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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용의 '말씀 안으로'

A Time to Kill

by 한종호 2018. 1. 17.

A Time to Kill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 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누가 10:29-37)


“그 날도 역시 햇살은 눈부시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한 어린 소녀는 구릿빛 피부를 햇살에 노출시키며 가게로부터 집으로 오던 길이었습니다. 그때 그 아이의 뒤를 추적하던 트럭이 아이의 길을 막아섰고, 그곳에서 내린 두 명의 건장한 사내는 아이를 노리갯감으로 만들며 자신들의 욕구분출을 위한 대상으로 삼아버립니다. 아이를 폭행한 이 두 사람은 이내 구속되었고 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아이의 폭행사건으로 이성을 잃은 아이의 아버지는 재판을 받기위해 법원으로 들어서던 2명의 남자에게 기관총을 난사합니다. 이제 역으로 피해자의 아버지였던 이가 새로운 피의자가 되어서 차가운 감방 속에 갇히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존 그리샴(John Grisham, 1955~ )이라는 작가가 쓴 한 소설의 도입부입니다. 그리고 그의 소설은 같은 이름의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과도 같은 “A Time to Kill”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전히 백인 우월의식이 강하게 남아있는 미 남부 미시시피 지역을 무대로 해서 그리샴은 법정소설이라는 틀 속에서 미국사회의 매우 민감한 문제들 중의 하나인 흑백문제를 긴장감 넘치게 그려냈습니다.


조엘 슈마허(Joel Schumacher, 1939~ )감독이 연출한 영화 역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감독은 치밀한 법정공방과 양자의 심리 대결 등을 적절히 배치하며, 영화 내내 긴장감이 약해지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덕에 관객들은 영화 전편에 흐르는 법 판정의 진실성과 미국사회 내 흑백이 공생할 수 있는 길에 대한 고민을 덤으로 선물 받게 됩니다. 그렇게 영화는 단순한 법정 드라마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연속된 두개의 사건 때문에 촉발된 인간사회의 ‘함께 하는’ 혹은 ‘함께 해야만 하는’ 이유와 방법에 대한 고민을 관객들은 끊임없이 강요받게 됩니다.


저는 이 영화를 두 차례 관람했습니다. 그때마다 제 눈에는 어김없이 성서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오늘 함께 읽은 누가복음서 10장에 등장하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예화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매질하여 반쯤 죽여 놓고 물러갔습니다. 그런데 마침 어느 제관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도 피해 지나갔습니다. 마찬가지로 레위사람도 그곳에 오게 되었는데 보고서 피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어느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던 중 그곳에 와서 보고는 불쌍히 여겨, 다가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그의 상처를 싸매주었습니다. 그러고는 그 사람을 제 짐승에 태워 그를 여인숙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다음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인숙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당신에게 갚아드리겠어’ 하였습니다.”


누가복음의 이 대목은 예수에게 영생의 문제를 질문하는 한 율법학자의 대화록의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에 대한 질문을 받자 예수는 곧바로 그 물음을 되받아 치십니다. “성서에 무어라 기록되어 있습니까?” 그러자 질문자는 거침없이 예수의 물음에 답을 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네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율법학자의 대답은 두개의 중요한 성서적 전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전반부 하나님에 대한 부분은 신명기 6: 4-5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인데, 일명 ‘셔마’로 불리는 유대인들의 ‘신앙 고백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고백문을 아침, 저녁으로 암송합니다. 그리고 후반부 이웃사랑에 대한 부분은 레위기 19: 18의 인용문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영생에 이르는 최선의 방법임을 천명한 율법학자에게 예수는 다음과 같이 대꾸하십니다.


“바로 대답했습니다. 그대로 행하십시오. 그러면 살게 될 것입니다.”


