선 것에 대한 진지한 호기심이나 존중은 기대하기 어렵다.

과거 불시에 찾아올지도 모를 나그네들을 위해 밥 한 그릇을 이불 속에 묻어두던 풍습은 사라진지 이미 오래다.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 삶을 든든히 지탱해주던 공동체는 해체되었다. 고향 상실, 정처 없음, 뿌리 뽑힘, 지금 우리 삶을 요약하는 말이다.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갑각류를 닮아간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딱딱한 외피를 뒤집어쓴 채 낯선 타자와의 만남이 초래할지도 모를 불쾌함이나 흔들림을 회피한다. 근본주의적인 종교인들이 늘어나는 것은 그만큼 우리사회의 불안이 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모든 것이 착종된 것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문제가 없다면, 정서적 흔들림이 없다면, 삶이 행복하기만 하다면 이런 질문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넘을 수 없는 장벽 앞에 서거나, 심연 앞에 설 때 사람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묻게 마련이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셸은 말한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 자신이 하나의 문제다. 사람이 되는 것은 곧 문제가 되는 것이요, 그 문제는 사람이 불안하고 정신적 고통을 당할 때 밖으로 드러난다. 사람은 누구나 사람됨이 어떠해야 하는 건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건지에 대하여 희미하게나마 나름대로 본이 될 만한 생각을 품고 있게 마련이다. 그의 실존과 그에 대한 기대 사이, 지금 있는 대로의 그와 그에게 이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기대 사이에 모순 또는 갈등이 있을 때 사람의 문제는 생겨난다”(누가 사람이냐, 종로서적, 1996, p.8-9)

인간은 존재 그 자체로 문제인 동시에 과제이다.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인간은 언제나 자기에 대해 알고 있는 것 이상의 존재라고 말한다. 인간은 현존재이지만, 스스로 무엇이 될 것인가를 선택해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존재는 인간-되어감이다.’

 

에덴의 동쪽

일찍이 있었던 에덴 동산/그 자리 땅 위에선 찾을 길 없어도/시든 가죽 밑에 덮인 내 가슴 안에는/잃어진 낙원의 터가 분명히 있다”(함석헌, <잃어진 낙원> 부분).

히브리 성경은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창세기의 기자는 인간이 신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피조물이라고 설명한다. ‘신의 형상이라는 말이 갖는 함의는 다양하다. 동물 세계와 구별되는 인간만의 독특함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신의 대리자로서 살아야 하는 인간의 책임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인간을 창조한 신은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명을 다스리라는 소명을 주었다. 위임은 권한인 동시에 책임이다. 그런가 하면 신의 형상이라는 말을 제국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즉 위계 사회의 정점에 있는 왕에게만 적용되던 신의 형상혹은 신의 아들이라는 용어를 비틀어 모든 인간에게 적용시켰다는 말이다. “너희만 귀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도 존귀하다는 하위주체들의 아우성이 이 용어 속에 반영되어 있는 게 사실이라면 성경은 첫 대목부터 전복적인 텍스트라 하겠다.

그러나 인간은 신의 형상답게 살지 못했다. 타락 이야기는 너희가 신처럼 되리라는 뱀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삼중적 소외라는 열매를 거두었다고 말한다. 첫째는 신과의 친밀한 관계를 상실한 것이고, 둘째는 동료 인간과의 친밀한 유대를 상실한 것이고, 셋째는 피조 세계와의 일치를 상실한 것이다. 함석헌은 <잃어진 낙원>에서 사르르 기어든 분별(分別)의 일념(一念)’이 빚어낸 비극을 이렇게 노래한다.

 올 때는 봄바람인듯 따뜻하더니/온 후엔 찬 기운 동산에 싸르르 돌아/생명의 잎새, 열매 시들어 떨어지고/차디찬 가을 달이 가지 끝에 걸렸다.//그 광명 어디 가고/그 천진 어디 가고/그 기쁨 찬송 다 어디로 가고/애타는 기억만이 사라지는 음악의 여운(餘韻) 같고나.”

신학자 폴 틸리히는 에덴 동산에서의 삶을 꿈꾸는 순진무구’(dreaming innocence)라는 말로 요약했다. 주객분열이 일어나기 전의 상태, 타자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발생하기 이전의 상태라는 말이다. 그러나 에덴 이후의 상황은 달라졌다. 적대적인 타자들에 대한 경계심이 실존의 기본 정조가 되었다. 경계심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폭력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에덴 이후에 태어난 첫 사람인 가인은 형제 살해자가 되었다. 신의 뜻을 받들어 생명을 산출하던 땅은 무고한 존재의 피가 흐른 땅이 되고 말았다. 그 땅은 인간에게 적대적인 공간으로 바뀌었다. 가인은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는 신의 질문에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냐?”고 반문한다. 죄는 사람과 사람 사이’(人間)에 마땅히 있어야 할 관계를 파괴한다. 질투심에 사로잡혀 동생을 죽인 가인은 오히려 두려움에 포획되고 만다. 만나는 모든 사람이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심 말이다.

가인은 에덴의 동쪽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성경은 그 땅을 이라 한다. 히브리어로 유리, 방황이라는 뜻이다. 성경은 가인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기본 정조인 ‘'정처 없음’, ‘뿌리 뽑힘’, ‘불안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다. ‘홀로 주체로 표상되는 서양 주체의 가슴 깊은 곳에는 타자에 대한 두려움이 깃들어 있다. 이웃을 경쟁자로 혹은 잠재적 적으로 간주하고 살아간다는 것처럼 무거운 일이 또 있을까? 그렇게 보면 가인이 에녹을 낳은 후 도시를 세웠다(창세기 4:17)는 진술도 매우 흥미롭다. 도시를 만들고 성을 쌓는 까닭은 적대적인 타자의 위협으로부터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세상은 위험한 곳으로 변하고 말았다. 가인의 후예인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자랑스레 떠벌린 말은 폭력이 일상화된 세상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아다와 씰라는 내 말을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은, 내가 말할 때에 귀를 기울여라.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면, 라멕을 해치는 벌은 일흔일곱 갑절이다(창세기 4:23-24).

이러한 라멕의 노래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동안 마음의 여백이 잠식된 사람들은 사소한 자극이나 피해에도 맹렬한 적대감을 드러낸다. 국제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더 큰 전쟁의 예방을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잠재적 적국의 군사적 확장이나 우위를 허용하지 않기 위해 선제공격을 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예방 전쟁론자들 뒤에는 라멕이 있다.

창세기는 온통 형제간의 경쟁(sibling rivalry)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다. 가인은 질투심 끝에 동생 아벨을 죽였고, 아브라함의 배다른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도 서로 갈라져 살아야 했다. 이삭의 두 아들인 에서와 야곱의 갈등은 전형적이다. 심약하지만 악지스러운 야곱은 호방한 형의 허술함을 이용하여 장자권을 빼앗는가 하면, 형에게 주어질 아버지의 축복조차 가로챈다. 형제는 원수가 되었고 그 때문에 20년을 헤어져 살아야 했다. 열두 아들을 둔 야곱은 총애하던 요셉과 다른 형제들 간의 갈등으로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맛보았다. 형제가 형제를 종으로 팔아버리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갈등 이야기는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화해를 지향한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만났고, 에서는 20년 동안의 별리 끝에 다리를 절며 귀향하는 야곱을 부둥켜안았다. 천신만고 끝에 애굽의 대신이 된 요셉은 기근에 떠밀려 식량을 구하러 온 형들을 측은히 여기고 받아들인다. 자기들의 갈등 뒤에 숨겨진 섭리를 알아차렸던 것이다. 물론 이들 형제들의 화해 이야기는 애굽과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틈바구니에서 구명도생해야 했던 약소국의 신산스런 상황에서 나온 원망 사고(wishful thinking)를 반영한 것이리라.

 

반제국주의 담론으로서의 성경 이야기

언제나 당신은 민중을 건지시렵니까?/, 불쌍히 보시는 하나님, 언젭니까?/왕들이나 귀족들이 아니라 백성입니다!/옥좌나 왕관이 아니라 사람입니다!/그들은 당신 가슴의 꽃, , 하나님/풀처럼 시들게 마소서 그들을/그 믿은 것이라곤 그늘진 날뿐/하나님 민중을 건지소서(함석헌, <당신은 언제 민중을 건지시렵니까?> 중에서).

문제는 제국이다. 성경은 바벨 탑 이야기를 통해 신이 제국을 미워하신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바벨탑은 바벨론의 신전인 지구라트가 그 모델이지만, 히브리인들은 그 탑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그들은 하늘에 닿는 탑을 쌓으려 한 그들의 노력을 신의 의지를 거역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탑을 쌓기 위해서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고, 건설 과정 가운데 많은 희생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 탑은 또한 일사불란을 요구한다. 동일성의 폭력이 자행되는 것이다. 이질적인 것, 다른 견해를 가진 것은 배제되게 마련이다. 탑의 재료인 벽돌은 일정한 틀에 찍어낸 것이고, 역청은 빈틈없이 두 물체를 결합시킨다. 바람조차 통할 수 없는 것이다. 바벨탑은 사실은 제국의 은유이다. 히브리인들은 신이 그 탑을 허물었다고 말한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흩어져서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은 문화의 다양성을 좋아한다.

피라미드는 애굽뿐만 아니라 모든 제국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씨족이나 부족을 이루어 살던 이들은 외적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더 큰 단위로 결집했고, 그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경제력이 특정한 사람들에게 집중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경제력의 차이는 결국 위계사회를 낳았고, 사람들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갈리게 되었다.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지배계급의 이해가 반영된 것이 관료제도이다. 지배자들이 관료들의 충성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보상이 필요했다. 보상을 해주려면 막대한 재화가 필요했고 그 재화는 피지배계급으로부터 거둬들이거나, 전쟁을 통해 충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피지배계층의 불만이나 저항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는, 그들의 지배를 초월적으로 정당화해줄 사람들이 필요했다. 사제계급은 그렇게 발생했다. 사제계급은 지배계급에게 신성의 아우라를 덧입혀주는 역할을 하면서 지배자들의 호감을 사려 했다. 지배자의 통치가 신적 정당성을 갖는다고 인식하는 순간 피지배계급은 자기들의 처지를 운명으로 수납하고 만다. 종교와 권력이 불의의 연대를 이룰 때 피지배계층은 피눈물을 흘린다.

성경은 제국에 대한 반()담론으로 읽을 때 제대로 보인다. 출애굽기는 제국의 폭력에 대한 묘사로 시작된다. 히브리인들이 많아지는 것을 염려한 애굽 왕 바로는 산파들을 불러 히브리 여인이 낳는 아이들 가운데 사내 아이는 죽이라는 엄명을 내린다. 제국은 생명을 살리는 일보다 죽음을 기획하는 일에 유능하다. 죄책감도 없다. ‘제국의 안전이라는 이데올로기면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 제국은 위계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예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하층민들에게는 가혹할 정도의 할당량이 주어진다. 그들은 제국이라는 기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일 뿐 목적을 가진 인간이 아니다.

그런데 새로운 신이 역사 속에 자신을 드러냈다. 그 신은 강제 노역과 학대로 말미암아 끙끙 앓는 이들의 신음소리를 기도로 들었다. 그는 자신을 세상에서 학대받고 착취당하는 이들을 돌보는 이로 소개했다. 야훼는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자신을 드러냈다. 떨기나무는 목재로도 쓸 수 없고, 광야를 걷느라 지친 사람들에게 그늘을 드리워주지도 못하는 보잘 것 없는 나무였다. 신이 떨기나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 것은 바로 그런 보잘 것 없는 이들이야말로 그의 관심 대상임을 암시하기 위해서였다.

