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 우여곡절 끝에 어머니가 되다(2)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5)

  사라, 우여곡절 끝에 어머니가 되다(2)

 

1. 어머니 사래. 사래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 바로 어머니였을 것이다. 사래가 어머니가 된다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는 말이다. 사래는 어머니가 되기를 염원했다. 아니, 어머니가 되어야 했다. 그것도 많은 자식들의 어머니여야 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2. 창세기 1110-26절은 셈에서 데라의 세 아들에 이르는 계보인데, 여기서는 계보 특성상 낳고를 반복한다. 그리고 창세기 1127-32절은 데라의 족보이다. 족보는 부부들이 자식들을 출산함으로써 부모가 되는 과정을 나열하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 기자는 사래가 임신하지 못해서 자식이 없었다는 것을 애써 알려준다. 사래는 어머니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창세기 11:29-30). 창세기 16장도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로 시작한다. 사래가 아직 어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3. 그렇다. 사래는 아직 어머니가 아니다. 그런데 사래가 어머니가 아니라는 것은 현 상황에서는 아브람도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셨을 때 이렇게 말한다.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창세기 15:2). 아브람은 자신이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는데, 그 이유를 하나님에게 돌린다. 하나님이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아브람이 아버지가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브람은 입양방식을 통해서라도 아버지가 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하나님께 아뢴다.

4. 그렇게 말하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강조해서 하시는 말씀은 아브람이 반드시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세기 15:4-5).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예전에 아브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세기 12:1-2).

5. 이것은 앞으로 아브람이 많은 자식들을 둘 것임을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것인데, 17장에서 다시 약속하신다.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6). 이런 점에서 아브람은 12장에서 이미 아브라함, 즉 히브리어 이름 그대로 여러 민족의 아버지임(창세기 17:5)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명령과 약속이 사래에게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6.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하신 약속을 사래에게도 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래가 어머니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래에게 여러 민족의 어머니 사라가 될 것임을 약속하셨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창세기 17:15-16). 사래와 사라라는 히브리어에는 어머니라는 의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경기자가 뜻풀이를 그렇게 하는 것은 사래가 어머니여야 함을 그만큼 강조하는 것이다.

7. 그러나 사래는 자신이 결코 어머니가 되지 못할 것이다, 즉 자식을 낳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아브라함이 아버지가 되게 한다. 사래는 아브라함이 하갈과 결혼해서 이스마엘을 낳게 함으로써, 아브라함이 아버지가 되게 한다. 아브라함은 아버지가 되었지만, 사라는 아직 어머니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라가 어머니 될 것을 계속 약속하신다.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창세기 17:21). 하나님은 이렇게 굳게 약속을 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사라가 어머니 된다는 것을 전혀 믿지 않는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나이 때문에 이제는 임신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8.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만나서 사라가 어머니 될 것을 다시 강력하게 말씀하신다. 그런데 사라는 그 이야기를 듣고 웃는다. 자식을 낳기에는 이미 늦은 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 기자는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고 말한 다음, 사라가 속으로 웃으면서 자신이 어머니가 될 가능성이 전무 하다는 통절한 마음을 웃음으로 표현한다. 사라는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라고 말했단다.

9. 예전에 아브람이 애굽에 내려갔을 때, 아브람이 사래를 누이 동생이라고 해서 사래가 바로의 여인들 가운데 한 명이 되었던 것처럼, 거의 동일한 상황에서 사라가 그랄 왕 아비멜렉의 여자가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때 하나님은 아비멜렉 집안의 태를 닫으셨다고 한다.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베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음이더라”(창세기 20:16). 사라를 괴롭게 하는 아비멜렉 가문에 임신을 불허하는 조치를 취하신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가 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10. 아무도, 심지어는 당사자들도 믿지 않을 때, 하나님은 약속하셨고 그것을 꼭 이뤄주셨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또 이르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창세기 21:1-7). 하나님은 사래를 지키시고 돌보심으로써, 결국 사래로 하여금 어머니가 되게 하셨다. 이렇게 사래의 삶은 사라, 즉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었다.

 

이종록/한일장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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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충돌? 아니, 원초적 살인의 추억!

  • 좋은글 입니다.

    하나님과 가인과의 대화.

    답을 찾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과정에 충실하라고 하시는것 같습니다.


    Rilke 2015.01.29 04:17

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4)

문명충돌? 아니, 원초적 살인의 추억!

 

1.

<분노의 포도><에덴의 동쪽>을 쓴 존 스타인벡은 이런 말을 했다 한다. 이 열여섯 절[창세기 4:1-16] 시대, 문화, 인종과 상관없는 모든 인류의 역사다.창세기 1장부터 11장이 종족 분화 이전의 얘기임을 그가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글의 성격을 제대로 알고 한 말이다. 아담과 하와 얘기가 그렇듯이 가인과 아벨 얘기 역시 개인 간에 벌어진 사건 얘기가 아니라 인류 전체에 관한 얘기니 말이다.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읽다 보면 이 점을 깜빡 잊고 이 얘길 개인들의 얘기로 읽는 경우는 있지만 말이다. 남들은 몰라도 나는 가끔 그래왔다. 그럴 때마다 아차, 이건 개인 간의 얘기가 아니라 일종의 원형적 이야기(an archetypal story)를 되뇌며 정신을 차리곤 했다.

이 얘긴 무척 압축돼 있다. 그만큼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가 많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읽을 수 없다. 상상력을 발휘해서 빈 공간을 메워 나가지 않으면 읽을 수 없다. 그만큼 이 얘기엔 빈 공간이 많고 설명되지 않은 부분이 널려 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가인과 아벨은 야훼에게 제물 바쳐야 하는 걸 어디서, 누구에게 배웠을까? 아담과 하와는 제물을 바치지 않았다. 왜 야훼는 아벨의 제물은 반겼고 가인의 제물은 반기지 않았을까? 야훼가 자기와 자기 제물을 반겼음을 아벨이 알았단 얘기는 없다. 거긴 관심 없다는 듯이. 그런데 가인은 야훼가 자기와 자기 제물을 반기지 않았음을 어떻게 알았을까? 아벨의 제물은 야훼가 먹어서 제단에서 사라졌고 가인의 제물은 먹지 않아서 제단에 그대로 있었나? 세상에 아담, 하와, 가인, 아벨 말고 또 누가 있다고 가인은 누군가가 자길 죽일까봐 두려워했을까? 그리고 가인의 아내는 어디서 나타난 걸까? 언제부터 살인이 나쁜 일로 여겨졌을까?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주어지기도 전인데 말이다. 어떤 짓은 계명과 상관없이 원초적으로 나쁜 짓으로 인식됐었나?

