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꼐(13)
저마다 선 자리에서 등불 하나 밝히라는 것이지요
처음 책을 받아 보고는 훅 빨려 들어갔습니다.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라는 제목 때문이었겠지요. 자고나면 눈 뜨기가 겁나는 세상에, 오늘은 또 무슨 일이 터지나 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하는 세상에서,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라니요. 그 책은 마치 저 같은 이들 보라고 쓰인듯하여 책을 잡자마자 냉큼 머리말부터 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당신은 초장부터 이렇게 빠져 나가시더군요.
“어떤 경우에도 내가 답을 제시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고민을 함께 나누고 싶었을 뿐이다”(7쪽).
‘흠, 그러면 그렇지. 목사라고 별 뾰족한 답이 있을라구…’
약간은 심드렁한 기분으로 책을 읽어 나가다가 이 대목에서 눈길이 멈추었습니다.
“… 세월이 갈수록 그 엄정함과 서늘함으로부터 점점 멀어진 채 순치된 동물처럼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제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마음이 아뜩해집니다. 조금 지친 듯한 느낌입니다. 삶이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41쪽).
‘어라? 목사가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거야? 삶이 지루하다고?’
혹세무민의 바벨탑을 쌓고 있는 교회
그러나 사실은 이 이야기가 참 반갑고 위로가 되는 말이었습니다. ‘아!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저 자신, 젊은 시절 스스로에게 다짐하였던 많은 것들이 어느덧 세월 따라 흐물흐물해져 가는 것을 눈앞에 보면서 살아갑니다. 자신을 곧추세워 보려고 노력은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낡아져 가는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됩니다. 분노는 여전하지만 열정은 식어가는 것 같습니다. 승리보다는 패배의 기억이 발걸음을 머뭇거리게 합니다.
우리가 과거에 싸웠던 독한 권력은 이제 상대하기 어려운 복잡한 권력들에 자리를 내어 줬습니다. 정치를 앞장세우고 자신들은 나서지 않으면서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옭죄는 거대자본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이는 그들의 은밀한 손을 통해 법이 바뀌고 제도가 바뀌었고, 국민의 피땀으로 세워진 멀쩡한 공기업들이 민영화됩니다. 국민 전체의 행복을 추구해야 할 국가가 소수 재벌들과 그에 결탁한 관료, 정치인들의 전유물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국민은 점점 개·돼지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이겠지요. 국가의 기강을 유지해야 할 사법부 종사자들도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포로가 된지 오래일 뿐 아니라 이제는 자신의 공직을 이용한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기도 합니다.
역사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는 건지, 죽은 귀신이 된지 오래였어야 할 “유신의 망령”이 다시 현실 속을 배회합니다. 5년짜리 계약직 공무원인 대통령이 전지전능, 만기친람萬機親覽의 절대군주 같이 국민 위에 군림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나라와 국민의 생존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드 배치 같은 문제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면서 “이게 왜 논란이 될 사안이냐?”고 오히려 국민을 향해 호통을 칩니다. 그런 대통령 아래 있는 고위공직자들이 국민을 개·돼지와 같이 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일인지도 모릅니다.
예나 지금이나 OECD 평균을 훨씬 웃도는 노동시간을 감내하며 열심히 일해 온 이 땅의 노동자들, 그들의 형편은 여전히 별로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재벌들은 수백조 원을 현금으로 쌓아두고 있지만 그 돈을 만들어 준 많은 국민은 이제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기도 어렵고, 일을 한다고 해도 사는 형편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습니다.
세상이 이러한데도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은 그 세상 속을 뚫고 가나안으로 나아가는 모세의 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천당, 불신지옥”같은 혹세무민의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돈이 거의 절대 신앙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종교도, 국가기관도 모두 부패와 무능, 무책임에 얽혀 제 역할을 못하는 현실, 그 총체적이고 거대한 부조리 앞에서 자신은 점점 더 왜소해지고, 무능해 보이고, 아무 역할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겉모양으로나마 숨 쉬고 살아가는 이 삶이 참 지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있음 그 자체’로 다른 사람의 이정표가 될 수 있을까?
