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6)
‘졸업’하고 ‘시작’해야 하는 것들
-「졸업생에게」 1941. 5 -
가까이 아는 아이 하나가 어린 시절 학교 부적응으로 고생을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면 ‘당연히’ 적응하기 마련인 선생님의 자리와 학생들의 자리 사이의 경계를 자꾸 넘나들었기 때문이다. 수업이 시작되고 선생님이 무언가 설명을 하실 때 그것이 자기가 잘 아는 주제이거나 다른 생각을 나누고 싶으면 서슴없이 앞으로 나와 그야말로 ‘열강’을 한다는 거다. 선생님도 반 아이들도 당황스러워 수업은 늘 ‘엉망’(다수의 표현)이 되었고, 결국 그 아이는 특수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만나면 너무나 총명하고 마음 따스한 아이였다. 하여 난 그 소식을 전해 들으며 무척이나 마음이 상했다. 사실 그 아이와 ‘어린 시절의 나’는 다르지 않았다. 나도 그런 마음이 자주 들었기 때문이다. 아, 저 이야기에 얽힌 재미있는 걸 읽었는데, 앞으로 나가서 선생님과 아이들에게 이야기해 줄까? 앗, 저 장소는 내가 아빠랑 많이 가본 곳인데, 칠판 가득 재미있는 그림과 더불어 아이들이 외우기 쉽게 설명하고 싶은데… 그런 생각들이 수업 도중에 쑥쑥 올라왔다. 어쩌면 그래서 ‘선생’이란 직업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업 시간에 앞으로 쪼르르 달려 나가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았던 이유는 교실의 자리 배치가 명시하고 있는 권위의 위계였다. 가르치는 한 사람과 배움을 받아야하는 다수, 미셸 푸코가 ‘우리 대 그들’의 통제 방식이라고 분석했던 그 공간 배치가 내 마음을 언제나 잡아챘다. 얌전히 내 자리를 지킨 ‘덕분에’ 난 일반학교를 ‘무사히’ 다닐 수 있었다. 어른이 되어 생각해보아도, 여전히 이상하다. 기초적인 것을 배워야하는 학교는 어쩔 수 없다고 치자. 전문성과 효율성을 고려한 공간 배치이니, 한창 배워야하는 아이들의 학습공간에서는 최선의, 최고의 통제 방식이라고 말한다면, 선뜻은 못해도 그럭저럭 끄덕일 수는 있다. 그러나 어른들이 모인 공간, 예를 들어 교회도, 강연장도, 세미나실도 모두 같은 배치다. 말과 행동을 주도하는 소수가 앞쪽 자리에 배치되고, 압도적인 다수는 그들을 향해 얌전히 앉는 구조다. 그게 싫은 나는, 연사로 초청받아 간 공간에서 좌석 이동이 가능하다 싶으면 종종 배치를 다시 하자고 제안을 한다. 동그랗게 말이다. 물론 그날 나눌 이야기 주제에 있어 소위 ‘전문가’의 입장이니 개념어 설명이나 주요 주제를 이야기할 책임은 나에게 있다. 그러나 같은 이야기를 해도 좌석 배치가 ‘우리 대 그들’의 구조일 때와 동그란 원일 때의 역학(dynamics)은 상당히 틀리다. 강의 도중 쑥쑥 들어오셔도 좋다고, 실은 그게 더 반갑다고 말하고 시작한 동그란 원탁 모임은 언제나 즐겁고 참신한 질문이나 새로운 해석으로 풍요롭게 채워졌다. 그러나 ‘단 하나의 선생님’으로 강단에 서고 다른 이들을 모두 ‘청중’으로 배치한 공간에서는 늘 기승전결이 모노로그다. 하긴, 퀘이커가 아닌 다음에야 설교 도중에 갑자기 나눌 이야기가 있다고 불쑥 마이크를 잡는 일반 성도를 ‘정상’이라고 생각할 리 만무하지 않은가. 전문성과 효율성을 무기로 한 권위의 배치 방식이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 그런지, 나는 김교신이 졸업하는 제자들에게 당부했던 한 이야기에 격하게 공감을 했다. 오종종 앉아 ‘전문가’인 선생님의 수업에 눈을 맞추다 이제 막 중학교를 마친 졸업생들에게 김교신은 ‘너희가 그동안 한 것은 어떻게 사전을 찾고 어떤 책과 자료들을 참고해야할 것인가’를 배운 것뿐이라고 했다. 