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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영의 '구약성경 속 여성 돋보기'/구약 지혜서 산책

나의 말이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새겨졌으면

by 한종호 2017. 11. 24.

김순영의 구약지혜서 산책(12)


나의 말이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새겨졌으면


글 쓰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자기 이름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쓴다. 또 누군가는 입신출세의 길이어서 쓴다. 스스로의 즐거움을 위해 쓰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는 글을 쓰지 않고서는 못 배기기 때문에 쓴다. 글을 쓰지 않으면 마음속 지병이 되기 때문에 쓰는 이도 있다. 프란츠 카프카(1883-1924)는 쓴다는 것은 기도의 형식과 같다고 했다. 간절한 무엇이 있기에 글을 쓴다는 것인데, 그러면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만을 위한 행위일까? 글쓰기가 자신의 존재이유인 사람도 있지만, 인류에 대한 연민 때문에 글을 쓰는 이도 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글쓰기는 자신의 결백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불멸의 기록이 되기를 염원했던 한 남자를 향한 연민 때문이다.


죽음을 갈망했던 남자


옛날 아주 먼 옛날 ‘우스 땅에’ 욥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살았다(욥기1:1). 그는 사해 남쪽 에돔 지역 어디쯤으로(창세기36:28) 추측되는 우스의 시민이었다. 그의 시대, 지역, 어떤 집안의 사람인지, 이름의 뜻도 정확히 알려진 바 없으나 하나님이 승인하신 당대의 의인이었다(1:1, 16). 자녀는 아들 일곱에 딸 셋이 있었으니(1:2) 이상적이고 완벽한 가족 그 자체다. 그러나 느닷없이 닥친 재난과 불행은 그를 처참한 상태로 몰아갔다. 모든 재산과 자식을 잃고(1:13-19), 심각하고 끔찍한 피부병에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2:7-8). 이것은 하늘 위에서 벌어진 하나님과 사탄과의 일종의 ‘내기’에서 시작된 일 때문이었다(1:8-11). 그러나 하늘 위를 볼 수 없는 욥은 자기의 불행과 육체적인 고통의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래도 그는 불행과 고통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복과 화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고백하며(1:21; 2:10) 순응했던 아버지였고, 남편이었다.


어느 날, 고통당하는 욥을 위로하기 위해 친구들이 찾아 왔다. 친구들은 경악했다. 그들은 처참한 욥의 모습을 보고 일제히 소리 지르며 울고 겉옷까지 찢으며 죽은 자를 애곡하는 의식처럼, 욥의 고통에 동참했다. 친구들은 욥의 처절한 고통에 차마 말도 못하고 칠일 동안 침묵의 시간을 보낸다(2:11-13).


그런데 욥에게 어떤 마음의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욥이 친구들과 긴 침묵의 시간을 보내고 발설한 첫 마디는 ‘자기저주’였다. 욥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며 삶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충격에 휩싸였다. 욥은 태어난 날과 수태되던 밤을 저주했다. 그 밤이 현재 자신이 겪는 슬픔을 막아주지 못했다고 생각해서였다(3:1-10). 욥은 출생 당시 죽지 않아 안식할 수 없었던 것(3:11-19), 그리고 내면에 차오르는 두려움과 비탄은 죽음을 갈구하는 탄식의 소리로 분출했다(3:20-26). 신체적인 고통이 커지면서 고뇌의 깊이도 깊어졌다. 욥은 왜 자신이 끔찍한 고통에 던져졌는지 도무지 답을 구하지 못해 답답했다. 그의 탄식은 숨겨진 자기의 길에서 삶의 방향감각을 잃고 분출하는 믿음을 위한 투쟁이었다. 그는 갑작스러운 재난과 고통을 이해하려고 분투했고, 솟구치는 의문들을 쏟아내며 과감하게 항변했다.


그러나 욥의 항변과 탄식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는 친구들(엘리바스와 빌닷, 소발). 그들은 욥의 고난이 밝혀지지 않은 욥의 죄 때문이라고 추정하며 죄인으로 몰아세우기까지 한다. 위로자로 왔던 친구들은 더 이상 위로자가 아니다. 친구들에게 욥의 내적투쟁과 불평의 언어들은 전통적인 지혜가르침과 보응신학을 변개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며, 평화를 깨는 위험한 사상가로 보일 뿐이다. 때문에 친구들은 욥에게 마음을 돌이켜 순응하고 회개하라고 화려한 신앙의 언어로 집요하게 설득한다.

