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하는 안으로의 여행(4)


그대 영혼의 수심(水深)은?



* 영원한 현재를 살라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 속에 계십니다.

영이 매순간 영원한 현재 속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절대로 늙지 않을 것입니다.


아주 오랜 옛날, 세 젊은이가 있었다.

둘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고, 하나는 아직 수태조차 되지 않았다.

지독한 가난의 고통에 시달리게 된 그들은 ‘공허’(空虛)라는 도시를 아주 떠나기로 작정했다. 긴 여행 중에 피곤에 지친 그들은 세 그루의 나무 그늘에서 쉬게 되었는데, 그 중에 두 그루는 흙에 심겨진 적이 없었고, 한 그루는 아직 싹도 나지 않았다.

그 나무 그늘에서 쉬면서 나무에 달린 열매를 먹고 기운을 차린 그들은 다시 길을 걸어 세 개의 강가에 이르렀으나, 그 중에 두 강은 애초부터 물이 없었고, 또 한 강은 바짝 말라 있었다.

그들은 다시 그 강가에서 타는 목을 축인 다음 보트 세 척에 나눠 타고 강을 건넜는데, 이번에는 보트 두 척이 아예 있지도 않았고, 한 척은 바닥이 텅 비어 있었다.

이렇게 숱한 고생을 하고 나서 세 젊은이는 ‘미래’(未來)라는 도시에 이르러 세 채의 집에 기거하게 되었지만, 그 중의 두 채는 아직 터도 닦지 않은 상태였고, 한 채는 아예 벽도 없었다.

그들은 그 후 그 ‘미래’라는 도시에서 줄곧 살았다.

―스와미 웨다의 <만개의 태양>에서

읽는 이를 황당하게 만드는 이 이야기는, 스승이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이지 싶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이, 있지도 않은 나무 그늘에서 쉬고, 달리지도 않은 열매를 따먹고, 물도 없는 강을, 있지도 않은 보트를 타고 건너가, 터도 닦지 않은 집에서 산다는 이 이야기는 얼마나 황당한가.

하지만 스승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근심을 밥 먹듯 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바로 그와 같다는 것을 일깨우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현실을 살며 겪는 마음의 불안과 근심은, 이 우화에 나오는 ‘공허’라는 도시, ‘미래’라는 도시와 마찬가지로 아무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근거가 없다는 말은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불안이나 근심이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이미 지나가버린 일에 연연하여 회한이나 슬픔에 잠기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가지고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것은 황홀히 누려야 할 ‘오늘’을 잃어버리는 행위이다.

신은 우리 모두에게 ‘순간’이라는 값진 보화를 선물로 주셨다. 그 선물을 우리는 잘 사용하여 풍성한 삶을 누려야 한다. 세속의 보화는 화폐단위로 세지만, 우리 생의 보화는 ‘순간’이라는 단위로 센다. 돈은 다 쓰더라도 다시 벌 수 있지만, 순간이라는 보화는 한 번 쓰면 다시 벌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는 한 번 쓰면 다시 벌지 못할 순간을 덧없는 불안과 근심으로 허비하는 경우가 너무 많지 않은가. 우리가 세속의 화폐를 아껴 쓰듯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 순간을 현명하게 써야 한다. 그것이 곧 ‘영원한 현재’를 사는 길인 것을!


* 접착 도사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된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요?

이것은 이단사설처럼 들립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둘이 아니라 하나와 일치만이 있습니다.

나는 나 자신 속에 있을 때보다는 사랑 안에 있을 때

더더욱 하나님이 됩니다.


상운당 형 표구가게 <祥雲堂>에 앉아 있으면 심심치 않다. 내가 좋아하는 이들의 그림들이며 글씨들을 담은 액자가 즐비하게 걸려 있기 때문이다. 천진한 아이의 모습을 그린 중광 스님의 수묵화, 판화가 이철수의 소가 수레를 끌고 가는 그림, 그리고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수묵화나 글씨 등등.

오늘도 상운당 형과 함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가게로 가서 차를 마시는데, 문득 눈길이 가는 글과 그림이 있었다.


싸움은 말리라 했지

우리말에 풀쟁이는

접착도사(接着道師)이니

너 알아서 해 이놈아

      ―無爲堂 酒中遊


이 글은 돌아가신 무위당 장일순 선생께서 표구를 하는 상운당 형을 위해 쓴 글이다. 표구를 하는 형을 두고 ‘풀쟁이’라 칭하신 표현도 재미있고, ‘접착도사’란 표현도 웃음을 머금게 한다. 나는 이 글을 보며 과연 무위당 선생다운 표현이며, 지극한 제자 사랑이란 생각도 들었다.

무위당 선생께선 상운당 형이 무슨 ‘접착’(接着)을 잘 하길 바라신 것일까.

이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와 나’를 가르고, 어떻게든 남을 짓누르고 앞서 나가려는 다툼으로 조용할 날이 없다. 해서 ‘너’는 다툼을 말리고 ‘너와 나’를 이어주고 붙여주는 ‘접착제’ 같은 역할을 제대로 하는 삶을 살라는 뜻에서 하신 말씀이 아닐까.

마이스터 엑카르트도 말했다. 둘로 가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이분법은 우리의 눈을 가려, 꽃 한 송이마저 뽐내는 존재의 신성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고.(141)

‘원주의 예수’로 불리기도 했던 무위당 선생께서는 일찍이 원주 땅에서 ‘한살림 운동’을 시작하셨다. ‘한살림’에는 이 죽임이 만연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살림’(구원)을 일구고자 하는 여망이 깃들여 있다. 즉 그 말 속에는 ‘하나님과 인간’을 잇고, ‘사람과 자연’을 잇고, ‘도시민과 농민’을 잇는, 이른바 이원적으로 나누어진 모든 것들을 하나로 잇고자 하는 염원이 담긴 것이다.

이와 같은 큰 염원을 품고 사시던 선생이시기에 상운당 형에게 그런 글씨를 써주셨을 것이다. 물론 그 간절한 염원은 상운당 형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너 알아서 해 이놈아.”

하여간 난 이 마지막 글귀를 읽으며 가슴이 뭉클했다. 평소 그분의 어투와 다정함이 묻어 있고, 또한 그 당부의 간절함이 담겨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상운당 형의 집을 떠나며 형에게 농 삼아 말했다.

“접착도사, 형수랑도 다투지 말고 잘 접착하고 사시우!”

형이 대꾸했다.

“암, 잘 접착해야지!”


  고진하/시인, 한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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