야훼는 억눌린 채 살던 이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비전을 심어주는 동시에, 열 가지 재앙을 통해 제국을 심판했다. 마침내 제국의 피라미드 맨 아랫단을 형성하고 있던 이들은 압제의 땅을 벗어나 홍해를 건넜다. 그들이 마른 땅을 걷듯 건넌 그 바다에 애굽이 자랑하던 병거와 기마병과 군인들은 수장되고 말았다.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든 아니든 그 이야기를 기억하는 이들은 어떠한 지상의 권력도 상대화해서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광야는 그들에게 새로운 삶, 평등 공동체의 이상을 배우는 공간이었다. 함께 배고픔과 목마름을 겪어내면서 그들은 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생명의 본질을 배웠다. 시내산 앞에서 야훼는 히브리인들과 언약을 맺었다. 그들은 초월적인 신의 뜻을 이 땅에서 수행하는 이들로 부름 받았다. 그들의 정체성은 공통의 과거에 있다기다는, 함께 실현해야 할 목표 즉 제사장 나라‘'거룩한 백성이라는 미래적 가치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야훼가 그들에게 신신당부한 것은 다른 신을 섬기는 말라는 것과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다른 신은 지배자들의 폭력과 착취를 정당화해주는 신들이다.

사람은 생활을 위한 도구를 바꾸는 순간 신까지도 바꾼다는 어느 신학자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삶의 곤고함이 해소되는 순간, 사람은 어떤 욕망의 지배를 받게 마련이다. 살기 위해 욕망은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은 경계를 넘기 일쑤이다. 그것이 쾌락의 욕망이거나 지배의 욕망이거나 간에 모든 욕망은 타자를 물화시키거나 타자를 부정하도록 이끈다. 타자를 욕망 충족을 위한 수단이거나, 욕망 충족의 걸림돌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통제되지 않은 욕망이 지배하는 세상에는 평화가 없다. 제국의 지배를 벗어나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운명공동체로 거듭난 히브리인들은 제국의 유혹에 저항해야 했다. 왕들이 제국의 길로 접어들려 할 때마다 예언자들이 등장해 경고의 나팔을 울렸다.

신약의 복음서 가운데 제일 먼저 기록된 책은 마가복음이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1:1)는 구절로 시작된다. 대개의 독자들은 이 구절에 내포된 혁명성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저 예수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한 허두처럼 읽어버린다. 하지만 이 구절은 당시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의 입장에서 보자면 반역을 획책하는 것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몇 가지 용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복음은 조금 변형된 형태이긴 하지만 사실 로마 제국의 황제에게 적용되던 단어들이다. 오랜 내전을 끝내고 로마 제국을 재통일한 옥타비아누스에게 원로원은 위대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영예로운 호칭을 부여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지중해 세계는 오랜 전란에서 벗어났다. ‘로마의 평화Pax Romana’ 시대가 열린 것이다. 거대한 제국을 이룬 로마는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황제를 신화화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는 아폴론 신의 아들이라고 선전했고(신의 아들), ‘세상의 구원자’, ‘’, ‘평화의 왕으로 불리웠다.

제국의 곳곳에 로마식의 신전이 세워졌고, 로마 문화를 선전하기 위한 극장이 세워졌다. 군대를 파견하고 피식민지에서 거둬들인 공물을 용이하게 수송하기 위해 길을 닦았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 속에는 피지배 민족의 아픔이 진하게 배어있다. 로마의 평화는 제국 내의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시민 계급만 누릴 수 있는 허구의 평화였다. 다른 이들은 압도적인 로마 군단의 폭압 아래 숨죽이고 있었을 뿐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모험을 감행했다.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한 사나이에게 황제에게만 배타적으로 적용되던 호칭을 부여했던 것이다. 그들은 로마의 평화에 대비되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선포했다. 그것은 힘과 무력이 아니라 비폭력적인 삶, 사랑과 섬김과 나눔과 돌봄을 통해 열리는 평화였다. 그들은 예수에게 황제의 호칭을 적용했다. ‘’, ‘구원자', '평화의 왕', ‘하나님의 아들이 그것이다. 예수에게 부여된 이런 호칭들은 예수의 본질에 대한 규정이라기보다는 제국의 질서에 대한 반담론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백향목처럼 도드라진 이들이 되기보다는 어깨를 겯고 바람을 이겨내는 겨자풀처럼 보잘 것 없는 이들이 우정을 나누는 새로운 세상, 경계 없는 세상을 꿈꾸었다. 유대인/이방인, 거룩함/속됨, 정결/부정, 남자/여자로 구획된 세상에서 그들은 과감히 경계를 가로지르며 빗금을 제거했다. 그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세계 질서에 의문을 제기했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그 꿈을 예수는 하나님 나라'’는 말로 요약했다.

물론 하나님 나라로마 제국의 대칭 개념이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몸으로 증언했다. 그들의 존재는 로마 제국을 비롯한 기득권자들에게 가장 큰 위협이었다. 피라미드 세계의 맨 아랫단에 있던 이들이 깨어나 꿈틀거리기 시작하면 제국이라는 체제가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의 처형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사도들은 죽임을 당했던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고 선포했다. 그 선포를 중심으로 모인 초대교회는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이 되는 공동체, 우정에 바탕을 둔 세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지금 이전보다 훨씬 더 음험하고 위협적인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다. 세계가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에 편입된 이래, 우리는 다른 삶을 상상하는 능력을 상실했다. 욕망을 확대재생산함을 통해 유지되는 자본주의 세상은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수 없도록 우리를 몰아댄다. 그 세계 속에서 인간은 다만 소비자일 뿐이다. 소비의 굴레 속에 들어간 이들은 남들과 구별되는 기호로 치장하기 위해 숨이 턱에 찰 때까지 달린다. 이웃은 삶을 함께 경축해야 할 동료가 아니라 경쟁자 혹은 잠재적 적이 된다. 불안과 경쟁의식이 내면화되면서, 내면은 점점 푸석푸석해진다. 문제는 종교조차 자본주의 질서에 포섭되었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위험사회의 징후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제는 새로운 삶을 모색해야 할 때이다.

 

새로운 세상의 향도

욕망에 바탕을 둔 삶을 극단으로 밀고 가는 동안 인류는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기후 변화의 심각성은 이제 전문가들만의 진단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경험이 되었다. 지구촌 곳곳에서 들려오는 기상 이변 소식은 지구라는 초록별이 중병에 걸렸음을 암시한다. 지구 온난화, 사막화, 열대림 훼손, 많은 생물종의 멸종, 토양 유실, 지하수 오염, 바다 생태계의 변화, 화석 연료 고갈. 우리가 선뜻 대면하기 싫은 이런 '불편한 진실'은 이제 외면한다고 사라지지는 않는다.

김용 세계은행총재는 영국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10년 이내에 물과 식량을 둘러싼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꿀벌의 대규모 폐사 소식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리함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지금까지 추구해온 삶의 방식을 바꾸기 싫은 것이다. 편리함과 안락함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다. 즉물적 삶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성찰을 거부한다.

어떤 사람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거대한 문제를 풀기에는 때가 이미 늦었다고 생각한다. 설사 아직 기회가 있다고 해도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일종의 비관론이다. 또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인류는 수없이 많은 위기를 경험했지만 그때마다 슬기롭게 위기를 돌파해왔음을 상기시키면서 과학이 결국에는 문제를 해결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지구에 닥쳐오는 거대한 재앙을 극복해내는 할리우드 영화의 영웅들을 떠올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천박한 낙관주의이다. 이 두 가지 입장의 공통점은 지금의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기에 해야 할 일이 있는 법이다. 물살에 떠밀려 가는 아이를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외면할 수는 없지 않은가. 헨리 데이빗 소로는 어떤 사람이 동료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는 아마도 다른 고수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세상에는 다른 북소리를 듣는 이들이 있다. 자발적으로 주류사회로부터 튕겨져 나온 이들이다. 그들은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이 만들어놓은 표준화된 삶의 이정표에 의문부호를 붙인다. ‘다른 삶이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발적 소외를 선택한 이들 속에서 새로운 희망이 움터 나온다. 세상은 그들을 패배자로 분류하겠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는다.

그런 선택을 가능케 한 내적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분절된 시간 속에서 안달하며 사는 삶에 대한 염증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로부터의 소환이라 할 수 있는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해보지만 영혼의 헛헛증은 해소되지 않는다. 불안의 대용물들을 구입하고 또 그것을 누려보기도 하지만 불안은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삶은 언제나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플라톤은 동굴에 갇힌 수인이 그림자를 실체로 알고 살다가 동굴 밖의 진짜 세계와 만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실체와 그림자가 착종되거나 뒤집힌 것이 우리 현실이다. 그 사실을 절감하는 순간 새로운 삶의 문이 열린다.

세상에 대한 염증 혹은 절망만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 혹은 생태적 감수성도 영문 모를 불안의 해독제이다. 칼 야스퍼스는 세상은 온통 초월자의 암호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다른 세계를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말이다. 18세기의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순수의 전조>에서 이런 신비를 아름답게 그린 바 있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한 순간 속에서 영원을 보라.”

초월자의 암호로 가득 찬 세상을 근대 이후의 사람들은 욕망 충족을 위한 도구로만 파악했다. 사물 본래의 가치는 사라지고 그 교환가치만 도드라지면서 희소성이 가치 평가의 기준이 되었다. 남과 구별되기 위해 사람들은 희소한 것을 얻으려 동분서주하고 있다. 희소한 것을 얻는 순간 또 다른 목표가 제시되기에 이 경주에는 휴식이 없다. 안식 없음, 뿌리 뽑힘, 고향 상실 의식은 그렇게 내면화된다. 그러나 희소성의 신화에서 벗어나는 순간 작고 사소한 것들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온다. 남들과 경쟁하지 않아도 누릴 수 있는 것을 선물로 받아들이게 된다.

진정한 신앙도 우리 삶을 든든히 세워주는 기둥이 된다. 신앙이 우리에게 가리켜 보이는 것은 자아의 한계 밖의 세계이다. 믿음이 깊어진다는 것은 자아 속에 유폐되어 있던 삶에서 벗어나 타자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고, 그 타자의 세계를 통해 우주심에 이르는 것이다. 영성에 대한 담론이 유행하고 있다. 문제는 그것이 상처-힐링이라는 도식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성이 깊어진다는 것은 타자의 고통에 예민해지는 것이다.

사적 안위와 소비주의에 깊이 침윤되어 살아가는 이들을 가리켜 파커 J. 파머는 당위와 현실 사이의 비극적 간극을 가슴에 품고 견디는 비통한 자들the brokenhearted’”(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글항아리, p.21 역자 서문 가운데서)이라 말했다. 세상에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파머는 그래서 중요한 것은 부서져 흩어지는broken apart’ 것이 아니라, ‘부서져 열리는broken open’ 마음이라 했다. 상처를 오히려 소통을 위한 길로 삼아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삶이 주는 불안에서 벗어나는 또 다른 길은 고통 받는 타자를 통해 열린다. 고통 받는 이들의 삶에 의미 있는 타자가 되기 위해 다가서는 순간 우리 삶의 비애는 줄어든다. 노아와 아브라함은 둘 다 순종의 챔피언이다. 노아는 신의 뜻을 따라 방주를 만들었고, 아브라함은 신의 뜻에 따라 본토·친척·아버지 집을 떠났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아들까지 신에게 바치려 했다. 하지만 신은 노아가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해 거대한 구원사를 시작했다. 무엇 때문일까? 노아는 죄지은 인류를 구하기 위해 신에게 간청하거나 맞서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려는 신의 뜻을 알았을 때 그 앞에 막아선 채 의인과 악인을 함께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의에 합당하냐고 따져 물었다. 불경할 수도 있지만 아브라함은 이웃에 대해 책임적 존재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신은 당신의 뜻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을 귀히 여긴다.

레위기의 성결법전은 거룩한 백성이 되는 길을 가르친다. 그 대전제는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레위기 19:2)는 선언이다. 3절 이하는 거룩한 삶이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있다. 부모 공경, 안식일 준수, 우상 숭배 금지, 제물 규정 등 일반적으로 종교적 덕목이라 일컬을 수 있는 내용들이 언급된 후, 9절부터는 하나님의 백성이 일상 속에서 실천해야 할 덕목들이 제시되고 있다.