거의 동일한 대화록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 12:28-34은 대충 이 부분에서 예수와 율법학자의 대화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자신이 채집한 예수에 대한 특수 자료를 이 대화록에 삽입시킴으로써 이 부분에 대한, 즉 ‘경천애인’敬天愛人, 하나님과 이웃사랑에 대한 예수 자신의 생각을 보다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누가의 배려 때문에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아주 매력적인 예화를 선물로 받게 됩니다.


이 예화는 영생의 방법을 알았지만, 구체적인 실천행위에 대해서 막막했던 한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세상에 등장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영생을 얻는 최선의 방법’임을 익히 알고 있었는데도 율법학자의 질문은 좀처럼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그의 질문은 분명합니다. 그에게는 자신이 사랑해야 할 하나님에 대한 자의식은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사랑에 대한 대상으로 야훼 하나님에 대한 목적의식 역시 또렷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 쪽으로 가면 좀 애매해집니다. 유대인의 선생임을 자임했던 율법학자에게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매우 분명했고 확실했던 것에 반해, ‘이웃’이라는 대상은 무언가 ‘규정’과 ‘제한’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제 주변의 모든 사람을 제 이웃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들 중에는 가족도 있고, 친척도 있고, 때로는 사업상 만나는 이들, 공적인 만남 외에는 특별한 관계를 지속시킬 필요조차 없는 사람들. 그리고 개중에는 이웃이라고 보기에는 경쟁자, 대적자, 혹은 원수에 가까운 사람들도 있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저는 저의 이웃을 어떤 영역 안에 규정해야 합니까?”


율법학자의 ‘이웃규정’에 대한 반문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답변이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부분 중의 하나입니다.


누가 ‘이웃’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그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후 등장하는 예수의 답변을 추적할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은 바로 ‘누가 내 이웃인가?’라고 하는 이 율법학자의 질문입니다.


이 점을 직시하고 있다면, 우리는 예수의 예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무게중심을 재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제관·레위인·사마리아인”으로 점증되어가는 드라마틱한 인물성정에 더 많은 관심과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래서 마땅히 ‘이웃사랑’을 업으로 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이웃을 등한시하고, 오히려 유대계 이웃들로부터 이웃으로서의 관심마저 빼앗기고 사는 일종의 버림받은 이웃인 사마리아인의 선행을 통해, 보다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는 현장, 그래서 우리는 쉽게 구호처럼 이렇게 외치게 됩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따르자!!”


그러나 여기에서도 여전히 문제는 남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웃은 누구였단 말인가? 따지고 보면, 예수의 예화 속에 등장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만난 이웃은 제관의, 그리고 레위인의 이웃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혹 “누가 내 이웃이냐?”라는 애초의 질문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누가가 전하고 있는 예수의 최종선언은 이 부분을 보다 분명하게 만들어 줍니다.


“당신은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맞은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합니까?”


대화를 정리하려는 예수의 최후 질문입니다. 예수의 이 질문은 애초에 제기되었던 율법학자의 질문에 문제가 있었음을 확인시켜주는 대목입니다. 율법학자는 “어느 대상이 자신의 이웃이 되는가?”를 물었지만, 예수는 이웃이란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대상의 이웃’이 되어줄 때 형성되는 ‘관계의 결과’임을 역설하고 계십니다!


이웃이란 이미 주어져 있는 ‘타자적 대상’이 아니라, 내 밖에 서있는 저 사람이 바로 나의 이웃이 아니라, 그를 이웃으로 ‘고백’하고 그에게 다가서는 나의 구체적인 ‘행위’와 ‘실천’ 속에 ‘이웃관계’가 이루어진다고 예수는 선언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예수의 예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기 극적인 반전을 도모키 위한 작위적 설정일 뿐, 그 인물들 자체의 본래적 비중 찾기는 별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가 제관이든, 레위인이든, 사마리아 사람이든 간에 보다 이 예화를 값지고,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쓰러진 강도만난 이에게 이웃으로 다가서고 있는 ‘한 인물’일 뿐이지, 그 인물의 신분이나 지위는 결코 아닙니다.


