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

나를 비웃지 마소서

by 한종호 2019. 3. 12.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13)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 수난곡

No. 13 나를 비웃지 마소서

 

마태수난곡 1부 22번~23번

마태복음 26:33~37

http://음악듣기 : https://youtu.be/i-1X8zrka8o

내러티브

16(22)

에반겔리스트

33. Petrus aber antwortete und sprach zu ihm:

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대사

베드로

Wenn sie auch alle sich an dir ärgerten, so will ich doch mich nimmermehr ärgern.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34. Jesus sprach zu ihm: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대사

예수

Wahrlich, ich sage dir: In dieser Nacht, ehe der Hahn krähet, wirst du mich dreimal verleugnen.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35. Petrus sprach zu ihm:

35. 베드로가 이르되:

대사

베드로

Und wenn ich mit dir sterben müßte, so will ich dich nicht verleugnen.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Desgleichen sagten auch alle Jünger.

모든 제자들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기도

17(23)

코랄

Ich will hier bei dir stehen,

Verachte mich doch nicht!

Von dir will ich nicht gehen,

Wenn dir dein Herze bricht.

Wann dein Herz wird erblassen

Im letzten Todesstoß,

Als dann will ich dich fassen

In meinen Arm und Schoß.

나 여기 당신 곁에 서 있습니다.

주여 나를 비웃지 마소서.

당신 곁을 결코 떠나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산산이 부수어질 때,

마지막 죽음의 고통이 당신을 엄습할 때,

나 당신을 껴안겠습니다.

내 팔에, 내 품에

당신을 껴안겠습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라는 예수의 말씀에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항변합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네가(du)’ ‘오늘 밤(In dieser Nacht)’, ‘닭이 울기 전(ehe der Hahn krähet)’, ‘세 번(dreimal)’, ‘부인하리라(wirst verleugnen)’ 라는 구체적인 표현을 쓰시며 베드로가 자신을 버릴 것을 다시금 확인시키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두 가지 상반된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베드로로 하여금 자신의 연약함과 자신의 죄인 됨을 철저하게 마주 보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예수께서 이토록 분명한 표현으로 베드로의 부인을 미리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를 부인 한 후 베드로는 아마 여러 가지 이유로 스스로의 행위를 변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 역시 예수를 따르지 못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의 뜻을 저버리게 될 때 마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여러 가지 이유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처럼, 우리는 말로는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스스로를 꽤나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예수를 팔고, 예수를 잡아들이고, 예수를 배반하고, 예수를 죽인 사람들을 우리와 거리가 먼 사람들로 여기고 우습게 여깁니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연약함 그리고 절망적인 죄인인 자신과 진실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이와 상반된 다른 이유는, 그렇게 생기게 된 자신을 향한 절망에 함몰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베드로에게 그가 부인할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과 앞서 유다에게 그가 팔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은 특별한 예언의 능력을 선보이려 하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자신에 대한 절망과 죄책감과 후회에 함몰되지 않고 회개하고 다시 일어서도록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내가 너희의 모든 연약함을 알고 있단다. 나는 괜찮단다. 내가 다 이해하고 있단다. 내가 너희의 연약함을 함께 감당할테니 나와 함께 다시 시작하자구나.’라는 메시지를 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베드로는 회개했고 유다는 결국 죄에 함몰되어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베드로의 목소리

 