추수할 때에 밭의 한 모퉁이는 남겨두어야 할 뿐만 아니라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는 안 된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 신세인 외국 사람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도둑질, 사기, 속임수, 거짓 맹세, 이웃에 대한 학대나 착취를 버려야 한다. 몸이 불편한 이들을 저주하거나 그 앞에 걸려 넘어질 것을 놓아서도 안 된다.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웃의 생명을 위험 속에 빠뜨리지 말아야 한다. 이 모든 말을 요약한 것이 18절에 나오는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라는 구절이다. 이웃 사랑으로 귀결되지 않는 거룩함은 위선일 뿐이다.

 

새로운 주체의 탄생

크신 님 나를 안으소서!/나는 인제 당신이/나 안으러 오신 줄 압니다./이때껏 뵈온 일 없어도 어쩐지/나 안고서 당신은 오신 줄 나는 믿어집니다.//뜨거운 님 나를 품으로서!/삼키소서, 맘대로 하소서!/당신 가슴에 이 몸 바치오리라./나는 그것 즐겁습니다./한없이, 한없이, 그저 한없이(함석헌, <임이여 나는 작은 등불이외다> 중에서).

돈이 주인 노릇하는 전도된 세상을 유쾌하게 탈주하는 삶은 가능한가?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대화될수록 그런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들도 생겨나게 마련이다. 파시스트적 속도로 사람을 몰아대는 세상에서 성공을 재정의하고, 삶의 문법을 바꾸려는 이들이 있다. 주류 세계의 눈으로 보면 '패자'처럼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야말로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전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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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보수적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이가 있다. 그는 지인들의 권고에 따라 우리 교회로 옮겨왔다. 해외 투자회사의 중역으로 일하고 있는 그는 매우 지쳐 있었다. 그는 교회를 통해 위로와 평강을 얻고 싶었다. 그러나 상처-위로-힐링이 아니라 책임-고난-용기를 촉구하는 교회의 선포에 적잖이 당황했다. 생명과 평화 세상을 열어가기 위한 교회의 실천은 좌파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는 마음속 갈등을 숨기기도 하고 간혹 드러내기도 했지만 이상한 끌림을 느꼈는지 튕겨져 나가지는 않았다. 그는 얼마 전 이 교회에 오기 전까지는 몰랐던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삶의 굴레를 벗어나면 죽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는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기쁨 속에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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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던 사회복지사 K는 여러 해 동안 재직하던 기관을 사임했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포부로 일을 시작했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들을 인간 그 자체로 사랑하고 존중하기보다는 일감으로 대하고 있음을 자각하자 그는 주저 없이 직장을 나왔다. 몇 달을 쉬면서 새로운 직장을 얻을까 고민을 하던 중, 다른 사회 복지사들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제도권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내면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을 내보일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그는 그런 사회복지사들을 연결하는 다리가 되기로 작정했다. ‘아픔에 직면할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 글도 쓰고 강연도 했다. 아주 적은 생활비를 가지고 살 수밖에 없었지만 아내의 지지가 큰 힘이 되었다. 힘겨울 때마다 전대도, 두 벌 옷도, 지팡이도 없이 예수의 파송을 받았던 제자들을 떠올렸다. 어느 달에는 강연 수입이 기존의 수입보다 많아졌다. 그는 그것을 두렵게 받아들였다. 자기 실천을 적극 지지해주는 아내에게 주어야 할 가장 귀한 선물은 물질이 아니라 임을 알았기에 그는 돈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단위의 사람들과 만나기 시작했다. 그의 존재는 많은 이들에게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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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부터 자기 삶을 봉사를 위한 삶으로 정위했던 Y는 아주 유명한 NGO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다. 자기가 정말 좋아서 하는 일에 보상까지 주어지니 참 좋았다. 그런데 3년이 지날 무렵 그는 문득 자기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체가 더 많은 모금을 위해 실적을 부풀리고 홍보하는 일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는 이의를 제기했다. ‘모금을 많이 하면 더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말은 거짓 신화였다. 하지만 동료들은 그러한 진실에 직면하기를 꺼려했다.

어느새 그들은 고통 받는 자리에 서기보다는 월급이나 승진등의 보상에 더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보상이 중심 가치가 되는 순간 성찰적 지성은 작동되지 않는 법이다. 국제 구호 활동을 하면서도 그들은 늘 주민들의 삶의 자리까지 낮아지려 하지 않았다. 위험이 생기면 그들은 언제나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는 방외인이었던 것이다. 결국 진정한 구호란 스스로 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방외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연대 활동을 통해 지지해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수이기는 하지만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그는 그들과 고민을 함께 나누는 동시에 새로운 삶을 연습했다. 최소생활을 해보는 것이었다. 꼭 필요한 것 이외의 지출은 대개 남과 구별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 달에 70만원이면 혼자 지내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자 그는 직장을 사임했다. 그리고 발 딛고 있는 땅이 현장이 아니면 다른 현장은 없다는 확신에 따라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이들이 청소년 계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진학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유보한 채 살아가는 이들, 그리고 그런 입시에서 진즉에 배제된 이들 모두 견디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래서 청소년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인 까페를 열었다. 그곳은 경계구획이 없는 공간이다. ‘하라하지 말라는 명령과 금지에 익숙한 이들과 친밀하게 대화하면서, 그들이 자기 존재에 대해 낯설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는 동안 존재에 대한 질문은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미디어가 만들어 놓은 스탠다드의 삶을 벗어날 용기를 심어주려고 애쓴다. 서로를 진심으로 대하고,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는 까페를 찾는 청소년들과 함께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활동을 해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돈 많이 받는 안정된 직장을 떠나 그는 우리 사회의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 그 검은 그늘을 흰 그늘로 바꾸고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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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는 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세상을 종교/비종교, 진리/거짓, 옮음/그름으로 가르는 일이 자기에게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새로운 삶을 모색하다가 사회복지사가 되었다. 그리고 복지 기관에서 10여년 열정적으로 일했다. 지역의 노인들을 돌보고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은 행복했다. 그러나 실적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힌 듯한 동료들의 모습을 보며 떠날 때가 되었다고 느꼈다.

그는 무작정 직장을 벗어났다. 막연하기는 했지만 이제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일, 즉 남과 어울리며 공동체를 이루는 일과 소박하나마 문화적 활동을 하며 살아야겠다고 작정했다. 어느 지자체에서 그에게 마을 공동체를 세우는 일을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그는 기꺼이 그 일을 맡았다. 함께 일할 수 있는 동료들도 청했다. 그러나 예산도 프로그램도 전혀 없었다. 그 자기를 믿고 모여든 이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새벽에는 우유배달을 하고 저녁에는 트럭 운전을 하면서 버텨냈다.

몸과 마음이 다 지쳐 그 일을 그만 두고 싶을 때, 잘 아는 사회복지사들이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적잖은 돈을 모아왔다. 눈물겨웠다. 그는 그 순간 자기가 하는 일이 소명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직감했다. 그는 소비적 삶에 중독된 사람들이 어떻게 거기서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러다가 해독제는 자기 속에 있는 창조적인 재능과 만나고, 그것을 표현해봄으로써 성취감을 얻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시를 쓰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함께 연주를 하기도 하면서 사람들은 자기 마음의 헛헛함을 채우는 길을 스스로 발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먹서먹하던 마을 주민들은 이제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마음을 쓴다. 자본주의 세상이 몰아낸 마을 공동체가 회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결핍이 주는 기쁨을 안다. 어느 정도만 채워져도 만족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공히 붙잡고 있는 성경말씀이 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이 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이 진심으로 하십시오”(골로새서 3:23). 기독교 신앙은 사람들에게 아픔의 자리로 내려가라고 말한다. 남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누군가의 좋은 이웃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말 잘 산다는 것은 세상이 만들어놓은 성취와 발달이라는 이름의 이정표’(엄기호, 단속사회)를 충실히 따르는 것이 아니다. 사람답게 사는 것이야말로 잘 사는 것이다.

 

인류의 대표로 살기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책은 참 난해하다. 누군지도 모르고, 언제 온다는 기약조차 없는 고도(Godot)를 기다리는 두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막연히 기다린다.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 지루해서 쓸데없는 말장난을 해보기도 하고, 신을 벗으려고 애를 써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나무에 목을 맬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은 어느 순간 살려달라는 외침을 듣는다. 앞을 못 보는 포조라는 인물의 외침인데, 그 소리를 듣고 두 사람 가운데 하나인 블라디미르는 고민을 하다가 에스트라공에게 말한다.

공연한 얘기로 시간만 허비하겠다. (사이. 열띤 소리로) , 기회가 왔으니 그 무엇이든 하자. 우리 같은 놈들을 필요로 하는 일이 항상 있는 건 아니니까. 솔직히 지금 꼭 우리보고 해달라는 것도 아니잖아. 다른 놈들이라도 우리만큼은 해낼 수 있을 테니까. 우리보다 더 잘할 수도 있을걸. 방금 들은 살려달라는 소리는 인류 전체에게 한 말일 거야.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엔 우리들뿐이니 싫건 좋건 그 인간이 우리란 말이다. 그러니 너무 늦기 전에 그 기회를 이용해야 해. 불행히도 인간으로 태어난 바에야 이번 한 번만이라도 의젓하게 인간이란 종족의 대표가 돼보자는 거다”(베케트, 133).

 

살려달라는 포조의 외침은 특정한 대상을 향한 것이 아니다. 물론 그 대상은 동물이 아닌 사람일 테니까 인류를 향한 외침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둘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싫건 좋건 인류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쓰러진 사람 앞에 그들은 인류의 대표로 서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베케트가 암시하는 희망을 본다. 그는 삶의 무의미함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누군가를 돌보는 데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누구를 돌보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을 때이다. 진정한 경건은 돌봄으로 표현된다. 그런 돌봄이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섬김이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셸은 사람은 누군가의 동료가 됨으로써, 남들을 보살핌으로써, 성숙한다고 말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싫든 좋든, 얽혀 들어가는 것, 행동하고 반응하는 것, 놀라고 응답하는 것이다. 허무와 패배가 예견된다 해도 부조리에 항거하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인 것이다”(아브라함 조수아 헤셸 선집3, 누가 사람이냐, 13-4).

이제는 새로운 인류가 등장해야 할 때이다. 발전강박에서 벗어난 사람, 행복을 구성하는 다른 길을 찾은 사람, ‘홀로 주체로 서기보다는 서로 주체로 살아가려는 사람, 타자의 눈물을 렌즈 삼아 하늘을 볼 수 있는 참 사람 말이다. 우리는 이런 소명 앞에 서 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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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속으로 구부러진 인간

김기석의 하늘, , 사람 이야기(8) 

자기 속으로 구부러진 인간

 

평안하신지요?

지난 번에 만났을 때 마치 늘 만나는 벗인양 허물없이 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격조한 세월이 만들어내는 소원함을 느끼지 않았던 것을 보면 우리 마음이 서로 통하고 있었던가 봅니다. 별 말을 하지 않아도 그냥 통할 수 있는 벗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지요? 눈이 내리자 문득 친구가 그리워져 배를 타고 친구 집을 찾아갔다가 사립문 앞에서 그저 돌아섰다는 옛 사람의 이야기를 저는 참 좋아합니다. 흥에 따라 왔다가 또 표표히 돌아서는 그 홀가분함이 부럽습니다. 안태 고향이 그러하듯 아무런 강제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는 이들이 있다면 삶이 지금보다는 한결 수월해질듯 싶습니다.

