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영의 구약 지혜서 산책(13)
지고한 의인 욥과
지혜자 코헬렛이 만났을 때
구약의 지혜서 중 <욥기>와 <전도서>는 구약지혜 전승의 중심이 아니라 주변부의 시각으로 존재한다. 중심을 탈피하고 위계적인 존재 방식을 넘어 대안적인 사유방식으로 존재한다. 구약에서 이 두 권의 책은 모호성과 불가해성으로 독자를 당혹스럽게 하지만, 성급하고 억지스러운 판단과 주장을 피하도록 인내심을 길러준다. 어떤 사태의 복잡성을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거리를 두고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선사한다. 코헬렛(전도자)은 ‘미지’(the unknown)의 세계, 곧 ‘영원’ 안에서 세심하고도 열린 사고를 요청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우주와 역사의 ‘비밀’을 풀고 싶은 열정을 주셨지만, 하나님이 어떻게 일을 시작하셔서 끝내실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전도서 3:11; 8:17). 그러니 사람은 하나님의 ‘영원’의 시나리오 속에서 인간중심적인 사고의 한계를 깨달을 수밖에.
지고한 의인 욥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지혜를 찾을 수 없다고 지혜의 신비를 노래했다(욥기 28장). 광부는 숨겨진 보화를 찾기 위해 어둠과 죽음의 그늘을 뚫고 들어간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이르러 갱도를 파고 보물을 찾는다(28:4). 땅 밑에 숨겨진 청옥과 사금 같은 진귀한 보물들은 어떤 맹금류도 야수도 본 적이 없는 곳에(28:5-8) 묻혀있다. 이 숨겨진 보물들을 발견하기 위해 광부의 손은 단단한 돌들을 헤쳐 산들의 뿌리까지 뒤엎는다(28:9). 위험을 무릅쓴 광부는 ‘강들의 근원’을 파고들어가 보석을 발견하여 밝은 빛으로 가지고 나온다(28:10-11).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인간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 그곳이 지혜의 장소이며, 지혜의 길이다. 사람이 숨겨진 진귀한 보물들을 발견하여 밝은 곳으로 가져올 수 있지만(28:11) 지혜는 아니다.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이 있는 곳은 어디인고
그 길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는 찾을 수 없구나
(28:12-13, 개역개정)
“깊은 물”(‘테홈’, 28:14; 창세기 1:2), 곧 ‘원시의 바다’도 모른다. 지고한 의인 욥은(1:1, 8; 2:3) 또 묻는다.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이 머무는 곳은 어디인가?(28:20) 그가 말하기를, 지혜는 모든 생물들의 눈에 감추어져 있고, 새들에게도 숨겨져 있다(28:21). 더군다나 파괴와 황폐의 영역으로 알려진 ‘죽은 자들의 세계’도 ‘사망’도 모른다. 영원히 감춰진 지혜를 소문으로만 알뿐이다(28:22). 그러니까 지혜는 살아 있는 것들과 모든 죽은 것들에게도 감춰진 보물이다. 그러면 지혜는 피조세계 너머 어디에 있는 것일까?
윌리엄 블레이크 <욥기> 삽화
욥은 하나님만이 지혜에 이르는 길과 지혜가 있는 곳을 아신다(28:23)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땅 끝과 온 천하를 감찰하시고 살피시니(28:24), 온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지식 때문이다. 하나님이 지혜에 이르는 길과 장소를 아신다고 하니 사람 사는 땅 어디에 있든지, 아니면 어떤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우주 전체에 널리 퍼져 있는 것인지 모호하다. 그러나 욥이 하나님만 바람의 무게, 바다의 양, 비의 법칙과 번개의 길을 정하신다(28:25-26)라고 노래한 것처럼, 하나님의 지혜는 자연 세계를 보시고, 곧게 세우시고, 탐구하셔서 질서를 세우는 수단이다(28:27; 잠언8:22-31). 지혜의 원천이신 하나님만이 완벽하게 우주를 통제하시고 관리하시니 지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 전체에 널리 퍼져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사람이 지혜를 찾을 수 없다면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욥이 대답해주었다.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
(28:28, 개역개정)
말하자면 지혜를 얻는 방법은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피하는 삶에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떠나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에 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삶은 잠언을 시작하고 끝맺는 말이요(1:7; 31:30), 코헬렛의 가장 중요한 지혜 실천의 원리이며 덕목이다(전도서 8:12-13; 12:14). 그러니까 지혜는 알려지지 않는 것을 탐구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에서 시작되고 확장된다. 사람의 재능과 탐구능력이 죽음의 세계와 강들의 근원을 찾을 만큼 위대하다고 해도 ‘하나님과의 사귐’이 지혜로 향하는 길이다.
그러나 태곳적 시간, 인류의 첫 커플은 하나님만 아는 비밀의 영역을 넘보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창세기 3:6). 인류는 이후로도 끊임없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창세기 11:1-9). 결국 하나님과의 자유로운 만남은 깨졌다. 인간은 개방된 자유를 선물로 받았지만, 자유는 인간 스스로 넘어지는 시험거리가 되었다. 그래서일까. 모세는 임박한 죽음 앞에서 불평으로 얼룩졌던 광야 이스라엘 자손들을 향해 외쳤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신명기 29:29, 개역개정).
하나님이 감추신 것과 나타난 것 사이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가르침’(‘토라’)을 행실로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과의 사귐이요, 창조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리라.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은 삶의 초점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맞추고, 악을 떠나 착함을 도모한다. 지혜는 지식을 축적하는 것도, 비밀을 발견하는 것도 아니다. 지혜는 인간의 범위 안에 존재하는 것이며 착한 행동과 관련된다. 곧 현실에 뿌리 내리지 않은 신학과 실천을 낳지 않는 신앙은 지혜 없는 공허한 외침이다.
그 누구보다 현실세계의 문제점을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 질문했던 두 사람. 고대의 지혜 선생 코헬렛과 하나님이 인정하신 의인 욥이 여기 있다. 이들은 동시대를 살지 않았지만, 공유했던 지혜의 중심 신학이 있었다. 그것은 우주의 창조자 하나님을, 노예적 삶을 살며 억압당하는 자들의 ‘구속자’ 주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 하나 더. 코헬렛이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했다(전도서 7:23)라고 고백한 것처럼,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이 머무는 곳이 아디인지 알 수 없음을 노래한 욥처럼(욥기 28:12, 20), 참 지혜는 세계를 이해함에 있어 인간이 판단의 주체인양 생각하는 인간중심적인 사고의 격파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흰 눈발 날리는 12월의 거리위로 주님 예수의 강림을 기다리는 자들 속에서 천사들의 합창이 들려오는 듯하다. 위대한 지혜가 하늘을 가르고 인간의 땅 위로 내려온다고.
김순영/ 《어찌하여 그 여자와 이야기하십니까?》저자, 대학원과 아카데미에서 구약 지혜서를 강의하며 신학과 현실의 밀착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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