그러나 욥은 부당하게 느껴지는 고난은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억울하게 둘러막고 불공평하게 대하시고 박해자가 된 것임을 친구들이 제발 알아주길 바란다(19:6). 욥이 하나님을 고발한 셈이다. 욥은 폭행을 당해 부르짖어도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 불운한 시민처럼, 어둠에 갇힌 여행객처럼, 굴욕을 당하는 왕자처럼, 뿌리 뽑힌 나무처럼, 전쟁터의 적군처럼, 적군에게 포위당한 도성처럼(19:7-12) 하나님이 자기를 다루시는 것처럼 느낀다.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 <욥기> 삽화


아, 모두가 나를 버렸구나!


욥은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사회적으로 고립된 외로움이 버겁다. 형제와 친척이 모두 떠나고, 자기를 멀리하며, 잊었다(19:13-14). 자신의 입김을 아내도 매스꺼워하고 등을 돌린다. 어린애들도 업신여기고 조롱한다(19:18). 마음의 비밀을 나눌 가까운 친구들조차 원수가 된 상황이다(19:19). 뼈는 살가죽에 달라붙고, 겨우 잇몸으로 연명한다(19:20). 자신이 속한 공동체 모든 구성원에게 버림받은 신세다(19:21-22). 욥이 사회적인 지위와 품위를 잃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욥은 자신을 몰아세우는 친구들에게 연민을 구한다. ‘나의 벗들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게 나를 불쌍히 여기시게’(19:21). 그러나 친구들이 여전히 냉담했던 것일까. 욥은 자신의 말이 전혀 수용되지 않는 절망의 상황에서 오직 한 분, 그의 ‘증인’과 ‘대변인’(16:21)이 되어 줄 하나님을 생각하며 자신의 말이 기록되기를 열망한다.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19:23-24, 개역개정)


욥은 “모든 시간의 횡포와 인간의 필멸성을 넘어 자신의 무죄함에 대해 증거 할 수 있는 기록”(다니엘 에스테스)을 원한다. 그리고서 욥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한다. 이 말은 기독교 공동체에서 죽음 이후 하나님을 만나는 육체적인 부활을 옹호하는 시 본문이다(19:25-27).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19:25-26, 개역개정)


“대속자”를 뜻하는 히브리말 ‘고엘’은 본래 가장 가까운 친족(형제, 삼촌, 조카 등)을 일컫는 용어다. 어떤 사람의 재산을 그 가문의 재산으로 유지시키기 위해 다시 사는 책임을 가진 ‘기업 무를 자’로서(레위기 25: 25-34), 노예가 된 친족을 도로 사서 노예가 되지 않게 하거나(레위기 25:47-54), 과부와 결혼하여 후사를 잇는 책임과 관계된 말이다(룻기 3:12; 4:1-6). 또는 살해된 친척의 피를 복수하는 ‘피의 보복자’를 뜻한다(민수기 35:12, 19-27; 신명기 19:6, 11-12). 그러니까 ‘몸값을 주고 구출하다,’ ‘다른 힘으로부터 해방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어 친족의 명예를 회복하는 방법이었다.


동시에 ‘고엘’은 법률적인 상황의 은유로서 주님께 적용되곤 한다(잠언 23:10-11; 예레미야 50:34; 애가 3:58; 시편 119:154). 특히 이사야 40-66장에서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의 ‘고엘’이다. 그러하니 구약의 맥락에서 욥이 말하는 ‘나의 구속자’(19:25)는 하나님이다. 욥은 이미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해줄 친구(6:14), 판결자 혹은 중재자(9:33), 증인과 중보자(16:20)를 기대했지만, 이 땅의 ‘고엘’이 모두 등 돌린 처절한 상황에서 자기를 구출해주실 ‘고엘’을 열망한 것이다. 욥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비현실적인 희망을 안고 확신에 차 있다. 당대에는 도무지 이해 될 수 없었던 욥의 말, 초대 교부들의 해석의 빛 아래 신약의 부활과 맞닿게 되었다. 그때는 욥이 볼 수 없었던 ‘구속자’(‘고엘’) 이름은 메시아 예수. 우리는 마지막 날에, 그가 일어나셔서 우리를 변호하실 것을 믿는다(베드로전서 1:18-19; 요한계시록 1:5; 5:9).


성탄절을 기다리는 대강절이 곧 시작된다. 자기의 말이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지길 열망했던 욥. 그가 남긴 ‘구속자’에 대한 믿음의 고백은 신앙의 후세대를 위한 거룩한 책에 불멸의 기록으로 남았고, 헨델(1686-1759)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3부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첫 곡 아리아로 숭고한 음악이 되었다. 예수의 오심을 경축하기 위한 기다림의 계절, 욥의 고백은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의 변호와 위로를 가다리는 모든 이들의 불멸의 노래가 되었다.


김순영/ 《어찌하여 그 여자와 이야기하십니까?》저자, 대학원과 아카데미에서 구약 지혜서를 강의하며 신학과 현실의 밀착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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