갑자기 흥분을 한 것 같군요. 그런 자리가 아닌데 분노의 게이지가 급상승합니다. 어디에 마음 줄 곳도 없고, 마땅히 하소연 할 데도 없는 상태에서 목사님께 글을 쓰다 보니 이렇게 폭발하는 것 같습니다.
새삼 목회자로서 갖게 되는 어려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살이의 고민과 힘듦을 목사님께 하소연 하겠지요? 때론 세상이 왜 이렇게 돌아가느냐는 항의도 들을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미쳐 돌아가는데 하느님의 정의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거냐고 대드는 젊은 청춘은 없나 모르겠습니다. 목사님이라고 해서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다 갖고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말입니다. 말씀하신대로 그저 고민을 함께 나누는 정도가 대부분이겠지요. 그러자면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듯 차곡차곡 쌓이게 되는 그 우울함과 피로감은 누구의 몫이 되는 걸까요? 그런 우울을 떨쳐 버리려는 목소리를 이 책 곳곳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둠을 모르는 빛은 불완전하고, 절망을 모르는 희망은 공허”(97쪽) 하다든가, “성숙한 사람은 흔들림과 젖음을 물리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이것을 통해 자기의 유한성을 깊이 자각할 뿐 아니라 그것을 자기 삶의 한 부분으로 수용합니다”(97쪽). 도종환 시인의 시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를 인용하면서 한 말입니다. 흔들리는 자신과 우리들을 위해 바울사도의 서신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갈라디아서 6:9). “절망의 심정이 깊어지면 그때가 정말 올까 하는 회의감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든든히 붙들어야 합니다. 움씨를 뿌리는 농부는 자기 속에 있는 절망을 애써 다독이며 희망을 뿌리는 것입니다”(98쪽).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다른 이들이 만들어 놓은 삶의 문법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던 삶에서 벗어나 자기 삶의 문법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131쪽)고 말이지요. 그러면서 결국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마다 선 자리에서 천년의 어둠을 밝히는 작은 등불 하나를 밝히는 마음으로 산다면 이 어둠의 땅에도 결국 새벽이 오지 않겠습니까?”(131쪽)
저는 이 대목에서 뜬금없이 서산대사의 선시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눈 덮인 들판 걸어갈 때에 踏雪野中去
발걸음 함부로 내딛지 마라 不須胡亂行
오늘 걷는 내 발자국은 今日我行跡
뒤에 오는 이의 이정표가 될지니 遂作後人程
자기만의 삶의 문법으로, 선 자리에서 천년의 어둠을 밝히는 작은 등불이 되자! 이 자못 비장하게도 들리는 이야기는 한편으로는 동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이웃을 외면하고 제 앞가림에만 급급해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비판과 궤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많은데 ‘있음 그 자체’로 길을 찾는 이들에게 이정표가 되는 이들은 많지 않”다 (142쪽)라면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차가운 세상에 온기를 나르는 사람들”(143쪽)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목사님의 절친(!)이신 법인 스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향기를 파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이 땅의 지식인과 정치인, 노동운동가 등 이른바 사회지도자들이 평소의 가치와 신념을 저버리고 아무 부끄러움 없이 정반대의 행보를 하고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우리 역사는 지조를 버린 이들을 변절자라고 부른다. 간혹 서울 나들이를 갔다가 보게 되는 종합편성채널에는 변절자들의 해괴하고 교묘한 논리가 판을 친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분노를 넘어 서글픈 생각마저 든다. 조용히 생각해 본다. 왜 변했을까. 방법은 바꿀 수 있어도 길은 바꾸면 안 되는 것인데, 왜 자신이 평소 걸어오던 길을 바꾸었을까. 결코 놓을 수 없는 권한 행사, 더 풍족한 경제생활, 아니면 그보다는 잊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가(법인,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 293쪽).
