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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영의 '구약성경 속 여성 돋보기'/구약 지혜서 산책

지나치게 의롭지 말라?

by 한종호 2017. 9. 15.

김순영의 구약지혜서 산책(8)


지나치게 의롭지 말라?


사물을 판단하는 가장 우선적인 신체기관은 눈이다. 아름다움과 추함을 자각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혜 탐색도 먼저 눈에서 시작된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에게 지혜의 자리로 알려진 ‘마음’의 눈은 사물과 사건의 가장 깊은 곳까지 뚫고 들어간다. 코헬렛(전도자)이 그러했다. 그는 덧없는 날을 살면서 ‘해 아래’ 일어나는 온갖 일을 살펴보고 “보라!”는 말을 자주 했다. 게다가 그의 지혜의 말들은 학술적인 논리어가 아니고 일상의 언어다. 그 말들의 자유로운 어울림은 독자로 하여금 삶을 반추하게 만드는 놀라운 힘을 가졌다. 무엇보다 그는 ‘개념의 감옥’에 갇혀있지 않아 지혜자의 깊은 내공이 느껴진다. 그는 자유롭다. 그 내공과 자유로움은 ‘지나치게 의롭지 말라’(전도서 7:16)는 말에서 드러난다.

 


코헬렛은 지혜가 한계에 봉착하는 현실과 정의가 한계에 직면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과감하게 발설한다. 그는 그의 말처럼 ‘덧없는’ 날을 사는 동안 보고 느낀 불편한 현실과 진실 말하기에 숨김이 없다. 솔직하다.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전도서 7:15, 개역개정).


우리는 의로움과 악행에 따른 상벌을 기대하지만, 삶은 자주 우리의 기대를 배반한다. 그렇게 세상살이는 질서와 순리를 거스르는 모순과 역설로 얽혀있다. 시편의 시인들도 코헬렛처럼 불편한 현실을 피하지 않고 발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전도서 7:12-13, 개역개정).


나는 고대 히브리 시인과 지혜자의 언어에서 중대한 사실 하나를 발견한다. 그들은 삶의 모순을 보고 자유롭게 말했다. 때로는 당황스러울 만큼 솔직하다. 그러하여 희망과 현실의 괴리를 과감하게 말하는 그들의 언어는 참신하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순에 찬 현실에서 희망을 저버린 것은 아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시편 37:1-2, 개역개정).


이처럼 구약 지혜 전통의 가르침과 믿음에서 하나님의 복은 의로운 자들을, 저주는 악한 자들을 향해 있다. 이것이 지혜 가르침의 보편화된 공리다. 그러나 코헬렛은 지혜전통을 수렴하고 유지하되 보는 눈과 생각의 결이 조금 남달랐다. 인간의 지혜도 의로움도 완벽할 수 없다는 지점에서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지혜의 반성적 성찰이 시작된다. 그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지 결심했지만 지혜가 나를 멀리했다(7:23)라는 고백과 함께 지혜는 너무 멀고, 깊어 누가 그것을 발견하겠는가?(7:24) 말했던 것처럼, 결정적으로 지혜 자체의 한계를 아는 것이 지혜이듯(욥기 28:12-13), 그는 지나치게 지혜로운 것과 지나치게 의로운 것을 경계한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전도서 7:16, 개역개정).


지나친 악과 어리석음도 마찬가지다(7:17). 그것이 무엇이든 ‘지나침’은 위험하다. 때문에 그는 지혜로움과 의로움의 과잉을 문제 삼았다. 과잉, 곧 ‘지나침’은 스스로를 파괴시킨다. 이 자각은 과도한 자기 확신을 피할 수 있다. 의롭지 말라거나 지혜롭지 말라는 조언이 아니다. 의로움의 자만심을 피하라는 뜻이다. 그가 “하나를 붙잡되, 다른 것도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7:18, 새번역)라고 말한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양 극단을 피한다(7:18)라고 했는데, 지나친 의로움과 지혜를 피하는 것만큼이나 의로움과 지혜가 모자란 것도 문제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라는 명문장이 통용되긴 하지만, 코헬렛의 ‘지나침’을 경계하는 교훈이 동양 철학의 ‘중용’과 비슷하다. 중용은 중간적인 입장이나 중간 지대가 아니다. 가치판단을 삭제한 기계적인 혹은 산술적인 중간이 아니다. 중용은 가운데가 아니라 정확함이다. 양비론이 아니다. 부단히 고민하고 행동하는 참된 마음과 태도다.


동양의 사상가 순자(기원전 298-238)의 말에 따르면, 중용은 “만물을 다 같이 늘어놓고 곧고 바름을 재고 헤아리는 것”이라고 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의 ‘중용의 철학’도 비슷하다. 중용은 지나침과 모자람의 극단을 멀리하는 것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거부한다. 동서양의 고전 철학이 모두 ‘지나침’을 멀리하는 절제와 넘나듦의 삶, 그리고 바른 마음을 추구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악에서 멀리하라(잠언 4:27)는 지혜 교훈 역시 지나침과 모자람을 경계한다. 코헬렛은 일찍이 모든 것의 ‘덧없음’(헤벨)을 발설하며 ‘해 아래’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음을 자각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적절한 위치가 어디인지를 알았다. 때문에 ‘지나치게 의롭지 말라’는 것은 지나치게 자신을 자랑하거나 빛내려 하지 말고, 과도하게 맑고 깨끗한 체하며 도도하게 행동하지 말고, 분별하여 포용하는 여유를 가지라는 뜻이리라. 코헬렛이 “좋은 일만 하고 잘못을 전혀 저지르지 않는 의인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7:20, 새번역)라고 말한 이유다.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으로 인정받은 욥 역시 “죽을 인간이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겠는가?”(욥기 9:1)라고 말했다. 세월이 강물처럼 흐른 후, 사도 바울이 욥과 코헬렛의 가르침을 깊이 묵상했던 것일까. 그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로마서 3:10)라고 선언했다. 그러니 ‘지나치게 의롭지 말라’는 것은 ‘지나침’이 가져올 자기 자랑과 그 위험을 자각한 균형 감각이요, 절제와 넘나듦의 자유를 표방한 가르침이다.


김순영/《어찌하여 그 여자와 이야기하십니까?》저자, 대학원과 아카데미에서 구약 지혜서를 강의하며 신학과 현실의 밀착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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