해야 할 일 혹은 성취해야 할 목표를 인간관계의 중심에 두는 이들과 만난 후면 저는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곤 합니다. 내향적인 성격 때문일 것입니다. 의지적 강제가 느껴질 때마다 제가 뒷걸음질 치는 것은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한 안간힘입니다.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었을 때의 불편함처럼, 강요된 역할 혹은 자리에 설 때마다 쇠항아리를 뒤집어쓴 것처럼 답답해하곤 했습니다. 저는 천성이 큰 일을 도모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제 분수나 잘 지키며 살자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특정한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는 게 참 마뜩찮은 일이기는 하지만 며칠 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인 조현아 씨의 1심 재판 결과가 나왔더군요. 이미 게이트를 떠난 비행기를 되돌린 그의 행태를 꾸짖으며 재판장인 오성우 판사는 징역 1년을 선고했습니다. 그 형량이 적절한지 여부는 제가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판결문의 한 대목이 제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했습니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 자존감을 무너뜨린 사건이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심이 있었다면, 직원을 노예처럼 여기지 않았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다."

그의 죄는 비행기를 되돌린 행위이지만 그런 행위를 유죄로 판단한 또 다른 근거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 자존감을 무너뜨렸다는 사실입니다. 재판장은 조 전 부사장은 물질적으로는 넉넉한 사람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사람됨의 조건인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심이 결핍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누구에게나 결락된 부분이 있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결락이 타자에 대한 잠재적 폭력으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권력은 권력자에게 더 넓은 자아의 공간을 마련해준다지요? 권력이 주어질수록 몸을 더욱 낮추지 않으면 그의 존재 자체가 타자에게 무거운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세계--존재인 인간의 삶을 다각도로 파악하려고 한 사람입니다. 인간의 삶은 관계맺음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자들과 관계를 맺는 것을 일러 하이데거는 고려’(Besorge)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을 구별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단어는 배려’(Fürsorge)입니다. 복잡한 그의 철학 이론을 뒤틈바리인 제가 일매지게 설명할 능력은 없습니다만, ‘~ 위하여를 뜻하는 ‘für'’는 접두사 속에 담긴 느낌은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인간됨은 타자의 입장에 서보는 데 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조금 더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타자가 자기의 능력과 사람됨을 주체적으로 사용하고 또 형성해 가도록 돕는 일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 해 독일의 프라이부르크에 잠시 머물 때의 일이 떠오릅니다. 도시 교외 지역에 살고 있던 어느 피아니스트가 저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독일식 식사를 하며 나누는 대화가 흥미로웠습니다. 음악 이야기며 건축 이야기며 신앙에 대한 이야기며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웠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나올 때 공동 주택에서 자취 생활을 하고 있던 한 젊은이가 독일 생활에 이미 익숙해진 분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집에 가서 세탁기를 돌리면 안 되겠지요?" 그러자 그는 "8시가 넘었으니 오늘은 안 되겠네요. 너무 늦었어요."라고 답했습니다. 그는 제게 휴일이면 잔디 깎는 기계도 돌리지 않는 게 이 사회의 불문율이라고 말했습니다. 함께 산다는 것은 나 좋을 대로 살지 않는다는 말일 겁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급격히 사라져가고 있는 게 이런 배려의 마음이 아닐까요? 배려는 타자 윤리의 핵심입니다.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은 참된 자기로부터도 멀어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일쑤 거짓 자아(false ego)를 참 자기(true Self)라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자기 부풀리기, 자기 강화야말로 거짓 자아의 특색입니다. 참된 자기로부터 멀어진 사람일수록 타인에게 적대적입니다. 뿌리뽑힌 자의 불안감이 그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교가 가르치는 어짊()의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기의 욕망을 누르는 것이고(遏人欲), 다른 하나는 하늘의 뜻을 물으며 거기 머무는 것입니다(存天理). 자기를 극복하고 예로 돌아간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일 겁니다(克己復禮). 마음이 허황한 자의 자발없는 말이 너무 길어지고 있습니다. 나무라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모든 존재자는 존재 그 자체인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 속에 자신을 드러낸 것이라는 말을 금과옥조로 받아들이고 삽니다. 그리고 이것을 존재자를 통하지 않고는 존재를 찾아갈 수 없다는 말로 갈무리해 두었습니다. 저는 삶이란 하나의 중심을 향한 순례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이웃을 도외시하거나 속된 존재자의 세계를 벗어난 채 초월의 세계로 도약하는 길은 애당초에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철학자인 김진석 선생이 초월超越이 아니라 포월匍越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나온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여깁니다. 가장 낮은 바닥을 기지 않고는 하늘에 오를 수 없습니다. 역설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기본적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예수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지만 그 동등함을 기꺼이 포기하고 종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왔다고 말합니다. 그저 오신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발적인 낮춤을 귀히 여기시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자발적 낮아짐과 올리움의 변증법적 순환이야말로 하늘과 땅이 만나는 방식이 아닐까요?

자기 속으로 구부러진 인간”(homo incruvatus in se).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시간 속을 바장이며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모든 판단의 중심으로 삼습니다. 아무리 객관적이라 해도 우리의 판단은 주관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이런 자기 중심주의의 중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타인의 삶의 자리로 자꾸 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마음 쓸 때 우리는 조금씩 자기 중심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오게 됩니다. 죄는 이웃에게 등을 돌리게 하지만 사랑은 이웃을 마주 보게 만듭니다. 마주본다는 것, 그것은 그를 나와 똑같은 존재로 인정한다는 말일 겁니다. 쏘아보는 눈, 공포에 질린 눈이 아니라 편안하게 마주보는 눈길 속에 하늘이 깃드는 법입니다. 타자와 마주본다는 것은 모험이기도 합니다. 상처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처가 무서워 그와 마주 보기를 거절한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또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수 절기가 다가오는군요. 깊은 산 계곡으로 눈석임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우리가 지나고 있는 이 암울한 시대에도 봄볕이 비칠 날이 오겠지요? 그 날을 기다리면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봄볕처럼 다사로운 사람이 되어보자고 다짐합니다. 오늘도 희떠운 소리가 많았습니다. 너그러이 용납하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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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한 삶을 향하여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7)

담백한 삶을 향하여

입춘이 지난 후 찬 바람이 좀 불기도 했지만 왠지 봄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은 나날입니다. 요즘은 무지근한 어깨 통증 때문에 잠을 설치곤 합니다. 통증은 마치 자명종처럼 일정한 시간에 제 몸을 깨워줍니다. 참 신기하지요? 어깨를 좀 주무르다가 문득 ‘인생 참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어 혼자 피식 웃었습니다. 잠시 어둠이 익숙해진 후에는 스며들듯 서재로 들어갑니다. 책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는 것이 마치 제 내면의 풍경 같아서 한숨을 내쉬기도 합니다. 가만가만히 성경을 소리 내어 읽고, 침묵 기도도 드리고 난 후에는 책의 감옥 속으로 들어갑니다. 오랜 습관처럼 자연스럽습니다. 책을 뒤적이기도 하고, 밀린 글을 쓰기도 하는 것이지요.

엊그제는 중국 철학자인 리쩌허우의 《미의 역정》을 읽었습니다. 중국의 상고 시대부터 명·청대까지의 미의 역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매우 흥미롭고 유익했습니다. 저자의 해박하면서도 유려한 문장에 질투심까지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이야기가 위魏·진晉 시대에 이르렀을 때 리쩌허우는 <세설신어世說新語>가 펼쳐 보이는 인간의 내재적 지혜와 품격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 시대가 제시한 이상적인 인물의 풍모를 이렇게 말합니다.

“해와 달을 가슴에 품고 있듯이 환하다, 바위 아래로 내리치는 번개처럼 두 눈동자가 반짝인다, 봄날의 버드나무처럼 해맑다, 굳센 소나무 아래로 부는 바람처럼 꿋꿋하고 힘이 있다, 산 위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그윽하고 심원하다, 천길 석벽처럼 고요히 우뚝 서 있다.”

물론 이것은 <세설신어> 이곳저곳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평가를 리쩌허우가 모아놓은 것입니다.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과장기가 느껴지기도 했지만 가슴 한 켠이 시원해졌습니다. 이런 이들과 함께라면 이 시대를 통과하는 동안 우리 마음에 울혈처럼 맺힌 답답함이 말끔히 해소될 것만 같았습니다. 물론 반성도 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잗다랗게 변해버린 내 모습이 상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위에서 언급된 인물평이 전부 자연물과 연관되어 있군요. 사람이 자꾸 작아가는 것은 어쩌면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발터 벤야민은 사용가치보다 과시가치가 중시되는 상품 자본주의 세상을 일러 ‘판타스마고리아’라고 하더군요. 자기 삶을 참답게 살아낼 내적 능력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판타스마고리아에 집착합니다. 휘황하기 이를 데 없는 그 환상의 세계는 우리를 영원한 빚쟁이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 세계에서 만족은 언제나 일시적으로만 향유될 뿐 지속적인 기쁨은 허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욕망과 충족과 권태 사이의 시간은 점점 짧아지면서 호흡은 가빠지고 삶의 활력은 급격히 고갈됩니다. 삶은 언제나 다른 곳에 있습니다.

 

 

며칠 전 목회실 식구들과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데 청명한 하늘이 참 시원해 보였습니다. 사무실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이켜 가까운 공원을 향해 천천히 걸었습니다. 날이 포근한 탓인지 제법 많은 이들이 공원에 나와 한가롭게 거닐고 있었습니다. 산책로를 따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습니다. 느릿느릿 걷는 동안 제 마음은 어느새 어린시절로 달려갔습니다. 온갖 생명이 한데 어울려 장엄 세상을 이룬 그 시절이 그리웠습니다. 골고루 가난했으니 이웃들끼리 오고가는 정도 깊었더랬습니다. 아, 우리는 그 세계로부터 얼마나 멀리 떠나 온 것일까요? 개구리와 뱀에 얽힌 기억들을 나누다가 문득 양서류와 파충류의 차이가 궁금해졌습니다. 동행한 이들 가운데서 그 차이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들 생물 수업 시간에 분명히 배웠을 텐데 이미 레테의 강물을 절반쯤 마신 탓인지 빙긋 웃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한 분이 인터넷 검색을 하더니 파충류와 달리 양서류는 올챙이 시절을 거치는 동물이라고 말해주더군요.

자연과 더불어 오이쿠메네를 이루어 살면서도 우리는 이 세계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한지 모릅니다. 영어 단어나 수학 공식을 모르는 것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우리 주변에서 무수히 피었다 지는 들꽃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우리 영혼이 지금처럼 빈곤해진 것은 볼 마음만 볼 수 있는 일상의 기적에 짐짓 눈을 감고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윌리엄 블레이크는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한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고 노래했지요? 이 눈 하나가 열리지 않아 우리 삶이 이 지경입니다. 칼 야스퍼스는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이 ‘초월자의 암호’라고 말했습니다. 그 암호를 읽어내고 그것을 해독해 낼 능력이 갖춰진다면 우리는 영적 빈곤에 시달리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농담처럼 신학교를 졸업하는 이들에게 몇 가지 시험을 치르게 하자고 말하곤 합니다. 우리 산과 들녘에서 자라는 들꽃과 우리 땅에 깃들어 사는 새들, 우리 강과 하천에서 살아가는 물고기의 이름과 생태를 익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별자리 이름까지 익힐 수 있다면 더 좋겠지요. 자연 세계에까지 의식의 지평이 확장되면, 생태적 감수성이 깊어지면, 그리고 우리가 사용하는 어휘 속에 그 이름들이 들어오면 우리가 애집하던 것들의 매력은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고백하면서도 세상에 널려 있는 하나님의 작품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세계를 누릴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인위적인 것들에 집착합니다. 저는 자본주의 세계의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세상의 미세한 것들 속에 깃들어 있는 하늘에 주목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목사들이 특급 호텔을 드나들고, 값비싼 자동차에 집착하고, 백화점을 제집 드나들듯 합니다. 온 세상의 죄와 슬픔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를 팔아 제 배를 불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번영의 복음에 사로잡힌 이들은 자기들이 하늘을 가리켜야 하는 이정표라는 사실을 잊고 삽니다. 입술로는 하늘을 말하면서도 인위적이고 자극적인 것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들로 인해 종교는 노쇠해지고 있습니다.