가인과 아벨 (출처: AK Rockefeller(http://www.flickr.com/photos/akrockefeller))

 

이와 같은 기본적인 질문들에 대해 가인과 아벨 얘기가 아무 대답도 내놓지 않기에 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얘기가 본래는 복잡한 플롯과 디테일을 갖춘 독립된 얘기였는데 구약성서에 들어왔을 때 지금 모양으로 축소, 축약됐다고 추측해왔다. 그렇게 추측할 근거는 충분치 않지만 관습적으로 그래왔다. 일종의 관행이 돼버렸다고 할까. 이 얘기뿐 아니라 전후 연결이 부자연스럽거나 설명 없는 빈 공간이 많은 얘기에게도 같은 추측이 적용됐다. 그런데 이 추측대로 얘기가 다듬어졌다면이해하기 어려운 얘기가 쉬워져야 하는 게 아닐까. 연결도 자연스럽지 않고 읽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다듬어졌다고 할 수 있겠나 말이다. 그러니 달리 생각할 수는 없을까 싶다. 이 얘긴 본래부터 연결이 잘 안 됐고 빈 공간이 많게 의도됐다고. 그래서 읽는 사람이 상상력을 발휘해서 연결 안 되는 부분을 연결하고 빈 공간을 메워가면서 읽게 하려고 저자가 본래부터 의도했다고 말이다. 요즘은 이런 글이 흔하다. 이게 지나치면 안 되지만 정도껏 하면 읽는 재미가 있다. 요즘 저자들도 그런데 옛날 저자라고 그렇게 하지 말란 법 있나. 그런 의도로 글 쓰지 말란 법 있나 말이다. 물론 이 역시 입증할 방법은 없다.

2.

스타인벡의 말이 아니더라도 가인과 아벨 얘기는 꼼꼼히 읽어볼만하다. 그 동안은 짧아서 그런지, 결과가 참혹해서 그런지 거기 도달하는 과정에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경향이 있었으니 말이다. 우선 장황한 해석을 덧붙이지 않고 문장의 뜻만 따져가면서 한 번 읽어보자.

1절은 이렇게 말한다. 아담이 자기 아내 하와와 동침하니 아내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았다. 하와가 말하였다. ‘야훼의 도우심으로 내가 남자 아이를 얻었다.’” 전반부엔 문제가 없다. 우리말로나 영어로나 히브리 원어로나 뜻이 명백하다. 하지만 후반부는 그렇지 않다. 하와는 야훼의 도우심으로 내가 남자 아이를 얻었다.”고 했다. 영어로도 “I have gotten a man with the help of YHWH.로 되어 있어서 별 문제 없어 보이지만 정작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내가 야훼와 더불어(with YHWH) 남자(a man)를 낳았다.가 돼야 한다. 영어와 우리말 번역본은 하와와 야훼가 성관계를 갖는 걸 상상할 수 없어서 도우심으로라는 말을 첨가했지만 원문에는 그런 말이 없다. , 시작부터 곤혹스럽네. 전반부에선 분명 아담이 하와와 동침했다고 했다. ‘동침하다를 표현할 때 구약성서는 알다 to know’라는 동사를 사용한다는 사실이 이젠 제법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왜 후반부에선 아담과 더불어가 아니라 야훼와 더불어일까? 자식은 부모의 결합을 통해 생겨나지만 궁극적으론 야훼의 창조물임을 강조하려는 뜻일까?

2절은 이렇다. 하와는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다.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고 가인은 밭을 가는 농부가 되었다.” 텍스트는 누구와 동침해서 아벨을 낳았고 적시하지 않는다. 시간상으론 아벨이 가인의 아우임이 당연한데 굳이 아벨을 가인의 아우라고 불렀다. 둘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주려 했을까? 그 다음에 둘의 직업을 밝힌다. 여기서 이 얘길 유목문화와 농경문화 사이의 갈등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생겼다. 일종의 문화인류학적 해석인데 과연 이게 둘 사이에 벌어진 기나긴 갈등의 기원을 따지려는 얘길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있다면 그건 텍스트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3절은 세월이 지난 뒤에 가인은 땅에서 거둔 곡식을 야훼께 제물로 바치고라고 했다. ‘세월이 지난 뒤에를 영어성서는 ‘in the course of time’이라고 번역했는데 애매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세월이 얼마나 지났다는 말도 없고 무엇을 하는 중간인지도 밝히지 않으니 말이다.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마지막 날들에 at the end of days’라고 읽어야 한다. 그러니까 농사의 한 사이클이 끝나는 시점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이게 더 그럴듯하지 않은가. 농경문화에서 시간은 순환적(cyclic)이니 말이다. 씨를 뿌릴 때가 있으면 소출을 거둘 때가 있고 우기와 건기가 반복되는 것처럼.

