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텨라, 버티자

  • 이제 마지막 교육을 받고 사회에 나갈 학생들에게 스승으로서 끝까지 참고 버티자는 말은 맞지 않는것 같다.
    그들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불균형과 노.사 관계의 불평등한 구조체제를 어떻게 바꾸어 나갈지를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식민시대도 아니고, 입에 풀칠하기 어려워 노비로 팔려가는 시기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 하나 20년 세월을 기돈의 불평등과 비인권적인 대우를 참고 견디라고 밤낮 참고 공부한 사람들이 아니니까!

    Linda 2015.06.09 04:22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4)

버텨라, 버티자
(조와(弔蛙), <성서조선> 1942년 3월)

 

‘한 시간에 740만원을 쓸 수 있는’ 사람이기에 주차요원을 꿇릴 수 있는 정당성이 있다던 ‘백화점 모녀’마저 사회정의를 외치는 시절이다. 세상을 바로잡고 싶었단다. 한참 동면 중인 ‘개구리’도 들었다면 웃을 이야기다. 그들이 ‘바로 잡고’ 싶은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현재의 사회적 배치 속에서 VIP(아주 중요한 사람)로 자리한 사람에게는 무한 존경과 절대 복종을 표시하는 사회, 그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바른’ 사회였을까? 어른을 공경하는 법을 가르치고 싶었다는데, 그랬다면 740만원 씀씀이나 남편의 권력에 대한 언급은 불필요했을 일이다. ‘내 남편 한 마디면 너희들 다 잘려!’가 어찌 인간 사이의 바른 관계성을 만들 수 있는 선언일까!

 

세상이 온통 꽁꽁 얼음판이다. 생명이 버텨내기에 너무나 버거운 시절이다. 지난 연말, 새로운 계약을 많이 체결하여 영업능력을 인정받으면 정직원이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2주 동안 시린 손 언 발로 뛰어다녔을 젊은 ‘수습’ 사원들은 정직원 승급 평가가 있던 날 전원 해고되었다. 회사는 모두가 자격미달이었다고 변명했지만, 이 시절을 온 몸으로 겪어내고 있는 우리는 직감적으로 안다. 아, 새로운 계약 건수가 필요했구나, 하여 한 해를 마감하는 마지막 2주 동안 바짝 뛰어줄 ‘알바’ 인력을 구했던 거구나, 하지만 ‘알바’라 하면 설렁설렁 대충 뛸 터이니 성과를 보고 승급기회를 결정하는 ‘수습’사원이라는 이름표를 달아주었던 거구나! 고용하던 때부터 이미 회사는 ‘쓰고 버릴’ 생각이었고, 이에 더하여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고용의 기술’을 발휘한 거구나!

아,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세상이다. 고용주들에게 노동자는 이제 ‘쓰고 버릴 물건’이다. 최근 ‘땅콩 회항’이라 불리는 사건으로 세간의 화재가 되었던 항공사의 오너 일가는 기내의 직원들을 ‘기물(비행기 안의 사물)’이라 불렀다 한다. ‘쓰이고 너무나 일찍 버려지는’ 까닭에 생명들이 죽어나간다. 스스로 죽고, 남도(가족도) 죽이는 세상이다. 새벽에 일어나 아내와 두 딸의 목을 조르는 가장을 변호할 생각은 없다. 허나 그의 참담한 심정이 어떤 것이었을지는 알겠다. 그동안 ‘폼 나게’ 쓰였겠으나 결국은 그도 쓰고 버려진 존재다. 일단 버려지면 하찮은 존재, 실패자로 배치되는 이 사회에서, 그는 현재의 배치와 굴욕감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극단의 선택을 한 것이겠지. ‘쓰고 버려지는’ 참담함을 나 역시 겪어보았기에 요즘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이 남의 일 같지 않다. 마음이 무겁다. 아리다. 하여 결국은 엎드린다. 기도조차 애가(哀歌)다. 한참을 엎드려 있자하니, 김교신의 기도 글이 문득 머리를 스친다.

