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충돌? 아니, 원초적 살인의 추억!

  • 좋은글 입니다.

    하나님과 가인과의 대화.

    답을 찾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과정에 충실하라고 하시는것 같습니다.


    Rilke 2015.01.29 04:17

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4)

문명충돌? 아니, 원초적 살인의 추억!

 

1.

<분노의 포도><에덴의 동쪽>을 쓴 존 스타인벡은 이런 말을 했다 한다. 이 열여섯 절[창세기 4:1-16] 시대, 문화, 인종과 상관없는 모든 인류의 역사다.창세기 1장부터 11장이 종족 분화 이전의 얘기임을 그가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글의 성격을 제대로 알고 한 말이다. 아담과 하와 얘기가 그렇듯이 가인과 아벨 얘기 역시 개인 간에 벌어진 사건 얘기가 아니라 인류 전체에 관한 얘기니 말이다.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읽다 보면 이 점을 깜빡 잊고 이 얘길 개인들의 얘기로 읽는 경우는 있지만 말이다. 남들은 몰라도 나는 가끔 그래왔다. 그럴 때마다 아차, 이건 개인 간의 얘기가 아니라 일종의 원형적 이야기(an archetypal story)를 되뇌며 정신을 차리곤 했다.

이 얘긴 무척 압축돼 있다. 그만큼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가 많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읽을 수 없다. 상상력을 발휘해서 빈 공간을 메워 나가지 않으면 읽을 수 없다. 그만큼 이 얘기엔 빈 공간이 많고 설명되지 않은 부분이 널려 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가인과 아벨은 야훼에게 제물 바쳐야 하는 걸 어디서, 누구에게 배웠을까? 아담과 하와는 제물을 바치지 않았다. 왜 야훼는 아벨의 제물은 반겼고 가인의 제물은 반기지 않았을까? 야훼가 자기와 자기 제물을 반겼음을 아벨이 알았단 얘기는 없다. 거긴 관심 없다는 듯이. 그런데 가인은 야훼가 자기와 자기 제물을 반기지 않았음을 어떻게 알았을까? 아벨의 제물은 야훼가 먹어서 제단에서 사라졌고 가인의 제물은 먹지 않아서 제단에 그대로 있었나? 세상에 아담, 하와, 가인, 아벨 말고 또 누가 있다고 가인은 누군가가 자길 죽일까봐 두려워했을까? 그리고 가인의 아내는 어디서 나타난 걸까? 언제부터 살인이 나쁜 일로 여겨졌을까?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주어지기도 전인데 말이다. 어떤 짓은 계명과 상관없이 원초적으로 나쁜 짓으로 인식됐었나?

가인과 아벨 (출처: AK Rockefeller(http://www.flickr.com/photos/akrockefeller))

 

이와 같은 기본적인 질문들에 대해 가인과 아벨 얘기가 아무 대답도 내놓지 않기에 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얘기가 본래는 복잡한 플롯과 디테일을 갖춘 독립된 얘기였는데 구약성서에 들어왔을 때 지금 모양으로 축소, 축약됐다고 추측해왔다. 그렇게 추측할 근거는 충분치 않지만 관습적으로 그래왔다. 일종의 관행이 돼버렸다고 할까. 이 얘기뿐 아니라 전후 연결이 부자연스럽거나 설명 없는 빈 공간이 많은 얘기에게도 같은 추측이 적용됐다. 그런데 이 추측대로 얘기가 다듬어졌다면이해하기 어려운 얘기가 쉬워져야 하는 게 아닐까. 연결도 자연스럽지 않고 읽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다듬어졌다고 할 수 있겠나 말이다. 그러니 달리 생각할 수는 없을까 싶다. 이 얘긴 본래부터 연결이 잘 안 됐고 빈 공간이 많게 의도됐다고. 그래서 읽는 사람이 상상력을 발휘해서 연결 안 되는 부분을 연결하고 빈 공간을 메워가면서 읽게 하려고 저자가 본래부터 의도했다고 말이다. 요즘은 이런 글이 흔하다. 이게 지나치면 안 되지만 정도껏 하면 읽는 재미가 있다. 요즘 저자들도 그런데 옛날 저자라고 그렇게 하지 말란 법 있나. 그런 의도로 글 쓰지 말란 법 있나 말이다. 물론 이 역시 입증할 방법은 없다.

2.

스타인벡의 말이 아니더라도 가인과 아벨 얘기는 꼼꼼히 읽어볼만하다. 그 동안은 짧아서 그런지, 결과가 참혹해서 그런지 거기 도달하는 과정에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경향이 있었으니 말이다. 우선 장황한 해석을 덧붙이지 않고 문장의 뜻만 따져가면서 한 번 읽어보자.

