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썽이며 조심스럽게 지구별을 거니는 사람에게
늘 마주하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만으로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삶을 돋우는 디딤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의 틈새를 발견하기 쉽지 않은 이 시절, 더더욱 이런 사람 하나가 또 다른 삶을 일으킵니다. 목사님 글을 챙겨 읽으면서 마주한 듯 가까운 마음이 일곤 했습니다. 자주 생각을 돋우고 마음결을 벼렸습니다. 이름이 보이면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리운 벗이 보낸 편지를 읽듯, 목사님의 편지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를 아껴 읽었습니다.
생명을 우뚝 우뚝 일으키던 ‘손이 아름다운 사람 예수’를 날마다 그리며, ‘물결처럼 가벼우면서도 산맥처럼 무거운 손’을 잡고 살아오신 지난 시간이 그려지는 듯 했습니다. 일상에 담긴 성스러움, 그늘진 자리, 사람들이 귀 기울이지 않고 마음을 두지 않는 곳에 먼저 눈길이 미치고, 먼저 뿌린 씨앗이 싹이 나지 않아 다시 뿌리는 ‘움씨’ 같은 심정을 읽었습니다.
아픔의 자리에 조심스레 다가서서 손을 내밀고 그곳에 자주 일상을 내려놓는 ‘글썽이는 마음’을 읽었습니다. 수백 년 고목도 해마다 여리디 여린 새순, 새잎으로 살아가듯 예민한 마음 촉수를 뻗어 아프고 설운 순간들을 고스란히 품고 ‘하루하루 중심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편지를 펴보면서 제가 만났던 두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오래 전 정읍에 사시는 한 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그분은 여든을 훌쩍 넘겼지만 날마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셨습니다. 그분은 멀쩡한 것도 다 내다버리고 허투루 대하는 세태를 늘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물건들을 한 순간에 쓰레기로 만들어 버리는 고약함이 서운하고 마음을 무겁게 했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버림받아 서운한 것들, 쓸모를 찾지 못하고 버려진 것들을 모으기 시작하셨답니다. 버려진 것이 제자리를 찾는 세상을 두 손으로 손수 만들기로 마음먹었던 거지요. 그리하여 그분은 천덕꾸러기로 나뒹굴던 것들의 쓸모를 찾고 구석구석 이야기를 담아 산자락 아래 작은 놀이공원을 손수 만들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쓸모를 찾았습니다. 날마다 줍고 덧대고 잇고 꿰매고 칠해 눕히고 세우면 그 공간에서 그것들은 나름 쓸모를 찾아 소소한 이야기가 담겼습니다. 쟁반과 냄비뚜껑이 악기가 되어 무대에 놓이고, 알록달록 색을 칠한 버려졌던 냉장고를 열면 장난감들이 가득합니다. 온갖 세련된 것들이 쏟아지는 세상에서 온갖 잡동사니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쓸모를 찾아 자리차지를 했습니다. 버려진 동물들도 보듬어 공원 한 쪽에 집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온갖 것들이 다 제 색과 모양을 찾았습니다. 측은하고 딱한 것들이 살터와 일상을 만나는 자리였습니다. 그분에게서 글썽이는 마음을 보았습니다. 이렇듯 약한 것들을 글썽이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버려진 것에 눈길을 주고 손을 내밀었던 세월이었습니다.
모든 존재 하나하나가 서로를 품고 아우르며 사는 세상
다른 한 분은 4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중국 내몽고 사막에서 나무를 심고 있는 인위쩐이라는 분입니다. 한 행사에 초대를 받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거칠고 모진 모래바람이 부는 사막을 초록의 땅으로 바꾸려는 사람, 그분은 생명의 흔적도 없는 황량한 죽음의 땅에서 오직 살아남기 위해 나무를 심기 시작했답니다. 쉼 없이 날마다 먼지바람을 무릅쓰고 사막으로 나갔던 거지요. 그리하여 마침내 부지런하고 억척스러운 한 사람이 어떻게 사막을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줬습니다.
사막은 어느새 옥수수가 자라고, 수박이 넝쿨을 뻗고, 미루나무 숲에 새들이 날아오고, 동물이 깃드는 생명의 땅이 됐습니다. 날마다 그녀의 손길을 기다리는 나무, 일일이 찾아다니며 물을 줘야 하는 나무만 2만 그루가 넘는다고 합니다. 힘겹게 가녀린 잎을 내민 나무에 그녀는 물동이로 물을 날랐습니다. 한 방울의 물이라도 옆으로 새나가면 아깝고 안타까웠답니다.