노자는 다섯 가지 색이 우리 눈을 멀게 하고, 다섯 가지 소리가 우리 귀를 멀게 하고, 다섯 가지 맛이 우리 입맛을 상하게 하고, 말 달리며 사냥질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만들고, 얻기 힘든 재화가 사람을 어지럽힌다고 말했습니다(노자, 12장). 저는 이것을 담백함이야말로 도에 가깝다는 말로 받아들입니다. 자극적인 것보다 고졸古拙한 것이 우리 마음에 평화를 가져옵니다. 감정을 끌어 올리는 복음성가들보다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떼제 찬양에 제가 이끌리는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언제쯤이면 우리 삶이 일렁이는 버릇에서 벗어나 담담해질 수 있을까요? 불의한 세상은 아직 우리에게 안온한 평화를 허락할 생각이 없나봅니다. 험악한 세상이지만 부디 청안청락하시길 빕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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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가 됐든 유일무이한 존재

  • 목사님,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김윤수 권사님의 수원 사는 딸 박 경희 권사입니다. 목사님이 펴내신 책들을 통해 세상살이 하는대 지고가기 버거운 짐들을 내려놓는 은혜와 감사, 그리고 사랑을 보게 하시니.. 이 난을 통해 감사드립니다.

    박경희 2015.02.03 12:25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6)

사람은 누가 됐든 유일무이한 존재

 

잘 계시지요? 이 시절을 견디기 위해서 그나마 가지고 있던 얄팍한 독기마저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는 말씀이 참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수상한 세월을 건너다보니, 일상에서 느끼는 사소한 행복조차도 죄스럽게 여겨집니다. 한편에서는 행복에 대한 은근한 욕망을 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욕망을 품었다는 사실 자체를 자책하는 동안 자기 불화의 골은 깊어만 갑니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고 하지요? 날마다 접하는 어두운 소식들 때문인지 영혼에 드리운 구름의 무게가 천 근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마음이 무거울 때면 정진규 선생의 시구가 떠오릅니다.

“지금 나 한 사날 잘 열리고 있어

누구나 오셔, 아름답게 놀다 가셔!”

-<몸詩·14> 일부

시인은 왈큰왈큰 알몸을 열어 보이는 진달래꽃을 바라보다가 그만 봄 신명에 지폈던 것 같습니다. 신명에 지피면 자기라는 감옥에서 벗어나오게 마련이지요. 신명은 언제나 타자에 대한 경계심을 완화시켜주니까요. 우리도 언젠가는 저 시인의 말처럼 잘 열릴 수 있을까요? 그래서 네 편 내 편 가리지 않고 누구나 초대할 수 있는 날이 오기는 올까요?

오늘 아침 라디오에서 나오는 오페라 아리아를 듣는데,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어떤 무지근한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올랐습니다. 굳이 감동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실 어떤 곡이었는지 기억도 안 납니다. 시원의 아득함을 상기시키는 맑고 투명한 음색이 제 심금을 울렸던 것 같습니다. 울고 싶던 차에 뺨을 맞은 격이랄까요. 혼잣소리처럼 “아, 저렇게 노래를 잘 하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하자 곁님은 덤덤한 목소리로 “그냥 즐기세요”라고 말하더군요. 제가 이렇게 멋없는 사람과 삽니다.

어떤 분야에서든 탁월한 성취를 이룬 사람을 보면 참 감동적입니다. 그것이 예술 분야든 운동 분야든 기술 분야든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아레테(arete)’는 그리스 사람들이 참 소중히 여겼던 가치입니다. 흔히 ‘덕’이라고 번역되지만 그것은 사람에게도 사물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단어이기에 ‘덕’보다는 ‘훌륭함의 상태’라고 번역하는 데 나을 것 같습니다. 아레테가 사물에 적용될 경우에는 그 사물이 수행하게 되어 있는 기능을 잘 수행할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자동차의 아레테는 안전하게 잘 달리는 것이고, 토지의 아레테는 비옥한 것이겠지요.

그것이 사람에게 적용될 때는 사람 구실을 할 줄 아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사람 구실이 뭐냐는 질문은 일의적으로 답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다양한 상황에 맞는 적절한 행동일 테니까요. 그래도 그리스 사람들은 사람의 아레테가 실현되는 몇 가지 방식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지나치게 부족하거나 과도하지 않아야 하고(適度), 조화로워야 하고(均衡), 경우에 맞아야 하고(適合性), 진실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행동을 이 척도에 자꾸 비춰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델피 신전에는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가 적혀 있었다고 하지요? 결국 사람의 아레테는 자기를 아는 데서 얻어지는 가치라는 뜻이겠지요.

 

 

아레테의 반대말은 ‘카키아(kakia)’입니다. ‘나쁜 상태’를 이르는 말이지요. 자동차의 카키아는 자꾸 고장이 나는 상태일 것이고, 토지의 카키아는 척박한 상태입니다. 인간의 카키아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마땅한 방식으로 수행하지 못하는 상태일 겁니다. 기독교식으로 말하자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실패한 삶, 즉 죄의 인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삶을 이르는 말이 되겠네요. 죄 혹은 타락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의 말이 떠오릅니다. 그는 독자적으로(original) 태어난 인간이 다른 이들을 모사(copy)하며 사는 것을 일러 타락이라 했습니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오늘의 세계는 우리를 끊임없이 타락의 길로 밀어 넣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마찬가지로 르네 지라르는 우리의 욕망이 주체적이지 못함을 정치한 언어로 밝혀낸 바 있습니다. 그는 욕망의 주체와 대상 사이에 한 가지를 더 상정했습니다. 욕망의 매개가 그것입니다. 내가 뭔가를 소유하고 싶다고 느끼는 것은 그것이 꼭 필요해서라기보다는 나의 욕망을 자극하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상업 광고만 생각해 보아도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일처럼 허망한 노릇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타자의 욕망에 사로잡힐수록 주체는 점점 부자유한 상황에 빠져들게 됩니다.

오스트리아 작가이면서도 나치에 협력했던 조국을 너무나 미워했던 소설가 토마스 베른하르트 기억나시지요? 그의 책 《몰락하는 자》를 읽었습니다. 작가는 실존 인물인 천재 피아노 연주자 글렌 굴드를 등장시키고 있지만 허구와 현실을 기묘하게 뒤섞어 놓았습니다. 화자인 ‘나’와 ‘베르트하이머’, 그리고 ‘글렌 굴드’는 잘츠부르크에 있는 모차르테움의 동기생들입니다. 그런데 글렌 굴드와의 만남은 ‘나’와 베르트하이머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뒤바꿔놓고 말았습니다. 둘은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 몇 소절을 듣는 순간 평생을 노력해도 글렌 굴드를 능가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최고의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던 그들이지만 글렌 굴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태산처럼 느껴졌던 것이지요. ‘나’는 아끼던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음악적 재능이라곤 전혀 없었던 어느 교사의 딸에게 주어버리고, 베르트하이머도 음악으로부터 멀어져 아포리즘이나 쓰며 지냅니다. 글렌 굴드에 대한 열등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베르트하이머는 서서히 몰락해갑니다. ‘나’는 다행히 몰락의 길에서 돌아설 수 있었습니다. ‘나’의 고백입니다.

“베르트하이머는 글렌 굴드이길 원했고 호로비츠이길 원했고, 구스타프 말러나 알반 베르크이길 원했어, 절망하지 않으려면 스스로를 유일무이한 존재로 여기고 또 그래야만 하는데 베르트하이머는 그럴 줄 몰랐던 거야, 난 생각했다. 사람은 그 누가 됐든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난 끊임없이 혼잣말로 중얼거렸고 그렇게 함으로써 살아남았다. 베르트하이머한테는 그런 정신적 지주가 없었다. 즉 자신을 유일무이한 존재로 바라볼 생각조차 못 했던 건 그런 조건을 조금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야, 모든 사람은 유일무이하며 그 자체만 놓고 본다면 인간은 유례가 없는 최고의 예술 작품이야, 라고 난 생각했다. 베르트하이머에게는 그런 생각을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항상 글렌 굴드이기를 원했거나 구스타프 말러나 모차르트 혹은 다른 친구들이기를 원했던 거야, 난 생각했다”(토마스 베른하르트, 《몰락하는 자》, 문학동네, p.91ff).

‘사람은 그 누가 됐든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인식이 ‘나’를 일으켜 세워주었습니다. 다른 이의 재능이나 삶의 조건을 부러워하기보다는 자기의 한계를 받아들이되 자기답게 사는 것이 곧 용기이고 지혜일 겁니다. 마치 블랙홀처럼 우리에게서 여백을 빨아들이는 현실에 저항하기 위해서라도 아름다움 앞에 자꾸만 서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에베소서 2:10)라는 말씀을 꼭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곧 입춘이 다가옵니다. 겨울 같은 세상지만 늘 봄소식처럼 다가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평안을 빕니다. 안녕히 계세요.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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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을 그리워하는 까닭

김기석의 '하늘, , 사람 이야기'(5)

설산을 그리워하는 까닭

 

그 동안 잘 지내고 계셨는지요? 대한大寒이 지났는데도 겨울답지 않게 날이 포근합니다. 몸을 옹송그리지 않아도 되니 좋기는 하지만, 마치 누군가에게 겨울을 빼앗긴 것 같은 이상한 상실감이 느껴지기도 하는 나날입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안나푸르나를 떠올리는 것은 후텁지근한 일상에 지쳤기 때문일 겁니다. 눈이 내리면 산에 한번 다녀와야겠습니다. 흰 눈에 덮인 산정은 시원의 신비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 계곡에서 맞이하는 찬 바람은 제 느른한 일상을 내리치는 죽비입니다. 추위를 즐기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겨울 산을 참 좋아합니다. 잎을 떨 군 채 겨울 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하는 나무의 허허로움과 그 차가운 바위에 마음이 끌리기 때문일 겁니다. 아내와 겨울 산을 헤맬 때마다 떠오르던 노래가 있습니다. 이원수 선생님이 가사를 쓴 <나무야 나무야>입니다.

나무야 나무야 겨울 나무야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찾지 않는 추운 겨울을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

평생을 살아봐도 늘 한 자리
넓은 세상 얘기도 바람께 듣고
꽃 피는 봄 여름 생각하면서
나무는 휘파람만 불고 있구나

다른 기억력은 부실하면서도 노래 가사만큼은 신묘할 만큼 잘 외우는 아내에게 가사를 자꾸 틀리게 부른다고 지청구를 듣곤 했습니다. 저는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구나로 불렀고, ‘넓은 세상 얘기도 바람께 듣고넓은 세상 얘기는 바람께 듣고로 불렀습니다. 어떻게 똑같은 대목을 늘 틀릴 수 있느냐는 책망에 그래도 일관성은 있지 않냐며 부르대다가 눈 흘김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아내가 발목 수술을 받은 후 온전히 회복되지 않아 겨울 산행은 이제 그림의 떡이 되었습니다. 아이젠 없이도 마치 제집 안마당을 걷듯 편안하게 산행하던 시절은 영겁의 저편처럼 아득하게만 여겨집니다.

세상 어디를 둘러보아도 마음 둘 곳이 마땅치 않습니다. 요구받는 일이 많아질수록 일에 쏟는 열정과 정성은 줄어들기만 합니다. 이러다가 구도의 길에서 일탈하여 피상성 속에 갇힌 수인이 되는 것은 아닌가 싶어 정신이 아뜩해지기도 합니다. 며칠 전 프란체스코 교정의 필리핀 방문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딜 가나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하더군요. 세상 어디서나 참 사람을 그리는 이들이 많다는 뜻일 겁니다. 교종은 마닐라에 있는 가톨릭 대학에서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12살 소녀 글리젤레 팔로마의 질문에 그만 말문이 막혔다고 하더군요.