1절은 이렇게 말한다. 아담이 자기 아내 하와와 동침하니 아내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았다. 하와가 말하였다. ‘야훼의 도우심으로 내가 남자 아이를 얻었다.’” 전반부엔 문제가 없다. 우리말로나 영어로나 히브리 원어로나 뜻이 명백하다. 하지만 후반부는 그렇지 않다. 하와는 야훼의 도우심으로 내가 남자 아이를 얻었다.”고 했다. 영어로도 “I have gotten a man with the help of YHWH.로 되어 있어서 별 문제 없어 보이지만 정작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내가 야훼와 더불어(with YHWH) 남자(a man)를 낳았다.가 돼야 한다. 영어와 우리말 번역본은 하와와 야훼가 성관계를 갖는 걸 상상할 수 없어서 도우심으로라는 말을 첨가했지만 원문에는 그런 말이 없다. , 시작부터 곤혹스럽네. 전반부에선 분명 아담이 하와와 동침했다고 했다. ‘동침하다를 표현할 때 구약성서는 알다 to know’라는 동사를 사용한다는 사실이 이젠 제법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왜 후반부에선 아담과 더불어가 아니라 야훼와 더불어일까? 자식은 부모의 결합을 통해 생겨나지만 궁극적으론 야훼의 창조물임을 강조하려는 뜻일까?

2절은 이렇다. 하와는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다.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고 가인은 밭을 가는 농부가 되었다.” 텍스트는 누구와 동침해서 아벨을 낳았고 적시하지 않는다. 시간상으론 아벨이 가인의 아우임이 당연한데 굳이 아벨을 가인의 아우라고 불렀다. 둘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주려 했을까? 그 다음에 둘의 직업을 밝힌다. 여기서 이 얘길 유목문화와 농경문화 사이의 갈등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생겼다. 일종의 문화인류학적 해석인데 과연 이게 둘 사이에 벌어진 기나긴 갈등의 기원을 따지려는 얘길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있다면 그건 텍스트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3절은 세월이 지난 뒤에 가인은 땅에서 거둔 곡식을 야훼께 제물로 바치고라고 했다. ‘세월이 지난 뒤에를 영어성서는 ‘in the course of time’이라고 번역했는데 애매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세월이 얼마나 지났다는 말도 없고 무엇을 하는 중간인지도 밝히지 않으니 말이다.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마지막 날들에 at the end of days’라고 읽어야 한다. 그러니까 농사의 한 사이클이 끝나는 시점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이게 더 그럴듯하지 않은가. 농경문화에서 시간은 순환적(cyclic)이니 말이다. 씨를 뿌릴 때가 있으면 소출을 거둘 때가 있고 우기와 건기가 반복되는 것처럼.

4절과 5절이 문제다. 아벨은 양 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기를 바쳤다. 야훼께서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셨으나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지 않으셨다. 그래서 가인은 몹시 화가 나서 얼굴빛이 달라졌다.” 이 구절에는 많은 이슈들이 있다. 왜 사람은 야훼에게 제물을 바쳤을까? 그걸 어디서 배웠을까? 야훼가 그렇게 명했나, 아니면 본능적으로 그랬나? 부모에게 배웠다는 말도 없다. 양 치는 목자가 양 떼 가운데 맏배의 기름기를 바친 건 당연하다. 밭가는 농부가 땅에서 거둔 곡식을 제물로 바친 게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안 그런가? 그런데 왜 야훼는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반겼고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반기지 않았을까? 그냥 이유 없이 야훼 맘대로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 야훼가 그랬다면 그런 줄 알면 되나? 이래서야 어디 무서워서 야훼에게 제물 바치겠나. 왜 그냥 가인이 바친 제물’, ‘아벨이 바친 제물이라 하지 않고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이라 썼을까? 야훼가 제물을 반겼다는 말과 반기지 않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흔히 반겼다는 말은 야훼가 제물을 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하는데 그럼 왜 받았다고 하지 않고 반겼다고 했을까? 제물을 받다는 말이 구약성서에 흔한데 말이다. 느낌만으로도 전체의 의미가 이 구절에 달려 있다 싶다. 안 그런가? 하지만 이 구절은 얘기 전체에서 가장 구멍이 많은 부분, 따라서 가장 활발하게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6절은 야훼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네가 화를 내느냐? 얼굴빛이 달라지는 까닭이 무엇이냐?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빛이 달라지느냐?’”라고 읽는다. 우리말 성서가 얼굴빛이 달라지는 까닭이 무엇이냐?’로 번역한 말을 영어성서는 ‘why has your countenance fallen?’라고 번역했는데 이는 히브리 원어의 직역이다. 우리말 직역은 왜 얼굴을 떨어뜨렸느냐?’가 되겠다. 곧 야훼가 자기 제물을 반기지 않아서 가인이 얼굴을 떨어뜨렸다는 거다. 고개를 숙였다는 얘긴데 이 말이 뭘 상징하는지는 정확하게 추측하기 어렵다. 분노의 표현일 수도 있고 실망이나 좌절의 표현일 수도 있다. 다음으로 네가 올바른 일을 했으면7절에 나오는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면”(인용한 새번역성서에는 조건절임이 분명히 드러나 있지 않다)이란 조건절도 문제다. ‘올바른 일이나 올바르지 못한 일이 뭘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일반적인 윤리 문제인지 아니면 제물 바치는 것과 관련해서 제기되는 문제인지가 분명치 않다. 마지막 부분의 어찌하여 얼굴빛이 달라지느냐?”는 지나친 의역이다. 히브리 원문에는 올리기또는 치켜 올리기란 뜻을 가진 부정사 한 단어다. 영어성서도 RSV“will you not be accepted?”라고 모호하게 번역했고 JPS“there is uplift”라고 거의 직역했다. 분명한 건 이게 조건절이란 사실이다. 올바른 일이 뭐든 만일 네가 그걸 했다면 고개를 들라는, 또는 들 것이란 얘기다.