한국을 방문한 그녀는 눈 닿는 곳마다 초록이 가득한 이 땅이 부러웠고, 동시에 사막의 나무들이 눈물 나도록 측은하다 했습니다. 사막에 나무를 심는다고 자신의 땅이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다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은 ‘날마다 지구에 나무를 심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땅에 붙어있으면 내 나라와 내 집 밖에는 안 보이지만, 시선을 넓혀 하늘에서 보면 지구가 바로 자신의 집이고 오로지 지구만 생각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시작해야 두 번째 사람이 있고 세 번째 사람이 있지 않겠냐고 했습니다.
그녀에게 나무는 일상이고 평화이고 꿈이었습니다. 막막한 사막에서 외로움과 두려움에 울부짖던 처음부터 지금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고 변화도 있었지만, 단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 사막에 인위쩐이 아직 초록같이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한결같이 풀씨를 뿌리며 나무를 심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사막에 나무가 뿌리를 내려 숲의 일상을 찾아 가는 것, 그것이 그녀가 꿈꾸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분에게도 글썽이는 마음, 풀 한 포기를 생명 같이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의 편지 속에서 간절하게 절망과 두려움의 안대를 벗고 함께 일어서서 어깨동무하고 함께 걷자고 말을 거는 길동무를 보았습니다. 집착하거나 머무르거나 사로잡히지 않고, 움직이며 만나는 삶을 마주했습니다. 터무니없이 뒤엉킨 세상, 막막하고 끝 모를 아픔으로 채워진 자리,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를 안타깝고 참담한 시간 한 복판에서 ‘작고 사소하고 연약한 것들에 눈길을 두며’ 글썽이며 보듬어 안는 뜨거움을 읽었습니다. 목사님은 척박하고 냉담한 시절, ‘좌절과 무기력’이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걸어서 길을 내고, 두 손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세상을 고치는’ 치열하고 뜨거운 마음에서 희망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확성기를 통한 쩌렁한 소리가 아니라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건네는 말, 손으로 마음 담아 꾹꾹 눌러쓴 투박한 편지가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를 일으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작은 상처에도 온 신경과 온 몸이 그곳에 집중되듯, 세상의 중심은 아픔이며 아픔을 품고 있는 사람과 서럽고 속상한 아픔의 자리라는 것도 분명합니다.
절망의 동굴에 갇혀 있지 않고 문을 열고 나서서 두 발로 땅을 딛고 서면 세상의 모든 숨 있는 것들이 서로에게 디딤이 되고 생명이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온갖 칸막이와 담벼락이 우리를 가두거나 주저앉히고 움직이지 못하게 눈과 입을 막아온 시간을 아프게 바라봅니다. 스스로 눈멀어 두려워하며 내 안에서 한 걸음도 밖으로 나서지 못했던 순간들이 가슴을 칩니다.
누군가 만들어 놓은, 때로는 스스로 쌓은 허상 같은 벽을 허무는 힘은 작은 틈을 내는 용기, 벽돌 하나 부수는 절박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믿습니다. 길을 나서면 온 대지가 내 발을 떠받치고 밀어 올리고 힘을 보태 늠름하게 길을 걷게 한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돌이켜보면 작은 돌멩이 하나, 길 옆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빈 가지에 깃든 새 한 마리, 작은 시내, 모든 존재 하나하나가 서로를 품고 아우르며 살게 했다는 것을 느낍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사는 자리, 삶의 자리, 장소가 되어줍니다. 이렇게 내가 너에게 장소이며 너는 또 다른 누구에게 장소, 사는 자리입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어 서로에게 흘러 닿습니다. 예전에는 한 아이가 커가는 동안 마을이 있었습니다. 마을 곳곳 모든 것이 아이에게 장소가 되어 아이를 키웠습니다. 아이가 뛰어다니고 뒹굴고 넘어지고 일어서면서 만났던 하나하나가 바로 아이 안에 들어찼습니다. 지금은 조각조각 나뉜 캡슐에 들어가 관계 짓는 법을 잊고 삽니다. 이렇듯 장소의 회복은 삶과 생명의 되살림이며, ‘장소를 떠나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당부를 편지에서 읽었습니다.
저는 지금 마음을 가로지르는 나직한 노래를 듣습니다. 편지에서 편지로 이어지는 갈피 마다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하지만 어느 순간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가슴을 파고드는 노래 말입니다. 바닥까지 내려가 아파하고 견디기 어려운 낯선 상황이 몰아쳐도, 나지막한 가락이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생각을 일으킵니다. 사는 동안 삿된 흔적을 남기지 않고, 순간마다 마음 다해 치열하게 타오를 수 있을까, 자신에게 질문합니다.
사는 동안 거창한 이름표나 어떤 기념비를 앞세우는 것은 아무 소용이 되지 않습니다. 허망한 일입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시간과 화해하며 오로지 현재를 살아가는 것’, ‘지금에 오롯이 집중하며 날마다 삶의 기적’을 마주하는 것, 그렇게 ‘정신의 현재’를 놓치지 않는 것만이 우리의 삶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현재는 얼굴에 고스란히 담깁니다. 얼굴은 시간과 소통해온 기록입니다. 누군가 얼굴은 ‘얼이 들고 나는 굴’이라고 새겼는데, 지금껏 어떤 낯빛을 내보이며 살았는지 거울을 보듯 편지를 읽습니다.