가정이 해체되어 길거리에서 살다가 얼마 전에 교회가 마련한 시설에서 살고 있는 소녀는 울먹이는 음성으로 교종에게 물었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마약과 성매매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왜 신은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지요?” 프란체스코는 한동안 말을 잇질 못했다고 합니다. 그럴 수밖에요. 신산스러운 삶의 경험이 없었다면, 자신의 몸에 새겨진 모멸감의 기억이 없다면 이런 질문이 나올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교종은 그 아픔을 알아차렸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소녀가 고대하고 있는 답을 제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답 없는 삶을 살아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했던 것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울어줄 수 있는 마음, 함께 슬퍼할 줄 아는 마음 말입니다. 이 마음이 없어 세상은 지옥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눈물을 쏟지는 않았지만 그렁그렁한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던 프란체스코의 눈길이야말로 사람들의 시린 마음을 감싸는 외투였을 겁니다.

딱딱한 것은 죽음에 가깝고 부드러운 것은 생명에 가깝다지요? 이 세상의 굳어짐을 풀어내는 것이야말로 종교의 사명이 아닐까요? 문제는 종교가 가르고 나누는 일을 본령처럼 여긴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얼마 전부터 예수의 사역을 빗금 철폐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어떤 사회든지 빗금을 만드는 일을 다반사로 여기는 이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예수가 살던 사회적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대인/이방인’, ‘남자/여자’, ‘거룩/속됨’, ‘의인/죄인’, ‘부자/빈자’, ‘/’, ‘/등이 구분되었습니다. 빗금의 이편과 저편에 따라 우리그들이 갈라지고 그러한 구별은 타자에 대한 배제로 이어집니다. 예수는 관습이 만들어놓은 그러한 경계선을 가로지르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백안시하며 살던 사람들이 서로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도록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도래하는 것이겠지요.

좌든 우든, 진보든 보수든 사람들을 어떤 규정성 속에 가두는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을 만나면 참 불편합니다. 다가가 말을 건네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해 보려는 노력도 없이, 함부로 조롱하고 멸시하고 타매하는 것은 좀 문제 아닌가요? 나의 기준을 미리 정해놓고 그 기준에 부합하는지 여부에 따라 네 편 내 편을 가르는 만용이 빚어낼 세상은 끔찍하기만 합니다. 저는 흑과 백으로 갈리는 세상보다는 차라리 회색빛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문제는 빗금을 철폐해야 할 종교가 빗금을 생산하는 공장 구실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개신교회가 보이는 배타성은 확고한 믿음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은 내적 부실함을 가리려는 가련한 몸부림이 아닌가요? 자신들의 비릿한 욕망을 종교의 망토로 가리려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프리드리히 폰 실러의 희곡 <도적떼>의 등장 인물인 카를은 기독교인의 위선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인간이 어쩌면 저렇게 눈멀 수 있단 말인가? 형제의 흠을 찾아내는 데는 아르고스의 백 개의 눈을 가진 자가 자신에 대해서는 어떻게 저렇듯 완전히 눈멀 수 있단 말이냐? 저자들은 구름 위에 서서 사람들에게 온유하고 너그러우라고 호통을 치면서, 자신들은 불꽃을 휘두르는 몰록처럼 사람들을 하느님에게 제물로 바치고 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설교하면서, 팔순의 눈먼 노인은 문밖으로 내쫒는 족속들이다. 탐욕 부리지 말라고 아우성치면서, 금붙이에 눈이 멀어 페루인들을 말살시키고 이교도들에게 짐승처럼 수레를 끌게 한다(프리드리히 폰 실러, <도적떼>, 열린책들, 김인순 옮김, p.119).

카를의 말은 장군죽비처럼 우리 영혼을 후려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구절을 노엽게만 생각할 게 아니라 성찰을 위한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지금 제가 눈 덮인 설산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곳에 올라 오욕으로 얼룩진 말들을 버리고 청정한 침묵을 채우고 싶기 때문입니다. 흐트러진 마음을 도스르고 싶기 때문입니다. 된비알을 허위단심으로 오르는 동안 숨이 깊어졌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뭘 하든 철저하게 밀고 나가지 못하고 반거충이로 살아온 세월이 부끄럽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시면서 제가 길을 잃지 않도록 이정표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눈 쌓인 응달에 서 있는 나무가 새삼 위대해 보이는 나날입니다. 내내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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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페우스의 노래

김기석의 하늘, , 사람 이야기(4) 

오르페우스의 노래

 

소한 추위가 지나더니 날이 제법 푸근합니다. 건물 사이로 히뜩히뜩 머리에 눈을 이고 있는 산이 보입니다. 마치 시원의 그리움처럼 내 속에서 뭔가가 꿈틀합니다. 지척에 두고도 가지 못하는 고향 같습니다. 겨울, 따뜻한 실내에 오래 머물러 몸과 마음이 느른할 때면 눈 덮인 평원을 헤매던 닥터 지바고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바리키노에 있던 얼음집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을까요? 라라와 머물던 그 집에서 유리 지바고는 시를 썼지요. 창 밖에는 늑대 무리가 우우 울고, 유리창에는 성에가 낀 그 집에서 그는 촛불을 밝혀놓고 언 손을 호호 불어 녹이며 라라에 대한 사랑 노래를 지었습니다. 젊은 날 그 장면 하나가 제 마음에 콕 박혔습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그런 차가운 고독과 열정을 버무리는 것임을 어렴풋이 짐작했던 것일까요?

1970년대 후반에 제가 다니던 신학교의 학장이셨던 윤성범 박사님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사모님은 가족들과 상의한 후 교수님의 책을 학교 도서관에 기증하기로 하셨고, 당시 문예 부장이던 저는 그 책을 학교로 옮겨오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홍제동인가에 있던 그 이층집은 참 아담하고 소박했습니다. 한 겨울이어서였을까요? 선생님의 이층 서재는 오싹할 정도의 한기가 느껴졌습니다. 한 뛰어난 신학자의 정신이 빚어진 그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다소 감동적이었지만 시린 손을 주체하기 어려웠습니다.

아래층에서 차를 한 잔 끓여가지고 올라오신 사모님께서 춥죠?” 하고 물으셨을 때 철없는 저는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사모님은 쓸쓸한 표정을 지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은 평생 불기 없는 서재에서 공부하셨어요.” , 그건 충격이었습니다. 가슴은 따뜻하게 하되 머리는 차갑게 하라는 옛 어른들의 가르침 때문이었을까요? 교수님은 선비셨던 것입니다. 자그마한 몸집에 베레모를 눌러쓰고 다니시던 선생님은 가끔 창고 같은 가건물에 있던 탁구장에 들러 학생들과 탁구를 치시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가식 없고 허물없던 분인데, 학문에 대한 열정은 그렇게도 엄정하셨다는 사실이 참 고마웠습니다. 결곡한 태도로 살아가던 그런 선생님들이 한 분 두 분 떠나시고 안 계셔서 세상은 더욱 빈곤해진 것 같습니다.

가끔 겨울에 제 사무실을 찾아오는 이들은 조금 당황스러워 합니다. 실내 기온이 좀 낮기 때문입니다. 사무실에서도 점퍼를 입고 목도리를 두른 채 일을 하니 좀 불편한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쩝니까? 홀로 지내는 공간을 따뜻하게 유지하는 게 죄스럽게 느껴지니 말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앞에서 말한 그 두 에피소드의 영향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바고나 돌아가신 선생님의 그 냉열(冷熱)한 태도를 내면화하지는 못했지만 흉내라도 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제 마음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갈수록 그 엄정함과 서늘함으로부터 점점 멀어진 채 순치된 동물처럼 세상에 적응하고 살아가는 제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마음이 아뜩해집니다.

조금 지친 듯한 느낌입니다. 삶이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도시는 끊임없이 우리를 삿된 욕망의 벌판으로 몰아댑니다. 자유는 없습니다. 스스로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할 가능성이 주어지지 않으니 말입니다. 욕망의 지배를 허락하는 순간부터 우리 지성과 감성과 의지는 썩은 겨릅대처럼 허물어지고 맙니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사막으로 들어갔던 초기 교부들의 마음을 알 것도 같습니다. 로마에 살던 귀족들의 타락한 실상을 보고는 수비아코의 동굴 속에 들어가 여러 해 기도에 정진했던 베네딕도의 마음이 어렴풋이 헤아려지기도 합니다. 7세기에 콘스탄티노플에서 활동했던 고백자 막시무스의 말도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욕망이 강해지면, 지성은 잠자는 동안에도 정욕적인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들을 상상합니다. 도발하는 힘이 강해지면, 지성은 두려움을 초래하는 것들을 상상합니다. 더러운 마귀들은 우리의 태만함 안에서 힘을 얻어 정념들을 자극하고 강화합니다. 그러나 거룩한 천사들은 우리로 하여금 덕을 행하게 함으로써 정념들을 연약하게 만듭니다”(필로칼리아·2, 116).

영적인 길을 걷는 사람들 중에는 정념에 물든 생각들을 거부하기만 하는 사람이 있고, 정념들 자체를 완전히 잘라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생각들은 시편 낭송이나 기도, 정신을 하나님께로 들어 올림, 또는 비슷한 방법으로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물리칩니다. 정념들은 그것들이 발생한 근원이 되는 사물들로부터 적절히 이탈함을 통해서 근절됩니다”(필로칼리아·2, 168).

막시무스는 우리의 정념들을 자극하고 강화하는 것을 일러 더러운 마귀들이라 하는군요. 소비 사회의 볼모가 되어 살고 있는 이들은 이 말을 매우 불쾌하게 받아들일 겁니다. 사실 욕망의 천국은 얼마나 휘황하고 자극적이고 아름답습니까? 저는 요즘 녹화를 위해 방송국에 오갈 때마다 현대 백화점을 통과하곤 합니다. 즐비하게 진열된 물건들 사이를 걷는 동안 제 시선을 잡아채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19세기 파리의 아케이드를 걷는 이들의 심정이 저와 같았을 겁니다. 소비의 낙원은 참 매혹적입니다. 돈만 넉넉하다면 사고 싶은 것들이 정말 많습니다. 물론 그것이 꼭 필요해서는 아닙니다. 상품은 존재 그 자체로 우리 속에 결핍감을 만들어냅니다. 그 결핍감을 채우기 위해 사람들은 돈을 필요로 하고, 돈을 벌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노래로 뱃사람들을 유혹했던 마녀 세이렌이 떠오릅니다.

세이렌은 상반신은 여자이고 하반신은 새 모양을 한 바다 요정입니다. 스킬라의 바위 섬들 사이에 있는 어느 벼랑 위에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곤 했습니다. 그 노랫소리에 홀린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세이렌의 유혹에 저항하는 방식은 둘입니다. 세이렌의 노래를 꼭 듣고 싶었던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는 부하 선원들에게 몇 가지 지시를 합니다. 자기를 돛에 묶은 후 협곡을 다 빠져나가기 전까지는 아무리 애원하더라도 절대로 풀어주지 말라는 것과 뱃머리를 섬 쪽으로 돌리지 말고 곧장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선원들의 귀에 밀랍을 채워 넣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의 노랫소리를 들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짜릿하지만 오금이 저린 방식입니다.

