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10)
‘닮지 못한’ 세대를 탄식하다
- <초불초> 1936년 12월 -
그러고 보면 유교적 가치와 문화적 관성이 꽤나 오랫동안 남아 있는 것 같다. 명백한 현대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나조차, 어린 시절 학교에서 부모님께 편지를 쓰는 숙제를 할 때면 뜻도 모르고 ‘불초 여식’ 운운했었던 기억이 난다. 불초(不肖), 닮지 못함! ‘자식이 자신을 낮추어 표현하는 말’이라고만 알고 썼던 이 단어의 본 뜻은 ‘닮지 못했다’는 말이다. 아니, 부모보다 더 나은 자식이 있을 수도 있는 일이고, 부모의 어떤 부분은 닮으면 안 될 면도 있을 텐데, 유교 사회의 어른들은 그렇게나 자기들의 모습에 자신이 있었나? 물론 부모가 자녀를 향해 강요한 바는 아닐 지라도, 자녀들 입에서 ‘닮지 못한’ 것을 송구스럽게 여기게 된 이면에는 ‘부모의 유업이나 모습을 자식이 이어야 한다.’는 사회적 가치가 강했기에 가능했을 일이다.
하긴, 지식이나 사회적 관습이 급변하지 않고 성공의 노하우가 ‘과거’에 있던 전통사회에서는 당연한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부모의 삶, 스승의 지식은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어린 세대들이 성공적인 사회화를 위해 모방하고 본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위 ‘현대(modern)’ 사회는 그렇지 못하다. 지식도, 삶의 방식도 빠르게 ‘업데이트’ 되고 새로운 것들로 대체되기에 ‘과거’에 속하는 부모나 스승의 지식과 방식을 그대로 모방하면 ‘시대에 뒤진’ 사람이 되기 쉽다. 전통 사회의 끝자락과 현대 사회의 앞자락이 중첩되는 시점에서 살았던 김교신에게는 이 변화가 비통하게 여겨졌던 듯하다.
옛날 사람들은 그 스승을 사숙(私淑)하되 자주 꿈에 보기까지 하였고 … 학문과 덕행으로써 그 스승과 같이 되기를, 그 스승을 닮기를 원하기는 물론이거니와 … 그 스승만큼 크게 되면 족할 줄을 알았다. 이제 현대인들을 살피건대 ‘초(肖)’자는 저들의 자전(字典)에서 도무지 삭제하여 버린 것 같다. 꿈에 그 스승을 사모하기는 고사하고 의식세계에서도 그 스승을 본받으려는 생각이 추호도 없을 뿐인가, … 기어코 [스승의 것]을 말소 세탁하여 버리지 않고는 안심치 못하는 듯하다. 그러므로 그릇되어서 남의 자녀를 가르치는 일을 담당하여 본 자는 오리알 깐 암탉의 비애를 느끼지 아니치 못한다.
‘오리알 깐 암탉의 비애’라… ‘닮은 생명’을 낳아보려고 가슴에 품고 정열로 가르친 제자들이 스승과는 다른 가치를 추구하고 스승의 삶과는 다른 삶을 동경하는 모습을 보며, 김교신은 비애를 느꼈었나 보다. 유한한 인간으로서 어찌 ‘내 지식과 내 가치와 내 삶의 지향점이 반드시 옳고 본받을 만하다’고 자랑할 수 있을까? 그러나 본디 선생된 자의 생리는 그렇다. 본인이 옳다고 믿고, 가치 있다고 여기고, 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진심을 다해 후학들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것! 그리고 졸업 무렵이나 혹은 먼 훗날이라도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후학들을 보며, 혹은 그리 ‘닮으려 애쓴다.’는 후학들의 편지를 받으며 뿌듯하고 감격하고 삶의 보람을 느끼는 법이다.
물론 훗날에 김교신의 삶과 지식에 고무되어 스승의 삶을 이어간 후학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김교신은 미처 몰랐기에 이런 비통함을 글로 남겼으리라. 그러나 그가 교단에 선지 거의 10년쯤 되는 시점에서 쓰인 이 글로 미루어보면, 온 힘으로 애써 외쳤던 가르침이 학생들의 마음 밭에서 결실을 맺지 못하고, 오히려 그가 염려하고 경계하는 삶의 방향을 선택하는 모습을 직면했던 것 같다. 그의 시절은 비단 현대성의 문제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권력자가 되고 사회적 성공을 얻으려면 ‘일본제국주의’적 시스템과 이를 정당화하는 지식으로 무장해야했었을 시대였다. 김교신이 그런 시스템을 동조했을 리 없고 이를 정당화하는 식민사관을 가르쳤을 리 없으니, 그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선택을 하는 많은 학생들을 보았을 김교신은 ‘오리알을 품고 병아리가 되기를 꿈꾼’ 슬픈 암탉이 맞다.