속이 뜨끔했습니다.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향기를 파는 일에 유혹을 느꼈던 적은 없었던가? 잊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는가? 과연 내 자신, ‘있음 그 자체’로 다른 사람의 이정표가 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내가 지금 이 차가운 세상에 온기를 나르고 있는가? 하는 물음 앞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분노는 여전하지만 열정도, 낙관도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밝히는 등불 이전에 자기 마음속을 밝히는 등불 하나도 제대로 켜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 때문이었습니다.
앞에 인용한 서산대사의 선시는 김구 선생이 인용하여 더 많이 알려지기도 한 시이지요. 선생은 성공 여부가 매우 불투명한 가운데 많은 이들의 반대 속에 남북정치협상을 위해 북행길에 오르면서 이 시를 읊었습니다. 친일파들의 비호 속에 미국보다 더 미국적인 냉전의 기치를 내세우며 정권장악에 매달렸던 이승만과 달리, 그는 조국의 분단을 막기 위해 시계視界 제로의 북행길에 올랐습니다. 눈발만 휘몰아쳐 올 뿐, 사방에 인적이 끊어진 허허벌판을 걷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앞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길을 걸으면서도 그는 뒤에 오는 이들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놓지 않았습니다. ‘어떤 일을 행할 때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은가를 생각하기 이전에 옳은 일인가, 옳지 않은 일인가를 먼저 생각하라’는 그의 고집스러운 행보와도 닮아 있습니다.
순례자의 길
백범 김구 이야기를 하다 보니 또 가슴이 먹먹해져 옵니다. 과연 우리 모두가 다 그런 선지자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요? 선지자의 삶을 존경하고 동경하기는 하지만 우리 모두가 다 그런 길을 걷기는 쉽지 않겠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순례자의 길을 떠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선지자의 흔적을 따라 길을 떠나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자기 속에서 각자 자신의 길을 찾아보려는 이들을 저는 순례자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 길 위에 서 있는 이들은 물론이요, 비록 현실에 몸담고 있지만 끝없이 그 길을 동경하는 이들 모두를 저는 순례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김 목사님 책에서 순례자들에 대한 언급이 많이 눈에 띄더군요. 특히 이런 구절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시간과 이익을 다투는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지만, 순례자들은 길을 잃을 권리를 가지고 있는 이들입니다”(220-221쪽).
“떠나는 이들은 언제나 주류적 가치에 사로잡히기를 거절하는 이들입니다.”(222쪽)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이기도 하지요.
“중심부에 속하려는 가련한 노력이 사람을 피폐하게 만듭니다”(222쪽).
아마도 김 목사님이 사람들과 나누고자 했던 이야기의 핵심은 이런 이야기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집요하게(?) 반복되고 있거든요.
“내려놓지 못해 누추해진 이들을 우리는 정말 많이 봅니다. … 찬바람에 하나 둘 떨어지는 낙엽을 봅니다. ‘방하착放下着.’ 때가 되면 홀가분하게 떠나 근본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328쪽).
“욕심을 내려놓으면 비루해지지 않을 수 있지만 그것을 내려놓을 수 없어 삶이 남루해집니다”(354쪽).
“맑은 향기를 풍기며 사는 이들은 거의 다 자기 비움의 명수들입니다”(383쪽).
이제 이 편지를 마무리해야겠습니다. 책은 저자의 것이 아니고 독자의 것이라고 한 말을 이 책을 읽는 내내 곱씹어 보았습니다. 제가 김 목사님의 책을 오독한 것이 아니라는 근거 없는 확신은 여기에 있습니다. 이 편지의 마무리 역시 목사님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희망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서 숨은 불씨를 찾는 것이라 생각합니다”(108쪽).
그 숨은 불씨로 저마다 선 자리에서 등불 하나 밝히라는 것이지요? 내내 건강하시길 빕니다.
정범구/전 국회의원, 주 독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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