또 다른 예는 아르고호를 타고 금양모피를 구하러 모험에 나섰던 이아손의 경우입니다. 그는 키론의 충고대로 자기 배에 오르페우스를 태웁니다. 세이렌의 협곡을 지날 무렵 오르페우스는 리라를 꺼내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노래는 세이렌의 노래보다 더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사람들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유혹의 노래를 이길 힘은 그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를 듣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려면 내면을 깨끗이 비워야 합니다. 비운 자리에 울림이 깃들게 마련이니 말입니다. 혹한의 추위 속에서 유리 지바고가 쓴 시는 누군가의 가슴에 해바라기를 피웠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누구의 가슴에서 꽃으로 피어날까요? 이런 생각이 서리병아리처럼 살아가고 있는 저를 일으켜 찬바람 앞에 세웁니다. 그곳에도 찬바람이 많이 불지요? 그 바람 앞에 설 때마다 제 이름을 불러주십시오. 지르된 처지이긴 하지만 거짓되지는 말아야 하니 말입니다. 눈비음에 지친 삶에 늘 진실의 전망을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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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저문 빛이라도 있으니

김기석의 하늘, , 사람 이야기(3)

 

해 저문 빛이라도 있으니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참을 찾기 위해 늘 고투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느슨해졌던 제 마음을 바루곤 합니다. 평안함에 익숙해진 몸과 마음을 자꾸 도스르지 않으면 수도자들의 아케디아’(懶怠)에 빠지게 마련이니 말입니다. 조금 나이가 든 탓일까요? 요즘처럼 추워 몸을 웅크리고 지낼 때면 어린 시절 쩡쩡 소리를 내며 갈라지던 얼음의 울음소리가 떠오릅니다. 그 소리의 부추김으로 생각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유년 시절에 당도하기도 합니다.

 

채워놓은 논물이 얼면 그곳은 아이들의 운동장이 되었습니다. 얼음판 위에서 팽이도 돌리고, 앉은뱅이 썰매도 지치고, 조금 커서는 외발 썰매로 멋을 부리곤 하던 벗들이 떠오릅니다. 얇은 얼음이 꺼져 빠지기도 했는데, 젖은 양말을 말린답시고 논두렁에 불을 놓았다가 나이론 양말을 호로록 태우기도 다반사였습니다. 솔가지를 꺾어들고 산이나 마을로 향하는 불길을 두드려 끄기도 했습니다. 동네 형들은 속을 파낸 메주콩 속에 청산가리를 채워넣은 후 그것을 눈밭 위에 던져두기도 했습니다. 꿩을 잡기 위해서였지요. 오랜 기다림 끝에 꿩이 그 콩을 먹은 게 확인되면 꿩이 날아갔음직한 방향을 향해 죽어라고 뛰어가던 광경이 지금도 선합니다.

 

참 대책 없는 사냥법이었습니다. 긴긴 겨울, 아버지가 건넌방에서 왕골자리나 봄에 쓸 가마니를 짜시면 심심한 아이들은 지푸라기를 골라 드리며 일손을 보태기도 했습니다. 동네 어른들은 가끔 날을 잡아 꽁꽁 얼어붙은 마을 둠벙의 얼음을 깨고 물을 퍼낸 후 뻘흙 속에서 쉬고 있던 물방개며 미꾸라지 붕어 등속을 잡아 동네 잔치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저녁이면 식구들이 뜨근뜨근한 아랫목에 둘러 앉아 이불 속에 발을 뻗고는 이야기 꽃을 피웠습니다.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라도 늘 새롭게 듣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화롯불에 밤을 구어주시기도 하셨고, 삼각형 인두로 화롯불을 정돈하시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이 풍경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떠나온 것일까요? 입성도 나아졌고 먹을 것도 지천이지만 마음은 흥뚱항뚱 떠 있습니다. 흔연한 생각은 들지 않고 늘 초조합니다. 아이들은 더 이상 차가운 눈밭 위를 뒹굴지 않고, 시골 어른들도 둠벙을 뒤지지 않습니다. 저마다 바쁜 탓에 서로의 기색을 살필 여유조차 없습니다. 우리 삶은 이야기가 되지 못하고 반복되는 일상은 권태로 이어집니다. 그 권태로움을 잊기 위해 자극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세상에 길들여지지 않겠다던 젊은 시절의 호기로움은 어디가고 하루하루 그저 별일 없이지나가기를 바라는 남루한 영혼만 남았습니다.

 

객쩍은 소리를 한다고 꾸중하실까 염려되기도 하지만, 이런 소리라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기억 때문일 겁니다. 우리의 경험세계가 마을을 넘기 어렵던 시절의 삶과 지구 전체가 한 마을처럼 인식되고 있는 오늘의 삶이 같을 수는 없겠습니다. 경험세계의 확장이 인식과 공감의 확장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의구심을 빚는 현실이 문제라면 문제일 것입니다.

 

며칠 전 신문에서 독일 극우파들의 이슬람 배척시위에 반대하는 맞불시위가 여러 도시에서 펼쳐졌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인종주의와 외국인혐오주의를 내세우는 극우 포퓰리즘 단체인 페기다’(유럽의 이슬람화에 반대하는 애국적 유럽인들이란 뜻)에 맞서 톨레랑스’(관용)를 외치는 시위였다고 합니다. ‘애국적 유럽인들이라는 말이 목에 가시처럼 걸리네요. 애국을 명분으로 타자에 대한 배척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국가는 그런 이들을 부추겨 국가주의에 저항하는 이들과 싸우도록 만들기도 하지요. 누군가가 애국이라는 말을 선취하는 순간 그들과 생각이 다른 이들은 '비국민'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사회에서 좌파혹은 빨갱이라는 말이 통용되는 장식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타인에게 제멋대로 색깔을 칠하고 그 색을 빌미로 그들을 배척하는 것처럼 비겁한 일이 또 있을까요?

 

유럽의 극우집단들이 외국인, 집시, 무슬림 포비아를 만들어내는 까닭 가운데 하나는 장기 불황으로 경제가 어렵고 직업의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희생양을 찾습니다. 희생양은 언제나 그러하듯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선택됩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신년사에서 국민들에게 마음속에 편견과 냉담, 증오를 지닌 자들이 주도하는 시위에 참여하지 말아달라고 촉구했다지요?(한겨레신문, 201517일자 참고) 가까운 나라 일본에서 번지고 있는 혐한류가 떠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은 점차 다문화사회로 진입하고 있는데 '타자'와 더불어 살기를 거부하는 일이야말로 퇴행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누군가를 미워하고 배척함으로써 자기의 정체성을 구성하려는 태도가 일반화될 때 세상은 전쟁터가 되고 말 것입니다.

 

샤를리 에브도 (출처: sma-lux (http://www.flickr.com/photos/sma_lux))

 

 

17일에 프랑스에서 벌어진 테러 소식을 들으며 마음이 참 무거워졌습니다. 이슬람의 창시자인 무함마드를 조롱하는 만평을 몇 차례 실었던 샤를리 에브도가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을 받아 열 두 명 이상이 희생됐다 합니다. 파리의 도심에서 벌어진 이 사태는 매우 충격적입니다. 까뮈는 일찍이 희곡 <정의의 사람들>을 통해 정의를 세우기 위해 무고한 이들까지도 희생시키는 테러의 정당성에 대해 물은 바가 있습니다. 테러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테러리스트들은 반드시 단죄되어야 합니다. 오랜 세월 인류가 투쟁을 통해 확보해온 언론 자유가 어떤 형태로든 훼손되어서는 안 됩니다. 프랑스 사회는 이 일로 큰 충격을 받았지만 그 때문에 토대가 흔들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이런 일을 계기로 해서 사람들이 무슬림들을 극단적인 테러리스트와 동일시하는 정서가 확산되고, 그 때문에 증오를 선동하는 극우주의자들이 반사이익을 얻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톨레랑스가 철회되고 타자에 대한 의구심이 확산될 때 좋아할 이들은 누구일까요?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일 겁니다. 일부 과격한 폭력분자들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근본주의적 종교는 폭력과 멀지 않습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자기와 다른 이들을 용납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종교학자인 카렌 암스트롱은 십자군의 허무주의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십자군은 자기네 땅에 살고 있던 유대인한테 손을 내밀 생각도 못했고, (자기들보다 훨씬 앞선 문명을 가지고 있었던) 이슬람한테서 배우려는 생각도 못했고, 자기들의 공포와 원한을 다스릴 줄도 몰랐다. 그들은 자기들이 정신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죽이고 망가뜨리고 태우고 모독하고 부수었다. 그 과정에서 자기들의 도덕성을 무너뜨렸다. 아우슈비츠는 그런 의도된 증오가 어떤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지만, 서양인이 계속해서 이슬람을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볼 경우 오류는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마음의 진보, 교양인, 이희재 옮김, 435-6)

 

샤를리 에브도는 시사풍자만화를 내는 출판사라 합니다. ‘풍자諷刺라는 말 속에 이미 찌르다, 나무라다라는 뜻이 담겨 있기는 합니다만, 풍자는 웃음을 무기로 하여 어떤 사람이나 계층이 담보하고 있는 권위에 저항함과 동시에 그들의 악덕과 어리석음을 수정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일 겁니다. 풍자를 풍자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극단주의자들의 경직성은 분명 문제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 풍자를 누군가에 대한 조롱의 수단으로 삼는 것 또한 문제가 아닌가요?

 

조롱은 모든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조롱을 통해 관계가 좋아지는 예는 별로 없습니다. 남에 대한 멸시와 조롱이 일상이 될 때 평화 세상은 멀어지게 마련입니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마태복음 5:22)이라던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풍자와 해학의 순기능을 모르지 않지만, 그 역기능 또한 심각합니다. 풍자가 조롱으로 귀착할 때 문제는 더 심각합니다. 진보적인 사람이든 보수적인 사람이든 서로에 대한 비판은 상관없지만 조롱은 삼가야 합니다. 그것은 또 다른 폭력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불가역적이니 옛날을 그리워해보았자 소용이 없겠지요? 그렇다고 하여 추억조차 무의미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추억이 때로는 오래된 미래를 여는 문이 될 수 도 있으니 말입니다. 오늘도 이런저런 말로 마음을 어지럽혀 드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소한에서 대한으로 넘어가는 이즈음을 두고 농가월령가는 설중雪中의 산봉우리들은 해 저문 빛을 띈다고 노래합니다. 쓸쓸하고 적막하기도 하지만 어떤 따뜻함도 배어 있는 듯합니다. 해 저문 빛이라도 있으니 고맙지요. 제게 그런 빛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안을 빕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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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어루만짐

김기석의 하늘, , 사람 이야기(2)

빛의 어루만짐

새해가 되더니 기온이 제법 차갑습니다. 찬바람 앞에 서는 것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기침을 달고 사는지라 목도리로 목을 잔뜩 감싸지 않으면 그 바람을 반기지도 못하는 신세입니다. 눈길에 다리를 삐끗하여 원단 산행도 거른 채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잘 걷고 계신지요? 눈빛 맑으신 분이니 세상에 가득 찬 신비에 오늘도 놀라고 계시겠지요? 저는 아내가 오디오에 걸어놓은 냉정과 열정 사이음반을 들으며 피렌체나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에 서서 광장 민주주의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고, 우피치 회랑에 서 있던 동상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생각이 나네요. 정신적 거인들이 그리운 시대입니다. 자아의 한계를 끊임없이 돌파하면서 인간의 정신을 한없이 확장하고 심화하려고 고투하던 사람들 말입니다. 신자유주의 시대는 인간을 소비자로 전락시킴으로써 인간 정신을 왜소하게 만든 시대로 기록될 것입니다.

새해를 맞으면서 교우들과 함께 불렀던 <주님의 선하신 권능에 감싸여>(디트리히 본회퍼 작시, 지그프리트 피츠 작곡)의 멜로디가 자꾸만 되뇌어집니다. 지난해에는 많이 외로웠던 것 같습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도 애써 자기 마음을 다독이며 희망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으려는 디트리히 본회퍼의 마음이 느꺼워서 울컥 했습니다.

 그 선한 힘에 고요히 감싸여/그 놀라운 평화를 누리며/나 그대들과 함께 걸어가네/나 그대들과 한 해를 여네/그 선한 힘이 우릴 감싸시니/그 어떤 일에도 희망 가득/주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셔/하루 또 하루가 늘 새로워.”

 그대라 호명할 수 있는 이들이 있다면 춥고 쓸쓸한 인생의 계절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겠지요?