제자가 스승을 닮고자 안 하는 일은 오히려 용납할 수도 있는 일이다. 본래 오리알이었으니 오리가 제 물로 갈 것은 차라리 당연한 일이다. 달걀이 오리알로 변화하는 일은 더욱 비참한 광경이니 그것은 근래의 자녀들이 그 부모에 대한 일이다. … 이전 사람 아들들은 그 눈썹이 관우의 눈썹 같기를 요구하지 않았다. 오직 자기 아버지의 눈썹 같았으면 만족이요 자랑이었다. 옛날 딸들은 그 입술이 양귀비의 입술 같기를 기약하지 않았다. 다만 자기 어머니의 입술 같으면 만족이요 자랑이었다. 하물며 그 심정과 재조(才操)에 있어서야 더 말해 무엇하랴. 저들이 편지마다 ‘불초자식’이라고 써온 것은 닮지 못한 부분에 대한 심통(心通)의 탄식이요 닮고자 하는 용약(勇躍)의 몸부림이 글자 안에 들어차 있었다. 그런데 이 시대의 자녀들은 어떠한가. 자기 아버지 얼굴보다도 러시아의 이마 벗어진 인물이 아니면 이탈리아의 맹견 같이 생긴 자의 초상을 좌우에 걸고 닮기를 노력하는 아들들이 어찌 그리 많으며, 자기 어머니가 황인종인데 불만하여 얼굴에 회칠하지 않고는 불안하며, 여배우의 초상에 따라 유선형의 눈썹을 그림으로써 그 어머니의 눈썹과는 판이하게 만들지 않고는 수치를 느끼는 딸들이 어찌 그리 많은가!
김교신이 21세기 대한민국의 사회 상황을 못 본 것이 차라리 다행이다. 어디 눈썹만 판이하게 다른가? 다르게 그리기만 한 것으로도 이렇게 애통하는 그가 ‘성형공화국’라 불리는 오늘의 세대를 본다면 그 성정에 화병을 얻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놀라운 의료기술과 HD 고화질로 안방까지 찾아오는 영상매체의 발달 덕분에, 요즘 딸들은 아예 얼굴 자체를 ‘여배우의 초상에 따라’ ‘갈아엎는다.[요즘 아이들의 표현이다.]’ “김태희처럼 해 주세요.” “저는 송혜교요.” “한예슬이랑 똑같이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닮지 못해’ 송구해해야할 얼굴들의 이름이다. ‘불초 소생’이란 표현은 이제 낳아주신 부모님이 아니라, 곁에 서면 순식간에 우리를 ‘오징어’로 만드는,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배우와 모델들에게 쓰게 생겼다.
물론 스승으로서, 부모로서, 김교신이 자신만만하여 이렇게 통탄한 것은 아니었다. <초불초>라는 제목으로 쓴 이 글의 말미에서 김교신은 육신의 부모나 지식의 스승을 ‘넘어’(초월하여) 정말 ‘닮지 못하여’ 송구해야할 존재로 도약해간다.
세상의 제자들은 스승을 본받지 말고, 자녀들은 부모를 닮지 말라. 우리는 옛 사람의 일원으로 사도 요한과 함께 원하노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오직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 참 모양을 볼 것을 인함이니라.”(요한1서 3:2) 부모를 닮으려고 특히 영의 아버지를 닮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평생 사업일진저.
낳아진 이는 낳은 이를 닮는 법인데, 결국 인간이 궁극적으로 닮고자 애써야하는 존재는 하나님이시라는 그의 신앙고백이다. ‘불초’를 논하는 옛 사람 취급을 하려면 그리 하라. 여전히 나는 생명을 낳아준 이, 지식을 전해준 이를 닮으려 노력하며 살 거다. 허나 궁극적으로는 이 땅에 우리를 생명으로 낳으신 하나님, 그 분을 닮아야할 과제가 있을진대, 지금 ‘영의 아버지’를 닮지 못한(불초) 것을 송구히 여기노라. 이것이 김교신의 주장이었다.
옛 사람도 아니요, ‘나를 닮아라.’ 그리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부모나 스승된 이도 아니지만, 김교신의 이 마지막 주장만큼은 내 마음을 같이 한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시고 어머니 되신다는 고백은, 우리가 하나님을 ‘닮으려’ 사모하고 본받으려 해야지, 세상을 쉽게 살고 높이 살게 해달라 졸라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불초, 하나님 앞에 우리는 항상 ‘불초 소생’이다. 오늘 하루도 생명을 낳으시고 기르시고 보전하시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닮아, 작게나마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삶을 ‘과제’로 삼을 일이다.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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