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용의 말씀 안으로(9)
예수는 먹보요, 술꾼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마태복음 11:18-19)
오래된 기억 하나를 끄집어내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봅니다. 때는 저의 대학원 시절이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그때 조교장이던 한 선배의 물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여느 때나 다름없이 학기 초가 되면 조교장이 있는 방에서 새로운 학기를 준비하는 전체 조교 회의가 열립니다. 당시 막 대학원생이 된 저는 처음으로 학과 조교를 맡게 되었고, 당연히 조교장이 있던 연구실에 처음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조교 연구실은 5~6명 정도가 함께 사용하는 그리 크지 않은 공간이었습니다. 그때 선배의 책상 앞에 걸려있던 예수님 초상화가 제 눈에 빨릴 듯 밀려들어왔습니다.
선배의 책상 앞 예수의 초상화는 제가 보아오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모양이었습니다. 그림 속의 예수는 아끼던 송아지를 후한 값에 팔아넘기고 시원한 음료 한 잔 걸친 시골 아저씨처럼 호탕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다짜고짜 저는 선배에게 그림의 진원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 선배가 말하기를, 그 예수님 초상화는 미술을 전공하는 동생이 연필로 그려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뒤늦게 신학을 시작하는 자신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그 선배의 자리를 노려보고 있던 그 호탕한 예수의 모습은 제 뇌리에 강하게 자리 잡았고, 기존 예수의 대한 저의 생각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림이 제게 준 충격은 작지 않았습니다. 신자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그 그림을 보기 전까지 제가 품고 있던 예수의 이미지는 언제나 근엄했고, 세상의 어느 누구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교양을 갖추신 분이고, 머리에는 언제나 빛나는 아우라가 자리하고 있어 뭍 시장잡배들과는 확실히 구별되는 분이며, 얼굴에는 모나리자의 뺨을 때릴 정도의 은은한 미소가 가득하며, 또한 세상 짐을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인류를 향한 고귀한 슬픔마저 마다치 않는 납덩어리처럼 무겁고 쓸쓸한 모습의 사나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선배의 앞자리에 걸려있던 예수의 초상은 그런 기존 이미지와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그림 속 예수는 버스 정류장에서도 쉽게 만나는, 골목길 어귀에서 늘 마주치는, 공원길에서도 흔히 볼 수 있던 우리 이웃의 얼굴이었습니다. 납덩이처럼 무겁고 회색빛 가득한 쉽게 범접하기 곤란한 심각한 분이 아니라, 언제나 쉽게 그리고 가벼이 스치듯 만날 수 있는 예수의 얼굴이 그 그림 속에 있었습니다.
그 후 저는 집으로 돌아와 복음서를 뒤적이며 그 안에 그려지고 있는 예수의 모습을 열심히 훑어보았습니다. 그러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의 한 구절 속에 너무도 생생한 그분의 얼굴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분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경건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언제나 예수의 주변엔 죄인이라 불리던 세리와 거리의 여인들이 끊이지 않았고, 또한 세례자 요한처럼 정기적으로 금식하기는커녕 신랑과 함께 있는 자의 즐거움으로 포도주와 음식을 즐겼던 바로 그 분, 예수를 복음서 기자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분의 타고난 질박한 심성은 언제나 주변에 아이들이 끊이질 않게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소박하고 맑은 심성을 지닌 이들을 좋아합니다. 언제나 그늘진 모습으로 얼굴에 쌍 십자를 그리고 있는 이들에게 좀 채 아이들은 마음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공관복음은 저마다 한 목소리로 자신의 자녀에게 축복을 빌어주길 원하여 아이들을 예수에게로 데려오던 부모들의 극성을 절대로 막지 않았던 예수의 너그러움을 적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몰려드는 것을 싫어하기는커녕, 그들을 막는 제자들을 오히려 꾸짖으시는 그의 다정함을 성서는 증언합니다.
또한 그분은 유머와 재치가 넘쳐나던 분이었습니다. 그의 설교에서 넘쳐흐르는 수많은 예화를 생각해 봅시다. 마치 시인처럼, 때론 연인처럼 그분은 수채화를 그리는 화가의 마음으로 수많은 사람을 웃기고 또 울렸습니다.