오늘 예화 속에 그 인물은 사마리아 사람으로 옷 입고 있지만, 때로 그 인물은 레위인이기도 할 것입니다. 제관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 자신이기도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이의 고통에 사무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과연 누가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타인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 바로 그가 이웃이 될 수 있고, 또 이웃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람의 신음소리가 단지 묻혀 지나는 잡음으로만 멈추어 있을 때, 그에게 이웃이란 너무도 멉니다. 저기 쓰러져 피 흘리는 누군가가 단지 대상으로만 읽혀진다면 그에게 더 이상의 이웃이란 찾아내기 곤란할 것입니다, 지금도 세상 구석구석에서, 지구 골목골목마다 신음하며 쓰러져 있는 이들의 고통을 읽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이웃이란 머나먼 이야기일 뿐입니다.




다시 영화 ‘A Time to Kill’로 돌아옵니다. 피의자를 살해한 칼리의 변호사인 브리갠스는 사건 종료 시까지 단 한 가지 사실만을 위해 백방으로 애쓰게 됩니다. 백인우월의식이 상대적으로 강하고, 또 보수적인 남부지역에서, 그리고 심지어 배심원 전원이 백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상태에서, 딸아이의 폭행 앞에 이성을 잃고 살인을 저지른 한 흑인 아버지의 심정이 읽히도록 하는 일,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브리갠스의 노력은, 흑백의 이념적, 인종적 갈등과 날카로운 편견과 대결의식에 파묻혀 점점 힘을 잃게 됩니다. 사람들은 갈수록 거대담론에 파묻혀 한 인간의 모습보다는 조직과 이념의 대표자로서 칼리를 해석하려 합니다. 치고받는 법정에서의 공방은 때론 피의자에게 때론, 검사측에 유리한 방향이 서로 오가는 형국입니다.


드디어 최후진술만이 남아있습니다. 이미 자신감을 잃고 절망의 늪에 빠져있던 변호사 브리갠스는 최종변론을 위해 입을 엽니다. “법의 눈도 사람의 눈을 가져야 한다”고 운을 뗀 브리갠스는 짧지만 매우 강렬한 최종변론을 이어갑니다.


“한 이야기를 들려드리죠.. 제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모두 눈을 감아주세요. 그리고 제 이야기와 더불어 여러분 자신의 소리를 들어주세요. 그래요 눈을 감아주세요. 어느 날 오후, 가게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어린 소녀가 있습니다. 갑자기 트럭이 서고, 트럭에서 내린 건장한 두 남자는 그 아이를 잡습니다. 근처로 그 아이를 끌고 가 그 애를 묶어 놓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옷을 찢어냅니다. 그리곤 번갈아 가면서 그 아이를 성폭행합니다. 술과 땀 냄새에 절인채로 말입니다. 그 일이 끝난 후 아이는 더 이상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됩니다. 그 아이 이후의 생명들과 자손을 잉태할 기회가 더 이상 그 아이에게는 없게 됩니다. 일을 처리한 두 명의 남자는 아이를 표적삼아 먹고 난 맥주 깡통들을 집어던집니다. 얼마나 세게 던지는지 아이의 살은 찢기고 뼈는 드러납니다. 심지어 두 사내는 아이에게 오줌을 갈깁니다. 그리고 나선 아이의 목을 매답니다. 밧줄이 있습니다. 올가미를 만듭니다. 순식간에 아이의 목은 졸리고 허공 속에 끌려 올라가 발버둥 칩니다. 그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지만 나뭇가지는 튼튼하지 못해 부러지고, 아이는 떨어집니다. 다시 두 사내는 아이를 트럭에 싣고, 다리로 가서 아이를 아래로 내던집니다. 아이는 다리 밑 9미터 아래로 떨어집니다. 그 아이가 보입니까? 성폭행 당하고, 매 맞고, 부러진 몸이요, 그들의 오줌에 젖고, 자신의 피에 젖어 죽도록 남겨진 것이 눈에 보입니까? 그 어린 소녀를 그려보십시오, 신음 속에 죽어가고 있는 그 아이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브리갠스의 구체적인 사고묘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심지어 울고 있는 배심원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 떨어지는 브리갠스의 마지막 한마디는 지금껏 받고 있던 그들의 동정심을 무더기로 싸잡아 끝 간 데 없는 골짝으로 집어던지게 합니다. 사고당시를 리얼하게 묘사한 브리갠스 변호사는 길지 않은 침묵을 끝낸 후.. 마지막 말을 청중에게 던집니다.