작년 늦은 가을 이래로 새로운 기도터가 생겼었다. 층암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가느다란 폭포 밑에 작은 담(潭)을 형성한 곳에 평탄한 반석 하나 담 속에 솟아나서 한 사람이 꿇어앉아서 기도하기에는 하늘이 만든 성전이다. 이 반상에서 혹은 가늘게 혹은 크게 기구(祈求)하며 또한 찬송하고 보면 전후 좌우로 엉금엉금 기어오는 것은 담 속에서 암색에 적응하여 보호색을 이룬 개구리들이다. 산중에 대변사가 생겼다는 표정으로 신래(新來)의 객에 접근하는 친구 와군들. 때로는 5-6마리, 때로는 7-8마리.

‘조와(弔蛙)’ 앞부분이다. 늘 기도하던 신앙의 사람이었으니 이 장면이 새로울 건 없다. 다만 1942년이라는 시점과 조용한 산중에서 홀로 무릎 꿇고 그가 했을 기도의 내용들을 상상해보니 그 역시 절절한 애가(哀歌)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그가 『성서조선』을 시작한 것이 1927년이었다. 시절이 악하고, 그래서 사람들도 자꾸 악해지거나 약해지지만, 성서에 담긴 자유혼을 외치며 전하다보면 조금씩 소망스런 일들이 생겨날 거라 믿었으리라. 그러다가 1942년! 무려 16년의 긴 세월동안 그가 간곡함을 담아 ‘들어라! 제발 들어라!’ 외쳤던 복음(福音)이 땅에 심기우고 자라기도 전에, 휘몰아치듯 차가운 겨울바람처럼 일제의 폭력이 조선인의 마음을 정신을 영혼을 꽁꽁 얼려버리는 사태를 목도했으리라. 하늘로부터 받는 힘과 용기가 그치지 않았으나, 현실을 보며 어찌 애통함과 절망감이 없었을까! ‘혹은 가늘게 혹은 크게’ 기도했다는 그의 표현이 오늘따라 생생하게 전해져온다. 간구하다가 절규하고, 소망을 담다가 순간 절망하고, 바위 위에 엎드린 그는 필시 그랬을 거다.

늦은 가을도 지나서 담상에 엷은 얼음이 붙기 시작함에 따라서 와군들의 기동이 일부일 완만하여지다가, 나중에 두꺼운 얼음이 투명을 가리운 후로는 기도와 찬송의 음파가 저들의 이막(耳膜)에 닿는지 안 닿는지 알 길이 없었다.

<성서조선>의 외침이 조선인들에게 들리는지 아닌지, 거대한 일제의 탄압에 행여 동면하는 개구리들 마냥 하루하루 생명의 기력을 다해가는 것은 아닌지, 그의 안타까운 심정이 한 구절 한 구절 살아서 전해진다. 젊은 시절에는 읽으면서도 몰랐다. 개구리들이 들어봤자 기도와 찬송을 이해나 하나? 뭐, 이런 걸로 일제는 잡지를 폐간하고 12명의 지인들과 함께 1년간의 옥고를 치르게 했나? 그러고 보면 일제의 검열 담당자들은 문학적 이해와 사회학적 성찰이 꽤나 깊었던 것 같다. 행간을 읽어낸 그들은 다음의 마무리에서 이 글의 힘을 제대로 보았다.

봄비가 쏟아지던 날 새벽, 이 바위틈의 빙괴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 오호라, 개구리의 시체 두세 마리 담 꼬리에 부유하고 있지 않은가! 짐작컨대 지난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 이런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 동사한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 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두려웠을 일이다. ‘봄비가 쏟아지는 날’ 말이다. 지배자들이 만든 폭력적 시스템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봄비, 그 따듯한 은혜의 비가 살살도 아니고 ‘쏟아져’ 내린다면, 하여 자신들이 곤고하게 설계해놓은 세상의 질서와 사회적 배치가 다 허물어져버린다면, 하여 인간으로서의 자존감도 잊고 그냥 숨죽이고 머리 조아리고 동면한 듯 지내던 사람들(조선인들)이 생명의 기운을 얻고 스스로 살아내겠다고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그들에게는 얼마나 두렵고 끔찍한 일일까. 자신들의 위용이 아직 단단한 시절에도 소망을 버리지 않고,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미래를 현재로 불러오며 당당하게 외치는 저 믿음이, 소망이, 각오가 어찌 두렵지 않았겠나! 하여 자신들이 만든 세상을 유지하고 싶었던 이들에게, 김교신의 이 글은 ‘읽혀서는 안 되는’ 내용이었을 거다.