4절과 5절이 문제다. 아벨은 양 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기를 바쳤다. 야훼께서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셨으나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지 않으셨다. 그래서 가인은 몹시 화가 나서 얼굴빛이 달라졌다.” 이 구절에는 많은 이슈들이 있다. 왜 사람은 야훼에게 제물을 바쳤을까? 그걸 어디서 배웠을까? 야훼가 그렇게 명했나, 아니면 본능적으로 그랬나? 부모에게 배웠다는 말도 없다. 양 치는 목자가 양 떼 가운데 맏배의 기름기를 바친 건 당연하다. 밭가는 농부가 땅에서 거둔 곡식을 제물로 바친 게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안 그런가? 그런데 왜 야훼는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반겼고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반기지 않았을까? 그냥 이유 없이 야훼 맘대로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 야훼가 그랬다면 그런 줄 알면 되나? 이래서야 어디 무서워서 야훼에게 제물 바치겠나. 왜 그냥 가인이 바친 제물’, ‘아벨이 바친 제물이라 하지 않고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이라 썼을까? 야훼가 제물을 반겼다는 말과 반기지 않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흔히 반겼다는 말은 야훼가 제물을 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하는데 그럼 왜 받았다고 하지 않고 반겼다고 했을까? 제물을 받다는 말이 구약성서에 흔한데 말이다. 느낌만으로도 전체의 의미가 이 구절에 달려 있다 싶다. 안 그런가? 하지만 이 구절은 얘기 전체에서 가장 구멍이 많은 부분, 따라서 가장 활발하게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6절은 야훼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네가 화를 내느냐? 얼굴빛이 달라지는 까닭이 무엇이냐?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빛이 달라지느냐?’”라고 읽는다. 우리말 성서가 얼굴빛이 달라지는 까닭이 무엇이냐?’로 번역한 말을 영어성서는 ‘why has your countenance fallen?’라고 번역했는데 이는 히브리 원어의 직역이다. 우리말 직역은 왜 얼굴을 떨어뜨렸느냐?’가 되겠다. 곧 야훼가 자기 제물을 반기지 않아서 가인이 얼굴을 떨어뜨렸다는 거다. 고개를 숙였다는 얘긴데 이 말이 뭘 상징하는지는 정확하게 추측하기 어렵다. 분노의 표현일 수도 있고 실망이나 좌절의 표현일 수도 있다. 다음으로 네가 올바른 일을 했으면7절에 나오는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면”(인용한 새번역성서에는 조건절임이 분명히 드러나 있지 않다)이란 조건절도 문제다. ‘올바른 일이나 올바르지 못한 일이 뭘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일반적인 윤리 문제인지 아니면 제물 바치는 것과 관련해서 제기되는 문제인지가 분명치 않다. 마지막 부분의 어찌하여 얼굴빛이 달라지느냐?”는 지나친 의역이다. 히브리 원문에는 올리기또는 치켜 올리기란 뜻을 가진 부정사 한 단어다. 영어성서도 RSV“will you not be accepted?”라고 모호하게 번역했고 JPS“there is uplift”라고 거의 직역했다. 분명한 건 이게 조건절이란 사실이다. 올바른 일이 뭐든 만일 네가 그걸 했다면 고개를 들라는, 또는 들 것이란 얘기다.

7절은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라고 말한다. 첫 문장은 조건문이므로 만일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다면이 정확한 번역이다. 만일 그렇다면 죄가 너의 문에라는 거다. 성서에서 란 말이 여기에 처음 나온다. 여기서 이 대문이나 성문을 가리키는 게 아님은 쉬이 짐작할 수 있다. 그럼 어떤 문일까? 마음의 문? 영혼의 문? 어디가 됐든 문에 도사리고’(또는 웅크리고’) 앉아 있다는 말은 그게 외부에서 누군가를 노리고 있다는 뜻이겠다. 이에 대해 마틴 부버는 죄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그것은 바깥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거다.”라는 말을 했는데 의미가 알쏭달쏭하지만 한 번쯤 생각해볼 말이 아닌가 싶다. 죄가 마음(또는 영혼)의 문 밖에서 성난 개처럼 웅크리고 앉아 물어뜯으려고 노리고 있다. 하지만 가인은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 그런 뜻에서 RSV“you must master it”라고 번역했는데 JPS“you can be its master”이라고 번역함으로써 이와는 약간 다른 뉘앙스를 풍긴다. ‘다스려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라 다스릴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이해하니 말이다.

8절은 가인이 아우 아벨에게 말하였다. ‘우리 들로 나가자.’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였다.”라고 말한다. 여기도 메워야 할 구멍이 있다. 히브리 원문에는 가인이 아우 아벨에게 말하였다.” 다음에 우리 들로 나가자.”라는 말이 없다. 가인이 말은 했지만 내용이 빠진 채 바로 그들이 들에 있을 때로 이어진다. 누가 봐도 말이 안 된다. 뭔가 빠진 게 틀림없다. 그래서 아람어 번역인 타르굼은 이리 오라, 우리 들로 나가자.”라는 말을 집어넣었고 다른 번역본들이 이를 따라갔다. 타르굼이 잘 한 걸까? 그래 보인다. 말을 했는데 내용이 없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으니까. 그런데 혹시 여기에 저자의 의도가 숨어있는 건 아닐까? 결론짓기 전에 꼼꼼히 따져 봐도 늦지 않을 거다. 왜 가인은 아벨을 하필 ’(field)로 데리고 갔을까? 그가 아벨을 왜 쳐 죽였는지도 궁금하고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반기지 않은 건 야훼인데 왜 아벨을 죽였는지도 궁금하기 짝이 없다. 아벨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9절은 야훼께서 가인에게 물으셨다.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읽는다. 여기가 얘기 전체의 의미를 결정짓는 부분이란 느낌이 확 오지 않는가. 앞 장에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듯이 여기서도 야훼는 가인에게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는다. 정말 몰라서 물었을까? 그런 거 같다. 아는데 짐짓 모른 척 묻진 않은 거 같다. 그런데 가인은 알면서도 모른다고 했다. 그것도 짐짓 불쾌하다는 듯이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는 말까지 덧붙이며 말이다. 이 구절은 심리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많은 이슈를 갖고 있다. 그것들을 따지기 전에 거 참 나쁜 놈이네하는 생각이 즉시 들지만 말이다. 그 얘긴 나중에 해보자.

10절은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너의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이다. 클라우스 베스터만은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라는 물음을 성서에 나오는 기념비적인 문장들 중 하나라고 불렀다. 하느님은 불의를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죽은 자, 특히 (억울하게) 살해된 자의 피가 하느님 들으라고 땅에서 울부짖는다는 얘기는 민간신앙에서도 흔하다. 민수기 35:33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온다(“너희가 사는 땅을 더럽히지 말아라. 피가 땅에 떨어지면, 땅이 더러워진다. 피가 떨어진 땅은 피를 흘리게 한 그 살해자의 피가 아니고서는 깨끗하게 되지 않는다.”). 얘기 전체를 통해서 아벨은 한 마디도 말을 안 한다. 설화자는 그에게 목소리를 주지 않는다. 그는 죽어서 비로소 말한다. 정확히는 땅에 쏟아진 그의 가 목소리 높여 하느님께 울부짖는다. 자기 얘길 들어 달라고 말이다.