문법을 배웠고 도구를 익혔으니 읽고 사용하는 진짜 배움은 이제부터라고 말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김교신이 일상에서의 성경 읽기를 당부하며 설명한 공부의 방법이다. 단독으로라도 가하나 될 수 있거든 두셋 친구가 모여서 ‘소인(素人)’들끼리 성서 연구를 시작하라. 적당한 친구가 없는 것을 탄식하지 말고, 없거든 친구를 만들라. 아무리 훌륭한 교회에 속하였고 고명한 교사의 강의를 들었다 할지라도 자기 스스로 성경 본문을 읽어 거기서 참 생명의 영량(靈糧)을 무궁하게 뽑아 마시지 못한다면 저는 자립한 신자는 못 되었느니라. 그 하는 말은 풍월에 지나지 못한 것이요, 그 드리는 기도는 모방 이외에 아무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몸소 성경 본문에 접전(接戰)하라. 문의(文意)가 틔어지고 흥미 나오도록 연구하라. 여기서 ‘소인’이란 비전문인을 뜻한다. 목회자도 아니고 신학생도 아닌, 그러니까 평신도들끼리의 성서 모임을 제안한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의 해석과 풀이에만 권위를 두고, 다른 참석자들은 수동적으로 그 풀이를 학습하고 내면화하는 공부는 이제 ‘졸업’을 하라는 말이다. 지금까지의 공부를 통해 기초를 배웠으니, 이제는 스스로 읽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상상하라는 제안이다. ‘풍월’이나 ‘모방’에는 생명이 없으니 스스로 서라(自立)는, 선생님의 마지막 훈계다. 너는 이제 텍스트와 콘텍스트(삶)를 붙잡고 씨름하며 스스로 답을 찾아낼 권위가 있는 존재라는 말이다.
슬프다. 어른이 되고 이제 앞에 배치된 강단에 서고 어느 분야에 대해서는 전문가로 ‘대접’받게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슬프다.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일깨워 주고, 때론 정말 낯선 모습으로 불쑥 도전을 주는 ‘너(들)’의 존재와, 함께 씨름하고 서로에게 권위를 부여하며 공부하고 싶은데… 그러려 하는 사람들이,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내 학문이 점점 더 깊어지고 고매해진 까닭이 아니다. 지식 습득의 현대적 통제 방식에 익숙해지면서, 몸매와 얼굴만 ‘착해’진 것이 아니다. 뇌까지 ‘착하게’ 순응한다. “착하다”라는 말이 이렇게나 슬픈 말인 줄 처절하게 깨닫는 요즘이다. 젊은이들이 바보라서가 아니다. ‘착하지 않게’ 내 생각을 말하고 내 주장을 펼치면, 오늘의 통치 구조에서 어떤 불이익을 당하는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기독교 평신도들의 경우는 더 안타깝다. 내 생각을 하고 내 주장을 펼칠 기회를 제공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라도 애써서 ‘졸업’할 일이다. 땅에 발을 딛고 하늘을 향해 우뚝 서 있는 유일한 직립 생명체인 ‘인간’이라면, 남이 먹여준 지식과 신앙의 언어들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일은 그쳐야하지 않을까? 이제 ‘시작’하자. 내 영혼으로, 내 몸으로 부딪히고 씨름하고 고민해서 탄생시킨 나의 의미, 나의 언어에 권위를 부여하자. 그 언어로 ‘너’를 만나자. 그렇게 우리 인생이 한판 신나는 마당놀이 같은 학습공간이기를 꿈꾸어 본다.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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