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웅의 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 70(3)

누가 38선을 그었는가

 

한민족은 918년 왕건이 삼한을 통합한 이래 1,000년 이상을 통일된 민족국가로서 영광과 고난을 함께해왔다. 그 사이에 몽골의 전란, 왜구침범, 임진ㆍ정유재란 7년 전쟁, 정묘ㆍ병자호란의 치욕, 망국ㆍ식민지를 함께 겪었다.

우리 민족은 오랜 고난의 역사를 살아오면서 거듭되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항상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해왔다. 외세의 침략은 군사ㆍ정지ㆍ경제ㆍ문화ㆍ종교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나타났지만, 외압에 눌리면서도 결코 그들에 동화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주변의 강자였던 말갈ㆍ흉노ㆍ여진ㆍ만주ㆍ몽골족 등의 행방을 살펴보면 한민족이 얼마나 강인하고, 그리고 민족적 정체성을 지켜왔는가를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고대 부족국가 형성기에 중국 한나라의 침략으로 국토심장부와 주요 영역에 400여 년 동안이나 외세의 식민 지배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하여 고려시대 40년의 몽골(元) 지배, 조선조 전기 250년의 명나라 간섭, 병자호란 이후 260년의 청국 복속, 일제 35년의 식민 지배라는 가혹한 침략과 수탈을 당하면서도 굳건한 민족의 정체성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따라서 한민족 공동체의 원형질이 되어온 ‘민족’이란 접두어는 우리에게 언어나 이데올로기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늘 외세에 짓밟히고 강대국의 지배와 속박에 시달려온 우리에게 민족이란 용어가 각별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최근 일부 식자들 사이에서 ‘민족’이란 용어나 ‘민족주의’가 마치 고리삭은 개념처럼 배척ㆍ폄하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노릇이다.

제국주의적 민족주의나 침략주의형 민족주의는 배척해야 마땅하지만, 민족공동체의 유지와 이를 위한 저항적 민족주의는 보호받고 앙양되어야 마땅하다.

1,000년 이상을 운명 공동체로 함께해온 한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면서 반도의 허리가 잘리는 분단 체제가 되었다. 강토 분단과 민족 분열의 원죄는 일본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서 남북에 진주한 미국과 소련, 그리고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 정부를 세우지 못하고 남북에 각각 분단 정권을 세운 좌우, 남북의 지도자들에게도 책임이 적다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북위 38도선으로 국경 아닌 국경선이 되어 국토가 양단된 지 어언 70년이 되었다. 38선은 그동안 가족적으로는 이산의 아픔, 공동체로는 적대의 대상이 되어 증오의 칼날을 갈아왔다.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6.15선언, 10.7선언 등 화해 협력의 시기가 없지 않았지만, 남북의 극우ㆍ극좌세력이 대결과 증오심을 작동하여 정권을 잡거나 유지하려 들면서 파탄되곤 하였다.

1. 아아 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
   아아 물이 막혀 못 오시나요
   다같이 고향땅을 오고 가는데
   남북이 가로 막혀 원한 천리 길
   꿈마다 너를 찾아 꿈마다 너를 찾아
   삼팔선을 탄(歎)한다.

<가거라 삼팔선>, 1946, 이부풍 작사, 남인수 노래

 1.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
    저하늘 저산 아래 아득한 천리
    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우는 몸
    꿈에 본 내 고향이 마냥 그리워.

<꿈에 본 내 고향>, 1953년, 박두환 작사, 김기태 작곡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3년 11월 27일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수상, 장개석 중국 총통이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회담을 갖고 대일본전 기본 목적에 관해 협의한 결과로 공동 코뮤니케를 채택했다.

코뮤니케 중에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일본이 탈취한 태평양 제도를 박탈하고, 만주ㆍ대만ㆍ팽호 열도 등을 중화민국에 반환하며, 일본이 약취한 모든 지역에서 일본 세력을 축출한다. 특히 한국에 대해서는 특별 조항을 넣어 “현재 한국민이 노예 상태에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 에 자유독립국가로 할 결의를 가진다”고 선언하였다. 연합국 수뇌들의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명시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임시정부 김구 주석 등이 장개석 총통을 움직여 얻어낸 성과였다.

1945년 2월 4일부터 7일까지 미ㆍ영ㆍ소 3개국 수뇌가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다시 회담을 갖고 일본에 항복과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 회담에서 공식 거론되지는 않았으나, 루스벨트가 제안한 미ㆍ소ㆍ중 3국에 의한 한반도 신탁통치안이 재확인되었다. 이때 한반도 분단의 씨앗이 잉태된 것이다. 