11절은 이제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다. 땅이 그 입을 벌려서 너의 아우의 피를 너의 손에서 받아 마셨다.”이다. 첫 문장의 뜻이 모호하다. RSV는 우리말 성서처럼 “you are cursed from the ground”라고 번역했는데 JPS“you shall be more cursed than the ground”라고 번역했다. 둘의 뜻은 적지 않게 다른데 히브리 원어는 둘 다 가능하다. 전치사 min’에는 비교급 ‘~보다 than’‘~으로부터 from’ 두 가지 뜻이 다 있다. JPS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한 짓 때문에 땅이 저주받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 구절을 가인이 그때 저주받은 땅보다 더 큰 저주를 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12절은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이제는 너에게 효력을 더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다.”이다. 이젠 가인이 땅을 갈아봐야 헛심만 쓰게 될 뿐이다. 그 결과 그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방랑자가 될 거다. 유목민은 본래 떠도는 사람이지만 농사짓던 자가 떠돌이가 된다니 이런 저주가 어디 있겠나.

13절은 가인이 야훼께 말씀드렸다. ‘이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 무겁습니다.”로 읽는다. 사람을, 그것도 자기 동생을 죽여 놓고 떠돌아다니는 게 너무 무거운 짐이란다. 남의 고통은 작아 보이고 자기 고통은 커 보이는 게 사람이긴 하다. 수백 명의 학생들을 수장해놓고도 얼굴색 하나 안 변하는 사람들도 많은 세상이니 가인을 철면피라고 부르는 건 지나칠 수 있다. 그래도 그가 뻔뻔한 건 부인할 수 없다.

14절은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쫓아내시니 하느님을 뵙지도 못하고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라고 읽는다. 우리말 성서는 둘 다 이 땅이라고 번역했지만 히브리 원어로는 전자는 먼지의 표면으로부터 from the face of the dust’이고 후자는 땅 위에서 on the earth’이다. 전자는 먼지’, ‘티끌을 의미하는 아다마이고 후자는 이란 뜻의 에레쯔. 왜 둘을 구별했을까? J 기자에 따르면 사람은 아다마에서 와서 아다마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존재인데 거기서 추방당했다는 말인가? 누가 가인을 죽이려 한다는 걸까? 글자 그대로 읽으면 세상엔 아담(언제부턴가 무대에서 사라졌다!), 하와, 그리고 가인 밖에 없지 않나! 부모가 자길 죽일 리는 없고 대체 누가 자길 죽일 거라고 이토록 두려워하는가 말이다. 자기는 동생도 죽였으므로 부모도 자길 죽일 수 있다고 두려웠던 걸까? 설마. 또한 그는 왜 가인을 죽이려는 걸까? 보복? 대관절 누가? 보복은 인척이든 친분이든 피살자와 관계있는 사람이 하는 게 아닌가.

15절은 야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절로 벌을 받을 것이다.’ 야훼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라고 적었다. 이건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를 훨씬 뛰어넘는다. 가인을 죽인 자는 일곱 갑절로 벌 받을 거라니, 일곱 명을 죽이겠단 얘긴가? 왜 그래야 하는데? 가인을 이처럼 아낄 거면 왜 야훼는 그와 그의 제물을 반기지 않았을까? 야훼는 애지중지하는(?) 가인에게 표를 찍어주어 그를 보호했단다. 구약학자들은 이 가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두고 머리 싸매고 고민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지만 속 시원한 답은 아직이다.

16절은 가인은 야훼 앞을 떠나서 에덴의 동쪽 놋 땅에서 살았다.”이다. 이 구절 덕분에 스타인벡이 소설을 썼고 엘리아 카잔이 영화를 만들었으며 제임스 딘이 스타가 됐다. 그러니까 가인은 에덴의 동쪽, 야훼가 없는 곳(“야훼 앞을 떠나서”)인 놋에서 야훼 없이 살았단 얘기다. 여기서도 하느님은 무소부재하다는 교리는 어디론가 실종이다.

3.

, 이젠 각 절이 무슨 뜻인지 대충 감이 잡혔을 터이니 이슈들을 살펴보자. 앞에서 이 얘긴 원형적 이야기(archetypal story)라고 했다. 곧 인간세상의 중요한 사건이나 현상의 근원적, 근본적 의미를 다루는 얘기란 뜻이다. 이 얘기에는 농경과 목축, 제사, 살인, , 추방, 하느님을 떠난 삶 등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것들이 갖고 있는 원초적 의미가 뭔지 생각해볼 차례다.

창세기 2, 3장에서처럼 여기서도 하느님은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고 대화를 나눌 정도로 가깝다. 하느님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듯이 여기서도 가인에게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라고 묻는다. 하느님은 살인자 가인에게 벌도 내리지만 두려워 떠는 그를 안심시키기도 한다. 그를 죽이는 자에겐 일곱 갑절로 보복하겠다는 약속도 한다. 그것도 모자라 가인의 몸에 를 찍어줘서 그를 죽이지 못하게 조치한다. 참으로 자애로운 하느님 아닌가! 살인자에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보복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보호해주니 말이다.

하지만 가인에겐 이처럼 자애로운 하나님이 가인의 잠재적 가해자에겐 지나치게 가혹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모든 게 하느님 맘대로인 갑질을 여기서도 하는가? 여기서도 나는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풀고 긍휼을 부어주고 싶은 사람에게는 긍휼을 부어준다.”(출애굽기 19:33)는 유일신의 절대주권이 통하는가?

나는 다신교가 절대대세인 세상에서 특이하게 유일신교를 믿었던 이스라엘이 느꼈을 당혹감에 공감한다. 참 곤란했을 거다. 이해되지 않는 점들도 많았을 거다. 다신교를 믿었다며 문제가 없었을 텐데 유일신교를 믿어서 곤혹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니었을 거다. 모든 게 하느님 맘대로 갑질하는 건 줄 알았지만 그래도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걸 이해해보려고 노력하고 인과관계를 따져보려고 애썼던 그들의 신앙적, 신학적 고뇌에 적지 않게 공감한다.

왜 야훼가 아벨과 그의 제사를 반겼고 가인과 그의 제사는 반기지 않았는지 그들은 알 도리가 없었다. 가인과 아벨은 야훼에게 제사를 드렸다. 제사가 뭔가? 왜 사람은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가? 그게 그들 삶에서 무슨 역할을 했을까? 그걸 통해 어떤 목적을 이루려 했을까? 이에 대해선 무수한 이론이 있지만 결국 제사란 신의 마음을 얻으려는 행위 가운데 하나다. 또한 결과적으론 그걸 통해 신이 누굴 선호하는지가 드러나는 게 제사다. 여기엔 신의 마음을 얻으려는 사람의 노력에 대한 신의 평가와 판단이 관련되어 있고 결과적으로 구별과 차별이 벌어지게 되어 있다. 그 판단의 기준이 뭔지는 전적으로 신에게 달려 있다. 사람은 그게 뭔지 추측할 뿐이다.