봄은 온다, 어김없이! 생명을 위협하는 단단한 얼음 같은 이 시스템도,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쓰고 버리는’ 노동력으로 대하는 이 악한 제도도 녹아내릴 것이다, 결국은! 그러니 개구리 같이 미약한 생명을 지탱하고 있는 이들이여, 당신이여 나여, 우리여, 버텨라. 버티자. 이 얼음 빙벽의 틈에 봄을 불러오는 팔팔한 산 신앙을 꽂아 넣으며, 이 시스템에 균열을 내며, 기다리자. 어느 날 은총 같이 내릴 봄비를... 모든 사람이 형제자매애로 서로를 동등하게, 존귀하게 여기며, 함께 모두가 사는 시스템을 건설하게 될 그 날을...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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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묘지가 따로 없다 - ‘땅콩 회항’ 조현아와 박근혜 대통령

한종호의 '너른마당' 2015.01.09 13:49

한종호의 너른 마당(3)

 

권력의 묘지가 따로 없다

- ‘땅콩 회항조현아와 박근혜 대통령 -

 

 

힘을 가지면 그 힘을 쓰고 싶게 되어 있다. 그런데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그 힘의 가치는 달라진다. 생살여탈권을 가진 권력자가 사형수를 살려준다면 그것은 생명을 향한 권력이 된다. 링컨 대통령이 그렇게 했다. 그러나 그 반대는 잔인한 권력이 된다. 이런 예는 들지 않아도 너무나 많다.

 

권력의 오만

 

권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이 어떻게 행사되는가에 따라 살게 되는 사람과 죽게 되는 사람의 수는 많아진다. 최근 박근혜 정권 내부의 권력 암투나 대한항공 전 부사장이 된 조현아의 기내 난동사건은 모두 권력자가 자기 권력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확실하게 보여준다.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압살한 장본인이다.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했던 인물이니만큼 그 권력의 물리력은 대단히 강도가 높았다. 박정희의 부당한 정치에 맞서는 일은 그래서 목숨을 거는 일이 되었다. 인간의 목숨을 쉽게 짓밟고 죽이는 권력이었으니, 얼마나 살벌한 대통령이었는지는 되풀이 할 필요도 없다.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을 모두 하루아침에 사형장으로 보내 죽인 권력자였으니, 그의 권력은 무소불위하게 보였다.

 

 

(출처: InSapphoWeTrust (https://www.flickr.com/photos/skinnylawyer)

 

 

그러나 바로 그 무소불위한 권력이기에 박정희는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힘이 강하면 세상에 안 되는 것이 없다고 여긴 그였기에 만사에 무리를 했고, 그 무리가 하나하나 쌓여 결국 자신을 향한 칼날이 된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만하고 잔혹한 권력자일수록 자신의 권력이 영원할 것처럼 믿는다. 그러나 그 믿음이 거꾸로 함정이 되어,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박탈하고,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대가를 치른다.

 

예수의 비유 가운데 포도원의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까지 죽인 사건은 포도원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차지하려던 자들의 잔혹함과 죄를 보여준다(마태복음 21).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자기의 힘을 과시한 일들이 자신들의 죄의 증거가 되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점이다. 아들까지 죽이면 모두가 벌벌 떨고 무서워 꼼짝 못할 줄 알았지만, 결국 주인은 이들을 모두 제압하고 포도원을 경작할 농부들을 교체해버리고 만다. 역사의 주도권은 이렇게 바뀌어 왔다.

 

사유화 된 권력의 최후

 

그 아버지에 그 딸인가? 대통령 박근혜의 권력 운용방식은 오늘날의 민주주의 사회와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방식을 보이고 있다. 권력자에게 비선(秘線)조직이 없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 비선조직이 공조직을 대신해서 전횡하기 시작하면, 사태는 겉잡지 못하게 된다. 공조직은 무력해지고 좌절하게 된다. 국가의 기능을 감당하고 있는 공조직이 무력해지면 그 여파는 모든 국민들의 삶에 미친다. 그러기에 공조직을 장악해버리는 권력자의 비선조직은 단지 권력자의 조직을 넘어, 국민적 차원에서 중대한 문제를 일으킨다.