“그 아이가 보이십니까? 성폭행 당하고, 매 맞고, 부러진 몸이요.. 그들의 오줌에 젖고, 자신의 피에 젖어 죽도록 남겨진 것이 지금 눈에 보입니까? 그 어린 소녀를 그려보십시오.”


“그 아이를.... 그 아이는 바로 한 백인 소녀였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브리갠스의 최종 변론은 끝이 납니다. 그리고 브리갠스의 마지막 멘트는 커다란 망치가 되어 배심원과 청중들의 가슴을 흔들어 깨우게 됩니다. 폭행당한 아이가 흑인이 아닌, 백인 소녀라고 생각해 달라는 브리갠스의 최종변론은 그저 먼 남의 이야기로 저 구석에 방치되었던 한 아이의 모습을 바로 내 자신의 이웃으로 끌어오게 하였습니다. 이전에는 신문기사의 한 토막 소식으로 잊혔던 아이의 신음소리가 자기 자식의 아픔이 되어 지금 그들의 가슴을 요동치게 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잔디 깎는 기계의 굉음소리나, 지나치는 자동차의 경적소리, 혹은 힘차게 돌아가는 엔진소리 같은 정도의 의미부여밖에 받질 못했던 한 흑인 소녀의 신음 소리가 이제 날카로운 가시에 찔려 고통스러워 토해내는 ‘내 자식의 소리’로 들리게 된 것입니다.


브리갠스의 마지막 멘트는 이제 더 이상 아이를 ‘그것’이 아닌 나의 ‘이웃’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알량한 피부의 색깔이 바뀌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의 세계는 돌변하고, 요동치며 진동한 것입니다.


저 아이가 내 딸이었다면, 저 아이가 내 조카였다면, 저 아이가 내 누이였다면!!!


기껏 동물보다 조금 나은 존재로만 치부하던 흑인의 딸아이가 백인소녀가 되는 순간 그들은 잃어버렸던 이웃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전 오늘 예수의 이야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제관이든, 레위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쓰러진 이웃의 고통 소리에 응답하는 이가 바로 이웃이며, 그런 이들 야말로 영생을 가진 자들이라는 사실...


따라서 예수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이웃들의 신음소리에 민감할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신앙인의 된다는 것,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예수를 주님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내가 이웃의 신음소리에 예민하게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를 통해 이전에는 듣지 못했던 수많은 이웃들이 신음소리를 듣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도처에, 다양한 사연들로 울고 있고, 신음하고 있는 이웃들. 그들의 신음소리에 구체적으로 응답하고 도움을 주고 있는 우리의 손길과 다짐들 속에 바로 영생은 자리합니다.


우리 주변에 널려있는 수많은 신음과 호소의 웅변들.. 전에 그것을 단지 “그것”이라는 제 3자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다면, 예수로 인해 변혁된 우리의 새로운 시각은 그들을 단지 그들로만 국한시켜서는 안 되고, 그들에게 ‘인간의 이름’을 붙여주어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먼발치, 그저 3자로만 머물러있던 그들을 나의 의식과 책임의 영역 안으로 끌고 오는 일, 모셔 오는 일. 바로 그런 우리의 행위 속에 ‘이웃’은 제 얼굴을 하고 우리 앞에 있게 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제 지금이 "a Time to kill"이 아니라 "a Time to love", 그리고 “a Time to be loved”가 되는 것입니다.


정말 생각해보면, 우린 사랑하며 살기에도 너무 짧은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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