가인과 아벨이 야훼에게 제물을 바쳤다. 각각 자기가 거둔 것으로 말이다. 제물의 종류에서 신의 선호와 비선호의 이유를 찾는 것은 옳지 않다. 구약성서에서는 둘 다 적법한 제물이니 말이다. 유목문화와 농경문화의 충돌로 보는 것도 안 맞는다. 이스라엘은 둘 중 하나에 속한 게 아니라 둘 다 경험했다. 그들은 정착생활하기 전엔 반()유목, ()농경생활을 했다. 텍스트가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이라고 표현한 데 지나치게 무게두는 것도 옳지 않다. 제사의 정당성이 궁극적으로 제물의 재료에 달려 있지 않고 그걸 바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음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신이 제물이 뭔지에 좌우될 정도로 어리석다고 여길 멍청한 사람이 과연 있을까.

따라서 야훼가 가인의 제물을 반기지 않았던 건 그를 아벨과 비교, 평가, 판단해서 아벨과 구별한 행위였음에 분명하다.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반기기엔 부족한인물 됨됨이 및 제물로 평가됐는 거다. 그런데 이 판단이 돌이킬 수 없는 최종적인 것이었다면 설화자가 다음 얘길 이어갈 이유가 없었을 거다. 하지만 설화자는 얘길 거기서 끝내지 않고 살인사건과 그 이후의 얘기로 이어갔다. 이것은 제사 수납 여부가 전체의 클라이맥스가 아니란 뜻이다. 정작 하려는 얘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거다. 할 얘기가 더 있다는 말이다.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반기지 않았다는 게 곧 그를 최종적으로 싫어하거나 미워한 건 아닐 수 있다. 막말로 가인이 , 내가 뭘 잘못한 모양이네. 그럼 다시 하지 뭐.’ 할 수도 있었지 않았냐는 거다. 그렇지 않다면 얘길 더 이어갈 이유가 없지 않나 말이다. 안 그런가?.

야훼가 자기와 자기 제물을 반기지 않자 가인은 화가 나서 얼굴을 떨구었다. 이런 그에게 야훼가 묻는다. 왜 화를 내냐고, 왜 얼굴을 떨구냐고. 그 다음에 야훼는 조건문 형식의 두 마디 말을 한다. 만일 네가 올바른 일을 한다면(미완료형) 고개를 들어라! 만일 네가 올바르지 않은 일을 한다면 죄가 네 문에 웅크리고 앉아서 널 다스리려 하는데 너는 그 죄를 다스려야 한다(또는 다스릴 수 있다)! ‘올바른 일이 뭔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일반적인 윤리일 수도 있고 제사를 제대로 드리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야훼가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을 반기지 않은 게 그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결정짓진 않았다는 얘기다. 여전히 그에게 미완료 조건절을 적용하는 걸 보면 아직 그에겐 상황을 바꿀 기회가 있다. 올바로 행한 후에 고개를 들면 된다. 아직 끝이 아니다. 물론 그가 올바르지 않은 일을 한다면 죄라는 사나운 개에 물어뜯길 수 있다. 죄는 마음(영혼) 문에 웅크리고 앉아서 널 물어뜯으려 하니 고개를 들고 그 머리통을 밟아라!

여기에 성서에서 처음으로 란 말이 등장한다. 이를 두고 구약학자들이 얼마나 많은 주장을 내놓았겠나. 그것들을 모두 살피는 건 어차피 불가능하고 몇 가지만 얘기하련다. 우선 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하타의 어원이 과녁을 빗나가다라는 뜻임은 널리 알려져 있다. ‘가르침을 뜻하는 토라과녁을 향하다란 뜻이므로 둘은 대조되는 뜻을 갖는다. 과녁을 향하는 게 토라인데 그걸 빗나가는 게 죄란다. 어원은 그렇고, ‘가 문에서 웅크리고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이미 행해진 게 아니라 행해질 가능성이 있는 뭔가를 가리키는 말로 보는 게 맞겠다. 영어로 ‘culpability’란 말이 여기 딱 맞는다. 그러니까 가인은 제사를 잘못 드려서 죄를 지은 게 아니라 죄지을 가능성에 노출된 거다.

4.

가인은 끝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우를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설화자는 8절에서 가인이 아벨에게 말했다고 하곤 그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이를 아쉬워한 타르굼이 이리 오라, 우리 들로 나가자.”라는 말을 집어넣었다고 했다. 논리적으론 타르굼이 옳다. 얘기의 흐름 상 그래야 했다. 하지만 설화자가 의도적으로 둘 사이에 있어야 할 대화를 빼버렸다고 볼 수는 없을까? 설화자의 머릿속에 들어갈 수 없으니 우린 그의 생각을 알 도리가 없지만 얘기 처음부터 끝까지 가인과 아벨이 한 마디도 대화하지 않는 게 정녕 우연은 아닐 거라고 믿는다. 무대에 등장하는 하느님, 아담, 하와, 가인, 아벨 중 가장 존재감 없는 인물은 아담이고 그 다음이 아벨이다. 둘의 공통점은 한 마디도 말하지 않는다는 거다. 정말 그럴까? 아담의 경우는 그런데 아벨은 아니다! 그는 말을 했다! 죽은 다음이긴 하지만 말이다. 살아 있을 때 가인과 소통하지 않았기에 죽어서 하느님에게 울부짖었다고 볼 수는 없을까? 설화자는 이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둘 사이에 있어야 할 대화를 의도적으로 뺀 게 아닐까?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가?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라는 말은 아벨의 위치뿐 아니라 그의 상황, 둘 사이의 관계까지를 묻는 물음이다. 가인은 모른다고 딱 잡아뗀다. 잡아떼면 하느님이 모를 거라고 생각했을까? 아담과 하와는 숨긴 했지만 거짓말하진 않았다. 그런데 가인은 자기가 살해한 아벨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는 하느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하느님을 그렇게 헐렁한존재로 봤나?