 

그렇게 해서 불거지고 있는 일들은 오늘날 우리 국민들에게, 이 정부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며 어떻게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지를 깨닫게 하고 있다. 대통령은 공적 판단과 결정을 이들 비선조직에 의존하고 있으며, 인사까지 그런 식으로 하고 있으니 공적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은 대통령 자신이 된다. 이건 공적 최고 책임자가 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박근혜 대통령은 이런 의식 자체가 없어 보인다. 그런 까닭에 골탕을 먹는 것은 국민들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그 공화국의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따라서 정부의 권력은 철저하게 국민들을 위해 사용돼야 한다.

 

현실은 어떻게 되고 있는가? 권력의 사유화가 더욱 철저하게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시스템은 사라지고, 대통령 개인의 판단과 결정에 대해 그 어떤 시스템의 검토나 교정과정은 이렇게 해서 삭제 당한다. 이는 매우 위험한 상태이다. 대통령과 사적 관계의 밀도가 높은 인물들이 국가권력을 자기 것처럼 여긴다면, 국민들의 삶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의해 농락당하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그런 현실을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

 

권력의 사유화는 이렇게 해서 정치를 말아먹는다. 권력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지를 망각해버린 자들이 흔히 하는 짓이다. 하늘의 뜻을 받아 왕이 된 사울도 권력을 자기 것으로 여기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선지자 사무엘의 경고가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게 되었고, 마침내 나라와 그 자신 모두를 구렁텅이로 밀어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땅콩 회항과 조현아의 좌절

 

이른바 땅콩 회항으로 나라 안팎을 시끄럽게 한 대한항공의 전 부사장 조현아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다. 대한항공은 사기업이기는 하지만, 그 성장과정은 국민적 기반 위에서 가능했다. 그뿐 아니라 항공기 운행은 승객 모두의 안전과 생명이 달려 있는 문제이기에 전문가가 아닌 임원 누군가가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좌우할 일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애초에 우리는 사태를 조현아의 이른바 갑질이라고 이해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것은 단순한 갑질이 아니라 거의 난동 수준의 패악질이었다. 비행기나 배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그것은 승객 모두의 안전에 직결되는 사안이 되어 즉각 체포대상이 된다. 그런데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자신이 그 모든 것의 주인인양 굴었고, 승무원과 사무장을 자기 하인정도로 여기고 모욕주고 짓밟았으니 이는 국제망신이 아닐 수 없었다.

 

장본인이 다른 누구도 아닌, 대한항공 사주의 딸이자 대한항공 임원이라는 점에서 권력 휘두르는 것만 알았지, 항공기와 승객 안전을 위해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 인물이라는 점만 온 세상에 드러나고 말았다. 당연히 그녀는 사법처리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며, 대한항공은 국민 앞에서 사죄만이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그 이미지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매우 특별한 조처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힘을 가지고 있다고 힘없는 이들을 그토록 함부로 짓밟고, 전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거짓말까지 했는데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 모든 것이 부메랑이 되어 조현아 자신에게 돌아갔고, 그녀는 지금 그녀의 40년 생애에서 가장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이런 것을 보고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고 하는 것이다.

 