7절은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라고 말한다. 첫 문장은 조건문이므로 만일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다면이 정확한 번역이다. 만일 그렇다면 죄가 너의 문에라는 거다. 성서에서 란 말이 여기에 처음 나온다. 여기서 이 대문이나 성문을 가리키는 게 아님은 쉬이 짐작할 수 있다. 그럼 어떤 문일까? 마음의 문? 영혼의 문? 어디가 됐든 문에 도사리고’(또는 웅크리고’) 앉아 있다는 말은 그게 외부에서 누군가를 노리고 있다는 뜻이겠다. 이에 대해 마틴 부버는 죄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그것은 바깥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거다.”라는 말을 했는데 의미가 알쏭달쏭하지만 한 번쯤 생각해볼 말이 아닌가 싶다. 죄가 마음(또는 영혼)의 문 밖에서 성난 개처럼 웅크리고 앉아 물어뜯으려고 노리고 있다. 하지만 가인은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 그런 뜻에서 RSV“you must master it”라고 번역했는데 JPS“you can be its master”이라고 번역함으로써 이와는 약간 다른 뉘앙스를 풍긴다. ‘다스려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라 다스릴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이해하니 말이다.

8절은 가인이 아우 아벨에게 말하였다. ‘우리 들로 나가자.’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였다.”라고 말한다. 여기도 메워야 할 구멍이 있다. 히브리 원문에는 가인이 아우 아벨에게 말하였다.” 다음에 우리 들로 나가자.”라는 말이 없다. 가인이 말은 했지만 내용이 빠진 채 바로 그들이 들에 있을 때로 이어진다. 누가 봐도 말이 안 된다. 뭔가 빠진 게 틀림없다. 그래서 아람어 번역인 타르굼은 이리 오라, 우리 들로 나가자.”라는 말을 집어넣었고 다른 번역본들이 이를 따라갔다. 타르굼이 잘 한 걸까? 그래 보인다. 말을 했는데 내용이 없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으니까. 그런데 혹시 여기에 저자의 의도가 숨어있는 건 아닐까? 결론짓기 전에 꼼꼼히 따져 봐도 늦지 않을 거다. 왜 가인은 아벨을 하필 ’(field)로 데리고 갔을까? 그가 아벨을 왜 쳐 죽였는지도 궁금하고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반기지 않은 건 야훼인데 왜 아벨을 죽였는지도 궁금하기 짝이 없다. 아벨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9절은 야훼께서 가인에게 물으셨다.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읽는다. 여기가 얘기 전체의 의미를 결정짓는 부분이란 느낌이 확 오지 않는가. 앞 장에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듯이 여기서도 야훼는 가인에게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는다. 정말 몰라서 물었을까? 그런 거 같다. 아는데 짐짓 모른 척 묻진 않은 거 같다. 그런데 가인은 알면서도 모른다고 했다. 그것도 짐짓 불쾌하다는 듯이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는 말까지 덧붙이며 말이다. 이 구절은 심리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많은 이슈를 갖고 있다. 그것들을 따지기 전에 거 참 나쁜 놈이네하는 생각이 즉시 들지만 말이다. 그 얘긴 나중에 해보자.