젊은 날에는 의지만 있으면 외로움쯤은 우격다짐으로 몰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의지로는 해결될 수 없는 근원적 쓸쓸함이 있음을 실감하며 지냅니다. 신학자들은 인간이 무로부터 창조되었기에 무에의 끌림이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가끔은 깊이를 알 수 없는 허구렁에 깊이 빠져들기도 합니다. 스스로는 그곳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다정하게 호명해 줄 때 그 허구렁은 슬그머니 뒷걸음질 쳐 물러나더군요. 인간은 서로 함께 존재가 맞습니다. ‘없이는 도 없다는 것이지요.

옛날에는 로마서를 읽을 때 신학적인 문제에 집중해서 보았다면 이제는 16장에 나오는 바울의 인사말에 더욱 마음이 갑니다. 바울은 각지에서 만난 인연들을 떠올리며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호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기억이라는 우주에 점점이 박혀 있는 별자리들인 셈입니다. 그 별들이 없었다면 아무리 믿음이 좋은 바울이라 해도 길을 잃거나 낙심했을지도 모릅니다. 있음 그 자체로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장소는 풍경이 아름다운 곳도 있지만, 대개는 누군가와 인연이 맺어졌던 장소일 때가 많습니다. 지속적이고 의식적인 인연도 그렇지만 스치듯 만난 인연도 우리 내면에 어떤 형태로든 흔적을 남기게 마련입니다. 오래 전 영국의 브리스톨 바닷가를 산책하다가 고적하고 쓸쓸한 바다 풍경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enjoy your view!’라고 외치고 가더군요. 그 순간 그 풍경은 그의 말과 더불어 제 기억 속에 확고히 새겨졌습니다. 그곳의 거리와 집들까지도 또렷이 기억납니다.

지금이란 지나간 것의 가장 내밀한 이미지라고 말한 것이 발터 벤야민이지요? 우리의 경험 세계는 순간적인 것, 우연적인 것, 소멸하는 것들을 통해 구성됩니다. 그 순간을 소홀히 할 때 인간의 시간은 미끄러져 사라지고 맙니다. 시인 혹은 작가들은 보통 사람들의 의식에는 좀처럼 포착되지 않는 순간들을 또렷이 자각하고 그것을 언어로 혹은 형상으로 구현해내는 사람들이겠지요? 좋은 작품은 우리 삶이 초점에서 벗어난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해줍니다. 일상의 분주한 흐름 속에서 잃어버렸던 경이의 감정 앞에 우리를 세우는 것이지요. 고통과 슬픔, 권태와 허무를 동반하는 일상 속에서 간혹 만나는 성스러운 순간들이야말로 우리 삶을 빛나게 해줍니다.

 

 

몇 해 전 비가 오는 날 저는 짤츠부르크의 카푸친 수도회 장원을 홀로 걸은 적이 있습니다. 아래로는 짤자흐 강이 흐르고 강 건너편 언덕 위에는 구름 속에 드러난 성이 신비롭게 보였습니다. 아무도 없는 장원의 숲길을 걷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또렷이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여행자로서의 외로움이 아니라 생의 근원적 쓸쓸함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혔던 것 같습니다. 장원을 한 바퀴 돌아 수도원 교회에 이르렀을 때 다리쉼도 할 겸 문을 열고 들어섰습니다. 작고 소박한 예배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그곳에서 아름답고 영롱한 음악 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오르겔 연주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연주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온 마음을 담아 연주를 하고 있음이 분명했습니다. 바흐의 푸가였습니다. 연주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숨소리조차 죽인 채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차분하게 번겨가는 오르겔 소리와 내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위안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중세기의 가장 뛰어난 여성 신학자 중 하나였던 힐데가르트 폰 빙엔의 시구가 떠올랐습니다. “그렇지만 내 빛이 너를 만지니, 그 빛은 너의 깊숙한 존재에 가 닿는다.” 그제서야 알았습니다. 그것이 빛의 어루만짐이었음을.

우리도 누군가를 어루만지는 빛으로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의도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다만 우리 속의 빛이 어둡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객적은 말로 시간을 허비하게 한 것이 아닌지 저어되긴 합니다만 그래도 너그럽게 받아주시는 그 넉넉한 우정을 믿기에 이런 서신을 올립니다. 인간 세상에 사는 동안 어려움이 없기를 바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처구니없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고통의 시간이 다가올 때마다 누구보다 살갑게 대해주시고, 함께 비를 맞는 마음으로 곁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나라 사람 임회는 적에게 쫓길 때 자기 관직의 상징인 옥()을 버리고 등에 어린 아이를 데려갔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의 처사를 궁금해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옥과 관직에 대한 나의 매듭은 이익의 매듭이었고, 아이와의 매듭은 도의 매듭이었다! 이익으로 맺어졌을 때는 재난이 오면 우정은 녹아 사라진다. 도로 맺어졌을 때는 재난에 의해서 우정이 완전해진다. 어진 사람의 우정은 물과 같이 담백하다. 소인의 우정은 단술처럼 달콤하다. 그러나 어진 사람의 담백함은 진정한 사랑을 가져오고 소인들의 달콤한 사귐은 미움으로 끝난다”(20, 山木, 5, 토마스 머튼, 장자의 길중에서).

우리의 우정은 도의 매듭인 거 맞지요? 그렇게 되도록 저도 애쓰겠습니다. 하루 하루 걷는 길이 그분의 중심을 향한 순례가 되기를 빌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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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김기석의 하늘, , 사람 이야기(1)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평안하신지요?

 

아직 동이 트기 전이라 사위가 고요합니다. 건너편 아파트를 바라보니 불이 밝혀진 집이 많지 않습니다. 혼곤한 잠에 빠져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왠지 가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지 알기에 그런 마음이 드는 것 같습니다. 착한 잠을 자고 나면 새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웃으시겠지만 이런 꿈을 꾸게 된 것은 김기택 시인의 아기는 있는 힘을 다하여 잔다라는 시를 읽은 후부터입니다. 있는 힘을 다하여 잔다니요? 늦장가를 간 시인은 선물처럼 자기 가정에 찾아온 아기를 보면서 신비가가 된 것일까요? 시인은 달게 자고 난 아기가 마치 하룻밤에 이 세상을 다 살아버리고 다시 태어나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남김없이 잠을 비운 아기가 아침 햇빛을 받아 환하게 깨어난다. 밤 사이 훌쩍 자란 풀잎 같이 이불을 차고 일어난다. 밤새도록 잠에 씻기어 맑은 얼굴, 웃음 말고는 다 잊어버린 얼굴이 한들거린다. 풀잎 위에 맺힌 이슬은 아기의 목구멍에서 굴러 나와 아침 공기를 낭랑하게 울린다.”

 

, ‘남김없이 잠을 비운 아기라는 구절이 마치 아득한 시원을 가리키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는 언제 그런 잠을 누렸던가요? 자고 일어나도 늘 찌뿌드드한 것은 비워야 할 잠을 말끔히 비우지 못한 때문임을 알겠습니다. 비워야 할 것을 비우지 못하는 것은 묵은 때처럼 우리 몸의 일부가 되어버린 염려와 근심 때문일까요? 시간 속을 바장이는 동안 우리 속은 이미 까맣게 타버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하나 둘 아파트 창문에 불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밝음과 어둠이 자리를 바꾸기 전, 이 잿빛 시간을 저는 참 좋아합니다.

 

 

 

 

성탄절이 지났습니다. 일 년 내내 죽음이 예기되는 땅에서 살아온 이들은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것도 저어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아직 애도의 시간을 살고 있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의 숨죽인 울음소리가 이 땅 곳곳에 배어들고 있는데, 어떻게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가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 마음이 참 고마웠습니다. 나와 무관하다 하여 참담한 현실을 외면해 버리지 않는 이들의 존재야말로 새로운 세상의 그루터기일 겁니다.

 

하늘의 영광과 땅의 평화를 노래하던 천사들의 노랫소리가 잦아들기도 전에 우리는 비명소리를 듣습니다. 자기 안위를 위해 무고한 영아들을 학살한 헤롯의 시간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생활고를 비관한 한 가장이 세상을 버렸다는 소식도 들려오고, 부당 해고에 맞서기 위해 오체투지로 겨울 거리를 달구다가 방패 앞에서 멈춰선 이들도 있습니다. 굴뚝이나 전광판에 올라 함께 살고 싶다고 외칠 수밖에 없는 사람들, 삶의 터전에서 밀려나고 있는 밀양이나 강정 사람들, 그리고 골프장 건설로 몸살을 앓고 있는 산하의 피울음도 헤롯의 시간이 빚어내는 살풍경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가끔 세상에 희망이 있냐?’고 묻는 이들을 만날 때마다 그 질문 속에 담긴 좌절과 무기력이 느껴져 안쓰럽습니다. 그러나 희망은 우리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그들도 알고 있을 겁니다. 루쉰은 길이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걸으면서 생긴다고 했지요? 옳은 말입니다. 희망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정글도를 들고 덩굴숲을 헤치고 나가는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마치 베어진 풀과 나무의 상처에서 피어나는 상큼한 향을 맡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길을 만드는 이들에게 주어진 선물일까요? 얼음을 깨고 나가는 쇄빙선이 떠오를 때도 있습니다. 쩡쩡 갈라지는 얼음의 파열음이 들리는 듯 합니다. 희망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관념의 감옥에서 벗어나 실천의 벌판에 서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실천의 벌판이 꼭 투쟁의 자리일 필요는 없을 겁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갈라진 세상을 고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또한 희망을 일구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2이사야는 그의 백성들이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 주고,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고,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고, 굶주린 사람에게 먹거리를 나눠 주고,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혀 주고,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을 때에 이 땅에 비쳐 올 빛에 대해 증언합니다.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햇살처럼 비칠 것이며, 네 상처가 빨리 나을 것이다”(이사야 58:7) .

 

빛 혹은 희망이 어떻게 도래하는지를 알 것 같습니다. 이사야는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을 가리켜 갈라진 벽을 고친 왕!’ ‘길거리를 고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한 왕!’이라고 부를 것이라고 말하네요. 이 마음으로 살아야겠지요? 모색하고, 돌진하고,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용기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티쿤 올람’(tikkun olam)이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세상을 고친다는 뜻으로 유대인들이 자녀들에게 제시하는 삶의 목표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 세상보다 내가 떠날 때의 세상이 더 나은 곳이 되도록 하자는 것이지요. 지금의 유대인들이 하는 짓을 보면 이 말의 진정성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지만 목표 자체를 나무랄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삶의 곤고함은 사람들의 시선을 좁아지게 만듭니다. 자기 욕망 주위를 맴도는 동안 점점 작은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먼 데를 바라볼 수 있는 여백만 있어도 눈앞의 일 때문에 시난고난 애끓이지는 않을 겁니다.

 

보들레르는 아름다운 암고양이 펠린의 눈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읽는다고 말했습니다.

 

항상 같은 시간을, 공간처럼 무한하고 엄숙한 시간을, 분으로도 초로도 나누어지지 않은시계 위에도 표시되지 않은 정지된 시간을, 그러나 한숨처럼 가볍고, 깜빡이는 일별처럼 재빠른 시간을.”

 

훼방꾼이 나타나서 너는 시간을 읽느냐?” 하고 물으면 그렇다, 나는 시간을 읽고 있다. 시간은 지금 영원이다!”라고 대답하겠다고 말합니다(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16 시계중에서). 시간 속에서 영원을 보고, 영원 속에서 시간을 볼 수 있다면, 분초 단위로 우리를 몰아대는 시간의 폭력에 맞설 수 있을 겁니다.

 

객적은 말이 많았습니다. 투덜거려도 웃음 띤 얼굴로 들어주시리라는 확신을 핑계삼아 부끄러운 속내를 드러내 본 것입니다. 눈 내린 산길을 하염없이 걷고 싶습니다. 후줄근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찬 기운을 한껏 들이마시고 싶습니다.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외치든 메아리처럼 응답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올 한 해 내내 하나의 중심을 향한 여정이 흥에 겨우시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세요.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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