가인은 왜 아벨을 살해했을까? 그에게 무슨 죄가 있나?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을 반기지 않은 건 아벨 아닌 야훼였다. 그런데 그의 분노는 아벨을 향했다. ? 감히 하느님에게 화낼 수 없어서 아벨을 속죄양으로 삼은 걸까? 분노를 쏟을 데를 찾지 못하다가 만만한 아벨에게 퍼부었나? 프로이드는 때론 죄에 대한 인식이 범죄행위를 앞선다고 말했다. 죄의식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동기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가인은 하느님에 대해 신뢰와 증오라는 두 개의 감정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하느님을 믿었지만 자기 제물을 반기지 않아서 그를 미워하게 된 거다. 그래서 그는 증오를 마땅히 하느님에게 쏟아야 했지만 그러기엔 하느님은 너무 강하다. 그래서 하느님을 대체할 존재를 찾아야 했는데 그게 아벨이었다는 거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건 대상을 잘못 찾은 증오심(displaced hatred) 때문이다. 이유 없이 남을 미워할 수 있는데 이때 증오의 대상은 단지 그 증오가 퍼부어질 대상이 있어야 하기에 그에게 퍼부어졌을 수 있다. 아벨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말했을 때 가인은 아우에 대해서 심리적인 장벽을 쌓았다. 이제 아벨은 아우가 아니라 하느님 대신 분노를 받아야 할 대상이 됐다.

그의 무도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퉁명스럽게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말했다. 둘 사이가 이렇게 멀었나? 언제 이렇게 멀어졌을까? 둘은 서로에게 극도로 무관심했나?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관계의 단절 선언이 아닌가. 본래부터 둘 사이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그렇다면 이는 모순이다. 아벨을 아우라고 부르면서 관계없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아우가 뭔가? 그건 관계아닌가. 우리식으로 2촌 관계가 형제관계다. 부모자식 다음으로 가까운 게 형제인데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니! 네가 아니면 누가 지키는데?

이렇게 가인은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었다. 하느님이 창조한 세상에서 나는 너를 지키는 자여야 하고 너는 나를 지키는 자여야 한다. 그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인데 가인은 그걸 부정했다. 굳이 프로이드에 따르지 않더라도 아벨은 가인의 다른 모습임이 어렵지 않게 보인다. 그리고 신은 둘이 함께 투영된 형상(image)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그는 형제를 죽였고(fratricide), 자신을 죽였으며(suicide), 동시에 하느님을 죽였다(deicide). 구약학자들은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유목문화와 농경문화의 충돌이나, 농부 사울(사무엘상 11:5)과 목동 다윗(사무엘상 16:11)의 갈등 등으로 처음부터 갈라놓고 봐왔다. 이 역시 옳지 않다. 텍스트는 둘(또는 하느님과 더불어 셋) 사이의 뗄 수 없는 유대관계를 줄곧 강조한다. ()은 본래부터 남이 아니다. ()이 본래부터 대립적이었다고 보는 건 옳지 않다. ()은 이 사건으로 인해 갈라졌고 관계가 깨졌지만 본래는 그렇지 않았다. 제사가 주된 원인이 아니다. 그게 일련의 사건들을 촉발했지만 제사보다는 살인과 그 후의 책임회피가 관계의 단절을 가져온 거다. 이 상황에서 땅에서 울부짖는 아벨의 피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그건 올바른 관계의 회복을 호소하는 모든 억울한 죽음의 울부짖음이 아닐까?

그 다음엔 시선이 온전히 으로 향한다. 아벨의 피가 에서 야훼에게 울부짖고, 가인이 보다 더 저주를 받을 것인데 그 까닭은 이 그 입을 벌려서 아벨의 피를 가인의 손에서 받아 마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후로는 가인이 밭을 갈아도 이 그에게 효력을 나타내지 않을 것이고 그는 위에서 쉬지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란다. 이에 가인이 엄살을 부리며 자기를 에서 쫓아내니 이제 하나님을 보지도 못하고 이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라고 호소한다. 그렇게 되면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를 죽이려 할 거란다. 이에 야훼는 그에게 일곱 갑절로 복수할 것이고 가인에게 표를 찍어 주어 누구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겠다고 약속한다. 이에 가인은 야훼 앞을 떠나 에덴의 동쪽 놋 에서 살았다는 걸로 얘기가 끝난다.

, , . 부동산 투기 얘기도 아닌데 땅이 너무 많이 나오는 거 아니냐고 불평할 만하다. 땅 투기했다 손해 본 사람은 지겨워서 안 읽고 지나갈 만도 하다. 하지만 땅 투기 얘긴 아니니 염려 마시라.

가인은 아담이 저지른 짓으로 인해 땅이 당한 저주보다 더 큰 저주를 받아야 했다. 아벨의 피가 흐르는 땅은 그에게 소출을 내주지 않을 거다. 가인은 아벨을 죽여 땅 어딘가에 묻었지만 바로 그 때문에 아벨은 어디나 존재하게 됐다. 참 대단한 역설 아닌가! 가인은 아벨을 죽여 무존재로 만들려 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아벨은 온 땅이 울부짖음으로 현존하게 된 거다. 이 때문에 농부 가인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녀야 했다. 어딜 가도 아벨의 울부짖음이 들렸다. 그는 쫓겨나서 하느님 얼굴을 못 보게 됐지만 아벨의 울부짖음은 어디서도 들렸다. 아벨은 울부짖음으로 부활한 거다. 그는 하느님을 향해 울부짖는다. 그래서 사랑받던 자의 울부짖음 때문에 하느님을 졸지도 잠자지도 못한다. 되돌릴 수 없는 상실을 영원히 되새겨 주는 게 이 울부짖음이다. 시편 94편의 시인도 이와 비슷한 맘이었지 싶다.

야훼님, 야훼님은 복수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복수하시는 하느님, 빛으로 나타나십시오…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악인을 치며,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행악자들을 대항할까?
야훼님께서 나를 돕지 아니하셨다면
내 목숨은 벌써 적막한 곳으로 가 버렸을 것이다(1, 16-17절).

가인은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린다. 강박증 환자가 된 거다. 아우를 가차 없이 실해한 그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는 공포에 시달리는 건 또 무슨 아이러니인가. 가인의 방랑은 혼돈(chaos)을 상징한다. ‘계명은 삼라만상을 창조한 하느님과 피조물인 사람 사이에 놓여 있는 다리(bridge). 세상의 질서는 계명을 지킴으로써 유지된다. 계명이 지켜지지 않으면 세상은 태초의 혼돈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담과 하와 때문에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란 얘기(창세기 3:18)와 가인의 방랑이 이걸 상징한다. 하느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결합(창세기 6:2)이 낳은 혼돈과 바벨탑으로 인한 언어의 혼란 역시 계명을 어긴 결과 초래된 혼돈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만일 네(가인)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이라는 조건절이 갖는 무게는 무겁기만 하다. 올바른 일을 하면 이런 혼돈은 벌어지지 않는다.