10절은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너의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이다. 클라우스 베스터만은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라는 물음을 성서에 나오는 기념비적인 문장들 중 하나라고 불렀다. 하느님은 불의를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죽은 자, 특히 (억울하게) 살해된 자의 피가 하느님 들으라고 땅에서 울부짖는다는 얘기는 민간신앙에서도 흔하다. 민수기 35:33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온다(“너희가 사는 땅을 더럽히지 말아라. 피가 땅에 떨어지면, 땅이 더러워진다. 피가 떨어진 땅은 피를 흘리게 한 그 살해자의 피가 아니고서는 깨끗하게 되지 않는다.”). 얘기 전체를 통해서 아벨은 한 마디도 말을 안 한다. 설화자는 그에게 목소리를 주지 않는다. 그는 죽어서 비로소 말한다. 정확히는 땅에 쏟아진 그의 가 목소리 높여 하느님께 울부짖는다. 자기 얘길 들어 달라고 말이다.

11절은 이제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다. 땅이 그 입을 벌려서 너의 아우의 피를 너의 손에서 받아 마셨다.”이다. 첫 문장의 뜻이 모호하다. RSV는 우리말 성서처럼 “you are cursed from the ground”라고 번역했는데 JPS“you shall be more cursed than the ground”라고 번역했다. 둘의 뜻은 적지 않게 다른데 히브리 원어는 둘 다 가능하다. 전치사 min’에는 비교급 ‘~보다 than’‘~으로부터 from’ 두 가지 뜻이 다 있다. JPS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한 짓 때문에 땅이 저주받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 구절을 가인이 그때 저주받은 땅보다 더 큰 저주를 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12절은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이제는 너에게 효력을 더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다.”이다. 이젠 가인이 땅을 갈아봐야 헛심만 쓰게 될 뿐이다. 그 결과 그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방랑자가 될 거다. 유목민은 본래 떠도는 사람이지만 농사짓던 자가 떠돌이가 된다니 이런 저주가 어디 있겠나.

13절은 가인이 야훼께 말씀드렸다. ‘이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 무겁습니다.”로 읽는다. 사람을, 그것도 자기 동생을 죽여 놓고 떠돌아다니는 게 너무 무거운 짐이란다. 남의 고통은 작아 보이고 자기 고통은 커 보이는 게 사람이긴 하다. 수백 명의 학생들을 수장해놓고도 얼굴색 하나 안 변하는 사람들도 많은 세상이니 가인을 철면피라고 부르는 건 지나칠 수 있다. 그래도 그가 뻔뻔한 건 부인할 수 없다.

14절은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쫓아내시니 하느님을 뵙지도 못하고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라고 읽는다. 우리말 성서는 둘 다 이 땅이라고 번역했지만 히브리 원어로는 전자는 먼지의 표면으로부터 from the face of the dust’이고 후자는 땅 위에서 on the earth’이다. 전자는 먼지’, ‘티끌을 의미하는 아다마이고 후자는 이란 뜻의 에레쯔. 왜 둘을 구별했을까? J 기자에 따르면 사람은 아다마에서 와서 아다마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존재인데 거기서 추방당했다는 말인가? 누가 가인을 죽이려 한다는 걸까? 글자 그대로 읽으면 세상엔 아담(언제부턴가 무대에서 사라졌다!), 하와, 그리고 가인 밖에 없지 않나! 부모가 자길 죽일 리는 없고 대체 누가 자길 죽일 거라고 이토록 두려워하는가 말이다. 자기는 동생도 죽였으므로 부모도 자길 죽일 수 있다고 두려웠던 걸까? 설마. 또한 그는 왜 가인을 죽이려는 걸까? 보복? 대관절 누가? 보복은 인척이든 친분이든 피살자와 관계있는 사람이 하는 게 아닌가.

15절은 야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절로 벌을 받을 것이다.’ 야훼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라고 적었다. 이건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를 훨씬 뛰어넘는다. 가인을 죽인 자는 일곱 갑절로 벌 받을 거라니, 일곱 명을 죽이겠단 얘긴가? 왜 그래야 하는데? 가인을 이처럼 아낄 거면 왜 야훼는 그와 그의 제물을 반기지 않았을까? 야훼는 애지중지하는(?) 가인에게 표를 찍어주어 그를 보호했단다. 구약학자들은 이 가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두고 머리 싸매고 고민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지만 속 시원한 답은 아직이다.

16절은 가인은 야훼 앞을 떠나서 에덴의 동쪽 놋 땅에서 살았다.”이다. 이 구절 덕분에 스타인벡이 소설을 썼고 엘리아 카잔이 영화를 만들었으며 제임스 딘이 스타가 됐다. 그러니까 가인은 에덴의 동쪽, 야훼가 없는 곳(“야훼 앞을 떠나서”)인 놋에서 야훼 없이 살았단 얘기다. 여기서도 하느님은 무소부재하다는 교리는 어디론가 실종이다.