얄타 회담 (출처: Marion Doss (https://www.flickr.com/photos/ooocha))

 

1945년 7월 26일 독일의 포츠담에서 미ㆍ영ㆍ중ㆍ소 4개국 수뇌 회담이 열렸다. 선언문에는 일본에 항복을 권하고 전후의 대일 처리 방침을 밝힌 13개조의 합의문을 채택했다. 카이로 선언의 실행과 일본 영토의 한정, 일본군의 무장 해제, 전쟁 범죄자 처벌, 일본군수산업의 금지 등이 담겼다. 그리고 카이로 선언에서 채택했던 한국의 독립이 여기서 다시 확인되었다.

미국은 2차 대전 종결 후 한반도에 관해 일정 기간 동안 4대국이 신탁 통치를 한다는 구상이었다. 한국민이 자활ㆍ자력ㆍ자립의 능력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특히 미군이 오끼나와를 점령할 때 막대한 희생을 치룬 것을 감안하여 만주에 주둔한 일본 최강의 관동군을 무장해제시키는 데는 소련의 참전이 중요하다는 인식이었다.

얄타 회담에서는 소련군이 유럽전에서 역할이 끝나는 즉시 대일 참전을 하기로 약속되었다. 일본은 8월 6일과 9일 두 차례 원자폭탄 세례를 받고도 소련의 참전을 기다리느라 항복의 시간을 늦추고 있었다. 소련이 참전하여 한반도의 북쪽에 들어오면 일본 대신 한반도가 분단될 것으로 내다 본 것이다.

일본의 예상대로 8월 9일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하여 만주에서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한반도를 공격 목표로 삼아 진격하였다. 8일에는 나진, 9일에는 웅기와 10일 경흥으로 진공하였다. 8월 9일 일본은 천황제 유지의 조건부로 중립국 스위스를 통해 포츠담 선언의 수락 의사를 밝힘으로써 항복하기에 이르렀다.

소련 극동군이 한반도를 향해 진격하면서 미국무성ㆍ육군성ㆍ해군성의 3자 정책조정위원회는 8월 12일 저녁 딘 러스크 대령과 본스틸 대령이 아시아 지도를 펴놓고 30분 만에 서울을 미국측에 포함시키는 조건으로 북위 38선을 분계로 하여 소련군과 미군의 점령 지역을 나누자는 안을 만들었다. 이 안은 루스벨트의 사망으로 승계한 트루만 대통령이 스탈린에게 정식 제안하게 되고, 스탈린이 받아들임으로써 확정되었다.

이 제안에 대해 미국측은 소련측이 의외로 손쉽게 받아들인데 놀라고, 소련측은 미국이 예상 외로 북쪽을 분할선으로 제시한데 놀랐다고 한다. 한반도의 운명은 한반도 문제에 전혀 문외한인 미국의 두 대령에 의해 쪼개지고, 이를 소련이 수용하면서 분단의 운명을 겪게 되었다. 딘 러스크는 나중에 미국의 국무장관이 되고 본스틸 대령은 주한 유엔군 총사령관을 역임하였다.

미국이 제안하고 소련이 수용한 38선 분할은 미ㆍ소 양군이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한 ‘일시적인 잠정조치’ 라고 했지만 38선을 경계삼아 70년간 한민족의 허리를 잘라낸 국경선으로 굳어졌다.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에서 미ㆍ영ㆍ소 3국 대표들이 모여 한반도 신탁통치안을 결정했다. 이를 둘러싸고 국내에서는 통일정부수립, 친일파 척결과 같은 민족사적인 과제가 찬반탁의 회오리 바람에 매몰되고 말았다.

미ㆍ소공동위원회의 활동도 시간만 낭비한 채 끝나고, 결국 한반도 문제는 미국의 의지대로 유엔에 넘겨지고 ‘가능한 지역’ 만의 총선거로 1948년 8월 15일 남한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에서는 같은 해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어, 해방 3년 만에 남북에 두 개의 이질적인 정부가 수립되고, 38선은 경계선이자 국경선이 되었다.

김구, 김규식 등이 분단 정권을 반대하면서 남북 협상을 하고자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김두봉 등과 회담을 하였으나 양쪽의 극우ㆍ극좌세력과 미ㆍ소 양국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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