5.

구약성서 종교는 유일신 종교다. 여럿이 아니라 오직 한 신이 모든 걸 갖고 있고 모든 걸 주관한다고 믿는다. 그에게 권력을 나눠 받을 다른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절대권력자다. 하지만 동시에 유일신 야훼는 사람 없이는 의미가 없는 신이다. 야훼는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구약성서는 이 점을 매우 강조한다. 하느님과 사람의 관계는 철저하게 나와 너 I and Thou’의 관계(마르틴 부버). 성서는 이런 하느님과 사람의 상호성(reciprocity)을 질리게 반복해서 말한다. 사람인 없인 하느님인 는 아무 의미도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둘 다 철저하게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인격이므로 둘의 관계는 나와 그것 I and It’의 관계가 아니다. ‘나와 너의 관계인 거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것도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다. 하느님은 그들을 선택하기로 선택했고 그들은 선택되기로 선택한 것이다(they chose to be chosen)!

하느님의 권위와 힘은 강제력과 구별해야 한다. 하느님의 힘은 사람이 올바르게 행하는지 여부와 뗄 수 없이 관련되어 있다(7). 이럴 때 의존이란 말은 적절하지 않아 보이지만 내용상으론 그렇다. 세상질서는 사람들이 계명을 준수하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그래서 만일 네가 올바르게 행한다면이란 문장이 매우 중요하다. 세상질서가 여기에 기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올바르게 행하도록 가인을 강요하진 않았다. 하느님은 그의 도덕적 결단을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도 않았다. 가인조차 하느님의 정당한 파트너로 존중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하느님의 전능(omnipotence)은 사람과의 끊임없는 소통을 통해 하느님이 할 수 있는 모든 조절과 통제를 포기하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무능(impotence)은 전능(omnipotence)의 한 부분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가인은 아우를 죽이고 추방당해 하느님 없는 땅을 방황했다. 마지막 절은 그가 에덴 동쪽 땅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게 무슨 방랑인가! ‘땅에 정착했다면서! 그런데 이란 말이 히브리어 방랑하다의 언어유희라면 어떤가? 그가 정착해서 방황했고 방황하며 정착했다는 뜻으로 읽어야 할까. 이 얘긴 끝까지 멋을 잃지 않는다!

 

곽건용/나성 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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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자기 형제에게

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4)

한 남자가 자기 형제에게

 

1. 성서 히브리어 본문에 니오는 “이쉬 엘-아키브”(ish el-achiv)라는 표현은 글자대로는, “한 남자가 자기 형제에게”라는 말이다. 이 표현은 일반적으로는 동사를 수식하는 부사적 기능을 지닌 것이어서 우리말 번역에서는 부사 “서로”라는 말로 번역이 된다. 다음 예에서 그 현상을 볼 수 있다.

《개역》 창세기 37:19
“[요셉의 형들이]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개역》 창세기 42:21a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개역》 출애굽기 16:15a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개역》 출애굽기 25:20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개역》 민수기 14:4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2. 위에 인용된 예문에서 보는 “서로”는 모두 히브리어 “이쉬 엘-아키브”를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개역》이 때로는 이 히브리어 표현을 글자 그대로 번역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개역》 이사야 9:19
“만군의 여호와의 진노로 인하여 이 땅이 소화(燒火)되리니
백성은 불에 타는 섶나무와 같을 것이라
사람이 그 형제를 아끼지 아니하며.”

아마 위에서 본 예들을 따라서 번역한다면 이것 역시 “사람이 서로 아끼지 아니하며”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New English Translation(2004)은 이것을 관용구 “one another(서로)”라고 번역하였다. 


NET Isaiah 9:19
“Because of the anger of the LORD who commands armies,
the land was scorched, and the people became fuel for the fire.
People had no compassion on one another.”

실제 내용은 땅에 기근이 들어 사람이 사람을 서로 잡아먹는 형편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The English Bible in Basic English(1949/1964)은,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사람이 서로 사람을 잡아먹었다고 번역한다.

BBE  Isaiah 9:19
“The land was dark with the wrath of the Lord of armies:
the people were like those who take men’s flesh for food.”

사해사본 이사야서 두루마리 1QIsab

 

3. 같은 히브리어 본문을 글자대로도 번역하고 관용구로도 번역하여 한 표현을 두 번 번역하는 것을 중복(重複)번역이라고 하는데, 번역에 따라서는 그런 예도 보인다. New American Bible(1991,1986,1970)에서 우리는 이러한 중복 번역의 예를 본다. 이사야서 9:18의 히브리어 “이쉬 엘-아키브”를, 같은 절 안에서, 한 번은 “어떤 남자도 자기 형제를 아끼지 않았다”라고 번역하고, 이어서 “각자가 자기 이웃을 잡아먹었다”고 반복하여 번역한다. 

NAB Isaiah 9:18
“At the wrath of the LORD of hosts the land quakes,
and the people are like fuel for fire;
No man spares his brother,
each devours the flesh of his neighbor.”

우리말 《개역》에서도 가끔 이러한 중복 번역 현상을 볼 수 있다. 예레미야 23:35에서 “이쉬 엘-아키브”가 “서로”라고 번역되면서 동시에 “형제에게”라고 거듭 번역된다.  

《개역》 예레미야 23:35
“너는 또 말하기를 너희는 서로 이웃과 형제에게 묻기를
여호와께서 무엇이라 응답하셨으며 무엇이라 말씀하셨느뇨 하고.”

4. 히브리어 표현 “이쉬 엘-아키브”가 우리말 번역에서 생략된 경우도 있다.

《개역》 예레미야 25:26
“북방 원근의 모든 왕과 지면에 있는 세상의 모든 나라로 (서로) 마시게 하니라
세삭 왕은 그 후에 마시리라.”

같은 히브리어 본문 번역에서 The New International Version(1973, 1978, 1984)은 부사적 기능을 지닌 “이쉬 엘-아키브”를 생략하지 않는다.