3.

, 이젠 각 절이 무슨 뜻인지 대충 감이 잡혔을 터이니 이슈들을 살펴보자. 앞에서 이 얘긴 원형적 이야기(archetypal story)라고 했다. 곧 인간세상의 중요한 사건이나 현상의 근원적, 근본적 의미를 다루는 얘기란 뜻이다. 이 얘기에는 농경과 목축, 제사, 살인, , 추방, 하느님을 떠난 삶 등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것들이 갖고 있는 원초적 의미가 뭔지 생각해볼 차례다.

창세기 2, 3장에서처럼 여기서도 하느님은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고 대화를 나눌 정도로 가깝다. 하느님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듯이 여기서도 가인에게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라고 묻는다. 하느님은 살인자 가인에게 벌도 내리지만 두려워 떠는 그를 안심시키기도 한다. 그를 죽이는 자에겐 일곱 갑절로 보복하겠다는 약속도 한다. 그것도 모자라 가인의 몸에 를 찍어줘서 그를 죽이지 못하게 조치한다. 참으로 자애로운 하느님 아닌가! 살인자에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보복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보호해주니 말이다.

하지만 가인에겐 이처럼 자애로운 하나님이 가인의 잠재적 가해자에겐 지나치게 가혹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모든 게 하느님 맘대로인 갑질을 여기서도 하는가? 여기서도 나는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풀고 긍휼을 부어주고 싶은 사람에게는 긍휼을 부어준다.”(출애굽기 19:33)는 유일신의 절대주권이 통하는가?

나는 다신교가 절대대세인 세상에서 특이하게 유일신교를 믿었던 이스라엘이 느꼈을 당혹감에 공감한다. 참 곤란했을 거다. 이해되지 않는 점들도 많았을 거다. 다신교를 믿었다며 문제가 없었을 텐데 유일신교를 믿어서 곤혹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니었을 거다. 모든 게 하느님 맘대로 갑질하는 건 줄 알았지만 그래도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걸 이해해보려고 노력하고 인과관계를 따져보려고 애썼던 그들의 신앙적, 신학적 고뇌에 적지 않게 공감한다.

왜 야훼가 아벨과 그의 제사를 반겼고 가인과 그의 제사는 반기지 않았는지 그들은 알 도리가 없었다. 가인과 아벨은 야훼에게 제사를 드렸다. 제사가 뭔가? 왜 사람은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가? 그게 그들 삶에서 무슨 역할을 했을까? 그걸 통해 어떤 목적을 이루려 했을까? 이에 대해선 무수한 이론이 있지만 결국 제사란 신의 마음을 얻으려는 행위 가운데 하나다. 또한 결과적으론 그걸 통해 신이 누굴 선호하는지가 드러나는 게 제사다. 여기엔 신의 마음을 얻으려는 사람의 노력에 대한 신의 평가와 판단이 관련되어 있고 결과적으로 구별과 차별이 벌어지게 되어 있다. 그 판단의 기준이 뭔지는 전적으로 신에게 달려 있다. 사람은 그게 뭔지 추측할 뿐이다.

가인과 아벨이 야훼에게 제물을 바쳤다. 각각 자기가 거둔 것으로 말이다. 제물의 종류에서 신의 선호와 비선호의 이유를 찾는 것은 옳지 않다. 구약성서에서는 둘 다 적법한 제물이니 말이다. 유목문화와 농경문화의 충돌로 보는 것도 안 맞는다. 이스라엘은 둘 중 하나에 속한 게 아니라 둘 다 경험했다. 그들은 정착생활하기 전엔 반()유목, ()농경생활을 했다. 텍스트가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이라고 표현한 데 지나치게 무게두는 것도 옳지 않다. 제사의 정당성이 궁극적으로 제물의 재료에 달려 있지 않고 그걸 바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음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신이 제물이 뭔지에 좌우될 정도로 어리석다고 여길 멍청한 사람이 과연 있을까.