리히터의 58년 음반에서 베드로 역할을 맡은 사람은 막스 프룁스톨입니다. 생각 보다 몸이 앞서고, 몸 보다 마음이 앞선 사람 베드로, 갈릴리 어부 출신의 거친 사람 베드로를 잘 표현하는 목소리입니다. 마태수난곡 모든 음반을 통 털어 가장 인상 깊은 베드로가 아닐까 싶습니다. 마태수난곡에서는 대부분 한명의 베이스 가수가 유다와 베드로, 빌라도와 대제사장 역할을 도맡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마다 한 두 마디 대사가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한 가수가 여러 배역을 맡는 것은 오페라처럼 의상이나 분장이 필요 없는 수난곡이나 오라토리오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간혹 합창단원 중에서 한 사람씩 맡기도 하지만 수난의 이야기에서 이들은 결코 작은 배역들이 아니기에 실력 있는 솔리스트를 한 사람 세우는 것이 더 좋습니다. 한 사람의 가수일지라도 배역마다 다르게 부르려고 노력하겠지만 유다나 베드로, 빌라도나 대제사장 한 가지 역할에 특화 될 수밖에 없겠지요. 막스 프룁스톨은 베드로에 특화된 가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번 유다의 경우에서 프룁스톨의 목소리가 비열하고 똑똑한 사람 유다를 표현하기에는 조금 아쉽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지휘자 칼 리히터는 이 모든 것을 고려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에 초점을 맞춘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의 수난 이야기와 마태수난곡에서 베드로의 중요성을 생각했을 때, 탁월한 선택이 아닐까 싶습니다. 2부에서 만나게 될 베드로의 부인 장면에서 세 번째에 이르러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Ich kenne des Menschen nicht.”라고 지쳐버린 채 오열하듯 말하는 장면은 압권입니다.

 

    외젠 뷔르낭, 부활의 아침 무덤으로 달려가는 베드로와 요한(1898)

 

십 오 년 전 파리 오르셰 미술관을 찾아 간 것은 순전히 이 그림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길을 헤매다 늦어서 결국 못 보게 될 것을 알면서도 찾아갔었는데 그날이 마침 단 하루 야간 개관을 하는 날이었었지요. 반 고흐의 유명한 작품도 많았지만 마치 운명의 작품을 마주한 떨림으로 이 그림 앞에 홀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이 그림에 대해서는 할 말이 참으로 많지만 오늘은 베드로의 얼굴만 바라보겠습니다. 리히터 음반의 막스 프룁스톨의 목소리와 외젠 뷔리낭의 그림 속 베드로의 얼굴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만약 뭔가 어울리지 않음이 느껴지신다면 아마 그것은 그림 속의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 한 후 자기 자신에 철저히 절망하고 십자가 사건을 겪은 후의 얼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시는 예수

 

다시 예수를 바라봅시다. 베드로로 시작하여 모두가 하나 같이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라고 말했을 때 예수는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다시 한 번 빼도 박도 못할 예언을 하심으로 제자들을 끝까지 몰고 가셨을까요?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에서는 이 이야기가 제자들의 마지막 말에서 뚝 끊겨 버립니다. 저는 이 끊김이 예수의 침묵, 예수의 받아들임으로 들립니다.

 

예수께서는 다 알고 계셨지만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는 베드로와 제자들의 말과 그들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 주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와 달리 제자들을 비웃지 않으셨습니다. 더 이상 아무 말씀 없이 그들의 마음을 받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행동과 결과로 사람을 판단하지만 주님은 마음과 의도를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제자들을 비웃지 마십시오. 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아니, 우리는 제자들 보다 더 비웃음을 받아 마땅합니다. 제자들을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우리는 예수 수난의 의미와 십자가의 승리와 부활의 신비를 안다고 하면서도 삶의 곳곳에서 예수를, 그의 뜻과 그의 길을 배신하며 사니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우리도 비웃지 않으시고 그 분을 향한 우리의 작은 마음도 다 받아 주십니다.

 

‘내가 너희의 모든 연약함을 알고 있단다. 나는 괜찮단다. 내가 다 이해하고 있단다. 내가 너희의 연약함을 함께 감당할테니 나와 함께 다시 시작하자꾸나!’

 

그 음성을 들은 우리는 이 장면에 이어지는 코랄을 우리말로 함께 부르며 진지하게 고백합니다.

 

“이제는 도망하지 않겠습니다. 십자가의 비밀을 알게 되었으니 주님의 고통이 있는 곳에서, 당신 곁에서 당신을 껴안겠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고난과 슬픔이 있는 곳에 당신이 계시니 그곳에서 저도 당신과 함께 하겠습니다.”

 

나 주님 곁에 서니

날 받아 주-소서

나 주와 함께 하며

그 아픔 함께하리

주님의 깨진 마음

주님의 찢긴 몸

나 주-와 함께 하며

내 품에 안으리.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하늘결교회 담임목사로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