세리와 죄인들 앞에서 그는 일장의 연설을 토해냅니다. 100마리의 양 중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때문에 고민하는 목자, 헌데 얼마 못가 그 잃은 양을 찾고 감격하는 기쁨의 이야기를, 잃어버린 은화를 다시 찾고 행복해 하는 한 부인네의 심정을, 그리고 잃은 아들을 찾은 후 손가락의 가락지를 빼어 그의 손에 끼우며 덩실덩실 춤을 추는 아버지의 모습을 비유로 던지시는 그 분의 감각!(누가복음 15:1-32)
현장에서 잡힌 간음한 여인의 처벌을 원하는 사람들의 험상궂은 원성을 앞에 두고도 몸을 굽혀 땅위에 천연덕스럽게 낙서를 하시는 그분의 여유! 그 밖에도 많은 곳에서 그는 웃고 마시고 즐길 줄 아는 여유 있는 사람의 얼굴로 우리 앞, 뒤, 옆에 와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어떤 예수의 이미지를 전해주건 간에 우리는 또 여전히 그늘진 예수를 고집하려 듭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들의 고집스러운 성향은 또 무엇을 의미합니까? 저는 이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잠정적인 결론을 내려 봅니다.
우리의 고정된 신앙관 속에 형성된 선입견이 오히려 생생한 예수의 모습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래서 ‘행복했던 사나이 예수’의 웃음 가득했던 즐거운 모습은 뒤로 한 채 오로지 ‘그에 대한 우리의 포장’만이 남아 납덩이처럼 무거운 그분의 겉모습을 계속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어쩌면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모습이 사실 그렇기도 합니다.
저의 신학교 생활은 이러한 기억들의 확인으로 연속되었습니다. 신학교에 갓 들어온 신입생들은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갓 스물을 넘긴 풋풋한 청년들입니다. 그러나 신학교의 분위기가 그런 것인지, 혹은 교회에서 제공하는 신앙의 모범이 그러한 것인지… 너나 할 것 없이 신학교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사람들은 이내 목사가 되고 맙니다. 깔끔한 짙은 색 계통의 양복에 반짝이는 구두에 화려한 넥타이로 온 몸을 치장하고, 이미 음성은 하늘의 목소리인양 저음만을 향해 치닫습니다. 그리고 사용하는 언어도 시정잡배들은 감히 다다를 수 없는 수준으로 ‘형제님, 자매님’을 연신 되 내이며 틀에 박힌 일정한 멜로디 섞인 음정으로 일관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신학교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닙니다. 일반 교회에서도 이와 동일한 모습은 비일비재합니다. 물론 저는 이 자리에서 그 분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폐지를 요청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외형의 모습과 행위에만 집중되는 우리의 자세는 고쳐야 하지 않을까 반문하고는 있습니다. 신앙은 자신의 정직한 고백에 기초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언어도, 어떤 행위도 그 정직한 고백 위에 서지 못하면 맹목적일 따름입니다. 저는 단지 근거를 알 수 없는 어설픈 선입관이 우리가 예수의 참된 모습을 읽는데 장애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예수님은 자유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체포하러 온 상대방 군인의 부상당한 귀까지 치유해주는 넉넉한 분이셨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려 그들의 고민을 들으시고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심성을 어루만져 위로하시던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위로는 가식 없는 순수한 이해에서 비롯되었지, 정형화된 행위의 형식이 제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을 우리에게 준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자유와 평강은 하나님을 향한 굳은 신앙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최후까지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의지하는 그분의 곧고 분명한 신앙이 그분으로 하여금 자유와 평강의 설교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어설픈 형식이 아니라, 그분의 철저한 ‘하나님 신앙’이며 또한 ‘자유와 평강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고난절입니다.