따라서 야훼가 가인의 제물을 반기지 않았던 건 그를 아벨과 비교, 평가, 판단해서 아벨과 구별한 행위였음에 분명하다.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반기기엔 부족한인물 됨됨이 및 제물로 평가됐는 거다. 그런데 이 판단이 돌이킬 수 없는 최종적인 것이었다면 설화자가 다음 얘길 이어갈 이유가 없었을 거다. 하지만 설화자는 얘길 거기서 끝내지 않고 살인사건과 그 이후의 얘기로 이어갔다. 이것은 제사 수납 여부가 전체의 클라이맥스가 아니란 뜻이다. 정작 하려는 얘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거다. 할 얘기가 더 있다는 말이다.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반기지 않았다는 게 곧 그를 최종적으로 싫어하거나 미워한 건 아닐 수 있다. 막말로 가인이 , 내가 뭘 잘못한 모양이네. 그럼 다시 하지 뭐.’ 할 수도 있었지 않았냐는 거다. 그렇지 않다면 얘길 더 이어갈 이유가 없지 않나 말이다. 안 그런가?.

야훼가 자기와 자기 제물을 반기지 않자 가인은 화가 나서 얼굴을 떨구었다. 이런 그에게 야훼가 묻는다. 왜 화를 내냐고, 왜 얼굴을 떨구냐고. 그 다음에 야훼는 조건문 형식의 두 마디 말을 한다. 만일 네가 올바른 일을 한다면(미완료형) 고개를 들어라! 만일 네가 올바르지 않은 일을 한다면 죄가 네 문에 웅크리고 앉아서 널 다스리려 하는데 너는 그 죄를 다스려야 한다(또는 다스릴 수 있다)! ‘올바른 일이 뭔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일반적인 윤리일 수도 있고 제사를 제대로 드리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야훼가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을 반기지 않은 게 그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결정짓진 않았다는 얘기다. 여전히 그에게 미완료 조건절을 적용하는 걸 보면 아직 그에겐 상황을 바꿀 기회가 있다. 올바로 행한 후에 고개를 들면 된다. 아직 끝이 아니다. 물론 그가 올바르지 않은 일을 한다면 죄라는 사나운 개에 물어뜯길 수 있다. 죄는 마음(영혼) 문에 웅크리고 앉아서 널 물어뜯으려 하니 고개를 들고 그 머리통을 밟아라!

여기에 성서에서 처음으로 란 말이 등장한다. 이를 두고 구약학자들이 얼마나 많은 주장을 내놓았겠나. 그것들을 모두 살피는 건 어차피 불가능하고 몇 가지만 얘기하련다. 우선 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하타의 어원이 과녁을 빗나가다라는 뜻임은 널리 알려져 있다. ‘가르침을 뜻하는 토라과녁을 향하다란 뜻이므로 둘은 대조되는 뜻을 갖는다. 과녁을 향하는 게 토라인데 그걸 빗나가는 게 죄란다. 어원은 그렇고, ‘가 문에서 웅크리고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이미 행해진 게 아니라 행해질 가능성이 있는 뭔가를 가리키는 말로 보는 게 맞겠다. 영어로 ‘culpability’란 말이 여기 딱 맞는다. 그러니까 가인은 제사를 잘못 드려서 죄를 지은 게 아니라 죄지을 가능성에 노출된 거다.

4.

가인은 끝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우를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설화자는 8절에서 가인이 아벨에게 말했다고 하곤 그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이를 아쉬워한 타르굼이 이리 오라, 우리 들로 나가자.”라는 말을 집어넣었다고 했다. 논리적으론 타르굼이 옳다. 얘기의 흐름 상 그래야 했다. 하지만 설화자가 의도적으로 둘 사이에 있어야 할 대화를 빼버렸다고 볼 수는 없을까? 설화자의 머릿속에 들어갈 수 없으니 우린 그의 생각을 알 도리가 없지만 얘기 처음부터 끝까지 가인과 아벨이 한 마디도 대화하지 않는 게 정녕 우연은 아닐 거라고 믿는다. 무대에 등장하는 하느님, 아담, 하와, 가인, 아벨 중 가장 존재감 없는 인물은 아담이고 그 다음이 아벨이다. 둘의 공통점은 한 마디도 말하지 않는다는 거다. 정말 그럴까? 아담의 경우는 그런데 아벨은 아니다! 그는 말을 했다! 죽은 다음이긴 하지만 말이다. 살아 있을 때 가인과 소통하지 않았기에 죽어서 하느님에게 울부짖었다고 볼 수는 없을까? 설화자는 이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둘 사이에 있어야 할 대화를 의도적으로 뺀 게 아닐까?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가?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라는 말은 아벨의 위치뿐 아니라 그의 상황, 둘 사이의 관계까지를 묻는 물음이다. 가인은 모른다고 딱 잡아뗀다. 잡아떼면 하느님이 모를 거라고 생각했을까? 아담과 하와는 숨긴 했지만 거짓말하진 않았다. 그런데 가인은 자기가 살해한 아벨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는 하느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하느님을 그렇게 헐렁한존재로 봤나?