‘눈물은 머리의 것, 울음은 온몸의 것’
요즘 우리가 사는 이 땅의 마을을 보면 참담한 마음이 듭니다. 얼마나 더 절망하고 나서야 칠흑 같은 아픔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시냇물 소리를 듣고 숲에서 달려 나온 바람 소리를 듣고 작은 새들의 노래를 들을 수 있을까요? 어디쯤 이르러 사람 얼굴 하나하나 알아보고 제 이름으로 마주할 수 있을까요? 들풀 하나하나에 깃든 생명의 손을 잡고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의 이름을 불러주게 될까요? 언제쯤 사람의 마을은 사람의 노래를 부르며 밥 짓는 냄새 고소한 하루하루를 한가로이 살아갈 수 있을까요?
목사님 말씀대로 ‘욕망의 벌판을 질주하며 모질게 변해버린 심성’이 뾰족하게 날을 세우고 더더욱 욕심껏 시대를 탐하고 있습니다. 참담한 극단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극단은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 제어장치 없는 폭주기관차입니다. 무엇을 향해 무엇을 위해 달리는지 알지 못하는 속도로만 그 얼굴을 드러냅니다. 얼굴 없는 기계장치 같은 속도만 남았습니다. 그것은 욕망의 표현입니다. 앞지르고 지배하려는 욕망의 다른 이름입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자신을 확장하려는 욕망과 닿아 있습니다. 저마다 겪어야 하는 과정이 생략되고 당연하게 만나고 기다려야 하는 시간을 무시하고 앞지르기를 합니다. 이렇듯 설익는 과정이 이러한 마땅한 과정을 생략해서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파괴하고 사람다움을 상실하게 합니다.
‘영혼을 빼앗긴 멍한 시선’으로 ‘세상의 북소리에 발을 맞추며’ 휘둘리는 현실입니다. ‘적당히 적응하며 살라’는 말에 뭉툭한 생각이 되어 ‘자신을 함부로 하려는 대로 내버려둔’ 시절입니다. 편지를 읽으며 다시 마음을 벼립니다.
어떤 시인이 ‘눈물은 머리의 것, 울음은 온몸의 것’이라 했습니다. 바닥에는 몸짓이 있습니다. 온몸으로 있는 그대로 생겨먹은 대로 움직이며 말합니다. 어깨를 들썩이며 부둥켜안고 몸으로 흐느끼는 울음이 있습니다. ‘글썽이는 마음’이 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을 말로 모두 풀어낼 수는 없습니다. 온몸으로 꿈틀거리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허깨비 같은 시간이 아니라 포장되지 않은 알맹이 같은 치열한 일상이 살아 움직이는 삶 말입니다.
편지에서 말씀하셨듯이 ‘속된 것 따로, 거룩한 것 따로인 가짜’가 아니라 ‘아프고 연약한 것이 중심인 세상’에서 ‘온 몸으로 흔들리며 걷는’ 모습을 봅니다. 역사는 누가 대신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을 사는 사람들이 아프게 때로 참담하게 역사를 몸으로 채워갑니다. 앞뒤를 바꾸어 버리고 무엇이 소중한지 보는 눈을 잃어버린 시대는 역사의 땅에 발을 딛지 않고 허망한 미래를 말합니다. 숟가락으로 땅을 헤쳐 보고는 ‘물 없음’ 팻말을 세우고 떠난 사람처럼 말입니다. ‘진창 같은 역사’라도 역사의 참담한 현실에서 비켜서지 않고 정의로운 평화의 역사를 발견하고 일으켜 세우는 우리의 치열한 삶이 ‘의미의 저장소’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가 끊임없이 그랬던 것처럼, ‘과거와 대화하며, 현재를 돌아보게 만드는 거울’이며 ‘이정표’이기도 합니다.
김 목사님, 지금을 살아가려 합니다. 거창할 것도 요란할 것도 없는 일상에 치열하려고 합니다. 작은 것들이 어울려 만들어 가는 힘을 믿으며, 나직하게 오롯하게 늠름하게 오로지 지금을 가로질러 가려고 합니다. 차디찬 바닥을 깨고 반란 같은 봄풀이 돋듯 일어서는 꿈을 꿉니다. 몸으로 대답을 준비하여 길을 나섭니다. ‘길은 거울 같은 것이다. 길을 나선다는 것은 자신을 길에 비추어 보는 것’이라는 말을 새기면서 식물성 속도로 천천히 숨결과 곁을 헤아리며 걷습니다.
김기돈/<작은것이 아름답다> 편집장
<희망, 그 빛깔 있는 삶의 몸부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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