조현아 사건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힘 가진 자들에게 중대한 경고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드라마 <미생>으로 해서, 힘없는 이들의 분노가 확산되고 공유되고 있는 마당에 그런 사회심리에 불을 지른 것이 바로 조현아 자신이다. 그런데 언제나 자기가 갑이고, 상대는 을인 줄로 알았다가 이렇게 상황이 반전되고 보니 얼마나 무서운가? 조현아는 세상에 무서운 것 없이 살아왔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어떤 일을 겪고 있는가? 국민들의 시선 망에서 벗어날 길이 없게 되었고, 평생을 통해 이 낙인을 떨어내려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자신의 아름다운 머리칼을 내세우며 자랑하고 아버지에 대한 반란과 함께 권세를 누리려 했지만, 압살롬은 바로 그 머리칼이 나무에 걸리는 바람에 창에 찔려 죽고 만다. 힘으로 여긴 것이 거꾸로 자신을 치는 칼이 되는 일은 이렇게 일어난다. 조현아도 그렇게 땅콩 하나로 아랫것들의 기를 잡고 자기가 엄한 주인임을 보이고 싶었는지 모르겠으나 정작 엄한 주인은 국민이었던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그 뒤늦은 깨달음의 대가는 혹독하다. 카메라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죄송하다는 말을 낼 수밖에 없게 된 처지의 그녀는 처음에야 분노하고 잠시 겪고 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제는 자신을 보호해주고 막아줄 그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겪고, 그 짐을 모두가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세상과 만나고 있다. 홀로 뉴욕 공항에 내려져 비참한 기분에 좌절했을 승무장의 심정이 무엇이었을지 그제야 알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권력의 묘지

 

그나마 조현아의 경우는 일찍 그 죄가 노출되어 그녀에게 인생전환의 기회가 주어진 셈이라고 할 수 있다. 더는 오만하게 굴면서 상전노릇 하며 살기는 쉽지 않게 되었을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상전들의 버릇을 고치는 계기가 되기도 했을 테니까 말이다.

 

문제는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 박근혜 대통령이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그 까닭은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국민들에게 가한 고통이 무엇이었는지 잠시라도 성찰할 수 있다면, 권력의 사유화는 멀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도리어 그 교훈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채 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박대통령의 경우는 그 잘못된 생각과 피해가 조현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조현아의 경우는 그녀에게 반면교사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어떤 전조라는 점을 그녀는 여전히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국민들은 이제 그런 권력의 횡포와 부당한 처사에 대해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보수신문들도 핵심지지 세력까지 이탈하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됐지만 우리는 무척 어두운 마음에 짓눌려 있다. 어디를 봐도 희망의 단초를 찾을 길이 없는 것 같다. 새 시대를 여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곳곳에서 목격하고 있다. 나라를 이끄는 사람들에게서 여전히 횡행하는 거짓과 폭력을 본다. 낡은 시대의 모든 기득권은 여전히 힘쓰고 있고 미래의 희망 대신 두려움이나 불안이 더 크게 자리 잡아 간다.

 

이러한 오늘의 모습에서 우리의 옛이야기인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 나오는 분칠한 호랑이를 본다. 아무리 두텁게 분칠을 하고 목소리를 바꾸어도 호랑이가 어머니로 바뀌지는 않는다. 그 호랑이는 여전히 모든 것을 움켜쥐려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거짓과 폭력의 모습이다. 작은 폭력은 쉽게 눈에 띄기에 민감하게 느끼고 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시대나 국가의 폭력은 너무 크기에 쉽게 알아볼 수도, 단박에 시정할 수도 없다. 헌정사상 초유로 한 정당을 해산시킨 결정이 그렇다. 그러한 폭력은 불의와 거짓과 함께 엉키어 나름대로 체계화, 합리화되어 있다. 그것은 항상 정의와 평화, 진실을 풍선처럼 높이 띄어 놓을 뿐, 현실에 발붙일 틈을 주지 않는다. 폭력의 짝이 거짓과 불의이듯, 그것의 가장 무서운 적은 정의와 평화,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정의와 진실에 대한 믿음을, 거짓과 폭력에 대한 싸움을 멈출 수 없다. 그 길고 지리한 싸움을, 한 에디오피아 옛이야기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진실은 거짓과 싸울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진실이 이길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은 돌아 올 것입니다. 진실은 다시 싸워야 합니다. 시간이 멈추지 않는 한, 진실은 거짓과 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원히 패배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누가 교묘한 온갖 형태의 폭력과 거짓으로 분칠한 호랑이인지를 두 눈 부릅 뜨고 지켜 볼 일이다.

 

다시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떠올리게 된다. 포도원의 주인은 자기 아들을 죽인 농부들을 내어 쫓고 새로운 세력을 내세운다. 역사는 그렇게 바뀐다. 그럴 날이 점점 더 가까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권력의 묘지가 따로 없다.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 이글은 <복음과 상황> 1월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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