가인은 왜 아벨을 살해했을까? 그에게 무슨 죄가 있나?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을 반기지 않은 건 아벨 아닌 야훼였다. 그런데 그의 분노는 아벨을 향했다. ? 감히 하느님에게 화낼 수 없어서 아벨을 속죄양으로 삼은 걸까? 분노를 쏟을 데를 찾지 못하다가 만만한 아벨에게 퍼부었나? 프로이드는 때론 죄에 대한 인식이 범죄행위를 앞선다고 말했다. 죄의식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동기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가인은 하느님에 대해 신뢰와 증오라는 두 개의 감정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하느님을 믿었지만 자기 제물을 반기지 않아서 그를 미워하게 된 거다. 그래서 그는 증오를 마땅히 하느님에게 쏟아야 했지만 그러기엔 하느님은 너무 강하다. 그래서 하느님을 대체할 존재를 찾아야 했는데 그게 아벨이었다는 거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건 대상을 잘못 찾은 증오심(displaced hatred) 때문이다. 이유 없이 남을 미워할 수 있는데 이때 증오의 대상은 단지 그 증오가 퍼부어질 대상이 있어야 하기에 그에게 퍼부어졌을 수 있다. 아벨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말했을 때 가인은 아우에 대해서 심리적인 장벽을 쌓았다. 이제 아벨은 아우가 아니라 하느님 대신 분노를 받아야 할 대상이 됐다.

그의 무도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퉁명스럽게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말했다. 둘 사이가 이렇게 멀었나? 언제 이렇게 멀어졌을까? 둘은 서로에게 극도로 무관심했나?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관계의 단절 선언이 아닌가. 본래부터 둘 사이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그렇다면 이는 모순이다. 아벨을 아우라고 부르면서 관계없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아우가 뭔가? 그건 관계아닌가. 우리식으로 2촌 관계가 형제관계다. 부모자식 다음으로 가까운 게 형제인데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니! 네가 아니면 누가 지키는데?

이렇게 가인은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었다. 하느님이 창조한 세상에서 나는 너를 지키는 자여야 하고 너는 나를 지키는 자여야 한다. 그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인데 가인은 그걸 부정했다. 굳이 프로이드에 따르지 않더라도 아벨은 가인의 다른 모습임이 어렵지 않게 보인다. 그리고 신은 둘이 함께 투영된 형상(image)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그는 형제를 죽였고(fratricide), 자신을 죽였으며(suicide), 동시에 하느님을 죽였다(deicide). 구약학자들은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유목문화와 농경문화의 충돌이나, 농부 사울(사무엘상 11:5)과 목동 다윗(사무엘상 16:11)의 갈등 등으로 처음부터 갈라놓고 봐왔다. 이 역시 옳지 않다. 텍스트는 둘(또는 하느님과 더불어 셋) 사이의 뗄 수 없는 유대관계를 줄곧 강조한다. ()은 본래부터 남이 아니다. ()이 본래부터 대립적이었다고 보는 건 옳지 않다. ()은 이 사건으로 인해 갈라졌고 관계가 깨졌지만 본래는 그렇지 않았다. 제사가 주된 원인이 아니다. 그게 일련의 사건들을 촉발했지만 제사보다는 살인과 그 후의 책임회피가 관계의 단절을 가져온 거다. 이 상황에서 땅에서 울부짖는 아벨의 피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그건 올바른 관계의 회복을 호소하는 모든 억울한 죽음의 울부짖음이 아닐까?

그 다음엔 시선이 온전히 으로 향한다. 아벨의 피가 에서 야훼에게 울부짖고, 가인이 보다 더 저주를 받을 것인데 그 까닭은 이 그 입을 벌려서 아벨의 피를 가인의 손에서 받아 마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후로는 가인이 밭을 갈아도 이 그에게 효력을 나타내지 않을 것이고 그는 위에서 쉬지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란다. 이에 가인이 엄살을 부리며 자기를 에서 쫓아내니 이제 하나님을 보지도 못하고 이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라고 호소한다. 그렇게 되면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를 죽이려 할 거란다. 이에 야훼는 그에게 일곱 갑절로 복수할 것이고 가인에게 표를 찍어 주어 누구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겠다고 약속한다. 이에 가인은 야훼 앞을 떠나 에덴의 동쪽 놋 에서 살았다는 걸로 얘기가 끝난다.

, , . 부동산 투기 얘기도 아닌데 땅이 너무 많이 나오는 거 아니냐고 불평할 만하다. 땅 투기했다 손해 본 사람은 지겨워서 안 읽고 지나갈 만도 하다. 하지만 땅 투기 얘긴 아니니 염려 마시라.