NIV Jr 25:26
“and all the kings of the north, near and far, one after the other - all the kingdoms on the face of the earth. And after all of them, the king of Sheshach will drink it too.”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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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와, 믿음으로 실패와 아픔을 이겨내다(2)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3)

 

하우와, 믿음으로 실패와 아픔을 이겨내다(2)

 

 

1. 어머니 하우와. 창세기 4장은 2장과 3장의 서술과는 달리, 하우와가 세 자녀를 낳고 키우면서 일상의 희노애락을 경험하며 살던 한 평범한 어머니였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 하우와가 신앙적인 여인이었음을 보여준다. 하우와는 셋째 아들인 셋을 낳고 난 다음에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25절).

 

하우와가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의 이름을 '셋'이라고 짓고 나서 그렇게 이름을 지은 이유를 밝히는 장면이다.

 

2. 이것과 비슷한 구절이 4장 1절에도 나온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우와와 동침하매 하우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우리는 이 두 절이 닮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래서 창세기 4장은 첫아들을 낳은 다음 하우와가 하는 말로 시작해서 막내 아들을 낳은 다음 하우와가 하는 말로 끝난다. 그렇기에 4장 전체의 주인공은 다른 사람이 아닌 하우와이다.

 

3. 우리는 이 구절에서 하우와의 깊은 신앙을 엿볼 수 있다. 하우와는 자기 아들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결코 심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아들이 태어나는 일을 중대한 사건으로 보고 그 사건을 하나님의 사건으로 해석한다. 하우와는 가인을 낳을 때도 그랬고 셋을 나을 때도 그랬다. 하우와가 아들 낳은 것을 하나님의 사건으로 해석하는 것이 창세기 4장에 두 번이나 나오고, 그것이 4장 맨 앞부분과 뒷부분에 나오고 있다는 것은 그녀가 언제나 그랬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창세기 4장에 나오는 비극적인 사건들을 하우와의 신앙고백으로 끌어안고 있음을 알려준다.

 

Emil Nolde - Verlorenes Paradies (Paradise Lost) (1921) Oil on canvas, 106 x 157 cm

(출처: Playing Futures: Applied Nomadology (http://www.flickr.com/photos/centralasian))

 

 

4. 우리는 여기서 하우와의 새로운 모습을 본다. 이 구절에서 우리가 만나는 하우와는 얼마나 신앙적인 인물인가? 우리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신앙심 깊은 한 여인을 만난다. 자녀들로 인해 아픔을 겪으면서, 그것을 신앙으로 극복해내는 한 어머니의 모습을 본다. 지금까지 성경에 묘사되어 있는 하우와를 어떻게 생각했는가? 우리와 같은 한 인간으로 생각한 적이 있는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하고 노래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그런 하우와를 생각한 적이 있느냐는 말이다. 본문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하우와의 기쁨과 슬픔을 살려내는 것, 그래서 그를 한 인간으로 경험하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성경독자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5. 4장 처음 부분과 마지막 부분 사이에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극적인 사건이 나온다. 물론 이 사건의 주인공은 가인이다. 그래서 성경은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다보니 이 사건으로 인해서 아담과 하우와가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는지에 대해서는 본문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을 밝혀내는 것이 바로 독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성경이 표면적으로 말하는 바를 꼼꼼하게 읽어내야 할 뿐만 아니라, 성경이 침묵으로 전달해주는 정작 더 귀중한 메시지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아니, 본문에 등장하는 아담과 하우와가 우리에게 조용히 들려주는 말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

 

6.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우리는 이 말에서 아들을 낳은 한 어머니가 지르는 환호성을 듣는다. 하우와는 가인을 낳고 얼마나 기뻐했을까? 물론 아벨을 낳은 후에도 그런 맘이 들었겠지만, 아벨을 낳고 그런 말을 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하우와가 가인을 낳고 얼마나 기뻐하고 감격하고 감사했는지 알 수 있다. 하우와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장면을 읽을 때, 무덤덤하게 읽을 수가 없다. 우리와 똑같은 한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7.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이 말을 하는 하우와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하나님이 주신 아들. “아 하나님이 아들을 주셨다.” 기쁨에 넘쳐서 외쳤던 그 아들이 사랑하는 둘째 아들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멀리 떠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하우와는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을까? 또 피 흘린 채 죽어있는 둘째 아들 아벨의 시신을 끌어안고 하우와는 얼마나 가슴 아파했을까? 고통당하는 하우와. 그러면서도 그 모든 일들을 신앙으로 이겨내는 하우와. 그 하우와의 모습을 생생하게 느껴야 한다.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던 하우와. 아들 낳은 일을 하나님의 사건으로 해석해내고 모든 아픔을 신앙으로 이겨내는 하우와는 분명히 신앙심 깊은 인물이었다. 이 하우와가 창세기 4장을 지배하는 무서운 증오와 죽음을 신앙으로 끌어안아서 녹여내고 있다.

 

8. 아담과 하우와가 낳은 셋째 아들은 누구인가? ‘셋’이다. ‘셋’의 뜻이 무엇인가? ‘대신한다’이다. 셋은 가인과 아벨을 대신하는 아들이다. 셋은 가인과 아벨로 상징되는 증오와 죽음을 대신하는 아들이다. 그렇기에 아담과 하우와가 아들을 낳은 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그 증오와 죽음을 넘어서서 새로운 사랑과 삶으로 나아가는 사건이다.

 

9. 셋이 태어난 것은 증오와 죽음의 현장, 증오와 죽음의 시대를 넘어서 사랑과 삶의 시대로 나아가는 사건이다. 만약 셋이 탄생해서 에노스로 그 계보가 이어지지 않았다면, 증오와 죽음이 세계를 지배하고 비극의 역사가 계속되었을 것이다. 가인에서부터 라멕까지 이어지는 증오와 죽음의 역사를 문학적으로 단절하는 것이 바로 ‘셋’의 탄생이다.

 

10. 창세기 4장의 구성을 보면, 증오와 죽음의 역사는 셋의 탄생으로 일단 끊어지는 구조를 보인다. 4장 3절부터 15절까지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이야기이고, 16절부터 24절까지는 가인과 그의 후손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야기는 라멕이 부르는 증오와 죽음의 노래로 종결된다. 그래서 4장 3절부터 24절까지가 증오와 죽음의 이야기이다. 이 비극적인 이야기들을 감싸는 것이 바로 아들들의 탄생과 하우와의 신앙고백이다.

 

 

이종록/한일장신대학교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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