우리는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 받으시던 그분의 신음소리를 흉내 낼 것입니다. 때로 몇몇 사람들은 실제로 자신의 손에 못을 박으며 그분이 걸어가셨던 길을 닮은 언덕길을 잘 가꾸어진 나무를 쪼개어 만든 십자가를 지고 오를 것입니다. 때로는 노래로 구슬프게 그분의 고난을 설명할 것입니다. 혹자는 두툼한 헌금봉투로 나를 위하여 받으신 그분의 아픔에 감사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게 또 우리는 열심히 전혀 그분이 아닌 그분, 우리의 습관과 선입관 속에서만 살고 있는 그분의 이미지 만들기에 급급할 것입니다. 그래서 또 편짜기와 편 가르기에 열중하며, 신앙이 좋고, 나쁘네…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그러네 하며 ‘예수의 포용’과는 정반대의 길을 열심히 달려갈 것입니다.
또 다시 고난의 절기입니다.
우리는 또 예수님의 신음소리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짐짓 슬픔의 얼굴을 하고 사정없이 가슴 아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굳게 다시 한 번 동여매는 넥타이 속에 예수께서 함께 해주시기를 기도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타인과 같지 않고 오늘도 정해진 언어와 행위 속에 자신을 지켜 가는 멋진 솜씨에 감복할 것입니다. 짐짓 금식도 필요할 것입니다. 때로는 신중한 자세로 옷깃을 여미며 분위기 있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해야 할 것입니다.
또 다시 수난의 절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분의 수난만을 고집한 채 그분이 우리에게 남긴 웃음의 의미를 잊어버려서도 안 됩니다. 고난 바로 뒤에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겼던 그분 예수의 유쾌한 모습 또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과도 같은 세상에 끈질긴 유머와 유쾌함으로 지친 세상의 영혼들을 위로한 ‘먹기를 탐하던 예수’가 당한 수난이 바로 고난절입니다.
유대인은 고난의 예수를 버린 것이 아닙니다.
만약 예수가 초지일관 고난과 수난의 상징으로 그들 옆에 있었다면, 그들은 결코 예수를 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설사 경건의 극치를 달렸더라도 그들은 예수를 또 처단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로 사도 요한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요한을 보고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 귀신이 들렸다 하면서 그를 처단했습니다. 이를 마태는 장터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곡조에 따라 춤추고 울어대는 아이들을 비유 삼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진중함 없이, 신중치 않게 그저 주변 환경의 변화와 옆 사람의 행동을 그대로 반성 없이 따라가는 사람들이 결국 요한과 예수님을 내치고 말았습니다. 앞에 서신 분의 참 모습을 살피며 따라가려하기 보다는 기존 자신들이 갖고 있던 선입견에 끼워 맞춰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는 일을 여전히 반복하고 있을 뿐입니다. 겉에만 충실하고 속에는 무감한 이들. 예수님의 참 모습보다는 포장되고 각색된 이미지에만 충실한 우리들의 모습도 저들 유대인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진지함도 받아내지 못하던 이들이 예수님의 유쾌함을 감내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는 먹기를 탐하며 포도주를 즐기던 분이었고 그들이 생각하던 ‘경건’과는 너무도 큰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런 동요 없이 예수를 포기합니다.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 없이 예수를 처단합니다. 그들은 세상을 위한 구세주를 죽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욕하며 그의 이름을 망령되이 외치는 사이비 하나를 처단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만의 고집과 선입견 속에 구축한 신앙관에 의해 처단한 그분, 먹기를 탐하던 예수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을 줄이야!
또 다시 고난의 날입니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도 고정된 우리의 선입관으로 또 다시 예수를 다시 십자가, 고난의 길로 몰아세우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또 다시 고난절입니다. 유쾌했던 예수의 참 의미가 우리 가슴에 진득이 묻어나길 기원합니다. 단지 고난만 남고 그의 오신 참 뜻은 실종되는 수난절이 아니라, 주께서 왜 우리와 함께 계셨고, 무엇을 위해 우리 곁에 계셨고,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그의 모든 것을 내 몸과 심장 안에 새겨보는 속 찬 고난의 계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길용/서울신대 교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2017년 세종교양도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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