가인은 아담이 저지른 짓으로 인해 땅이 당한 저주보다 더 큰 저주를 받아야 했다. 아벨의 피가 흐르는 땅은 그에게 소출을 내주지 않을 거다. 가인은 아벨을 죽여 땅 어딘가에 묻었지만 바로 그 때문에 아벨은 어디나 존재하게 됐다. 참 대단한 역설 아닌가! 가인은 아벨을 죽여 무존재로 만들려 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아벨은 온 땅이 울부짖음으로 현존하게 된 거다. 이 때문에 농부 가인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녀야 했다. 어딜 가도 아벨의 울부짖음이 들렸다. 그는 쫓겨나서 하느님 얼굴을 못 보게 됐지만 아벨의 울부짖음은 어디서도 들렸다. 아벨은 울부짖음으로 부활한 거다. 그는 하느님을 향해 울부짖는다. 그래서 사랑받던 자의 울부짖음 때문에 하느님을 졸지도 잠자지도 못한다. 되돌릴 수 없는 상실을 영원히 되새겨 주는 게 이 울부짖음이다. 시편 94편의 시인도 이와 비슷한 맘이었지 싶다.

야훼님, 야훼님은 복수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복수하시는 하느님, 빛으로 나타나십시오…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악인을 치며,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행악자들을 대항할까?
야훼님께서 나를 돕지 아니하셨다면
내 목숨은 벌써 적막한 곳으로 가 버렸을 것이다(1, 16-17절).

가인은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린다. 강박증 환자가 된 거다. 아우를 가차 없이 실해한 그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는 공포에 시달리는 건 또 무슨 아이러니인가. 가인의 방랑은 혼돈(chaos)을 상징한다. ‘계명은 삼라만상을 창조한 하느님과 피조물인 사람 사이에 놓여 있는 다리(bridge). 세상의 질서는 계명을 지킴으로써 유지된다. 계명이 지켜지지 않으면 세상은 태초의 혼돈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담과 하와 때문에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란 얘기(창세기 3:18)와 가인의 방랑이 이걸 상징한다. 하느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결합(창세기 6:2)이 낳은 혼돈과 바벨탑으로 인한 언어의 혼란 역시 계명을 어긴 결과 초래된 혼돈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만일 네(가인)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이라는 조건절이 갖는 무게는 무겁기만 하다. 올바른 일을 하면 이런 혼돈은 벌어지지 않는다.

5.

구약성서 종교는 유일신 종교다. 여럿이 아니라 오직 한 신이 모든 걸 갖고 있고 모든 걸 주관한다고 믿는다. 그에게 권력을 나눠 받을 다른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절대권력자다. 하지만 동시에 유일신 야훼는 사람 없이는 의미가 없는 신이다. 야훼는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구약성서는 이 점을 매우 강조한다. 하느님과 사람의 관계는 철저하게 나와 너 I and Thou’의 관계(마르틴 부버). 성서는 이런 하느님과 사람의 상호성(reciprocity)을 질리게 반복해서 말한다. 사람인 없인 하느님인 는 아무 의미도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둘 다 철저하게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인격이므로 둘의 관계는 나와 그것 I and It’의 관계가 아니다. ‘나와 너의 관계인 거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것도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다. 하느님은 그들을 선택하기로 선택했고 그들은 선택되기로 선택한 것이다(they chose to be chosen)!

하느님의 권위와 힘은 강제력과 구별해야 한다. 하느님의 힘은 사람이 올바르게 행하는지 여부와 뗄 수 없이 관련되어 있다(7). 이럴 때 의존이란 말은 적절하지 않아 보이지만 내용상으론 그렇다. 세상질서는 사람들이 계명을 준수하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그래서 만일 네가 올바르게 행한다면이란 문장이 매우 중요하다. 세상질서가 여기에 기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올바르게 행하도록 가인을 강요하진 않았다. 하느님은 그의 도덕적 결단을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도 않았다. 가인조차 하느님의 정당한 파트너로 존중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하느님의 전능(omnipotence)은 사람과의 끊임없는 소통을 통해 하느님이 할 수 있는 모든 조절과 통제를 포기하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무능(impotence)은 전능(omnipotence)의 한 부분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가인은 아우를 죽이고 추방당해 하느님 없는 땅을 방황했다. 마지막 절은 그가 에덴 동쪽 땅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게 무슨 방랑인가! ‘땅에 정착했다면서! 그런데 이란 말이 히브리어 방랑하다의 언어유희라면 어떤가? 그가 정착해서 방황했고 방황하며 정착했다는 뜻으로 읽어야 할까. 이 얘긴 끝까지 멋을 잃지 않는다!

 

곽건용/나성 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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