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14)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 수난곡

No. 14 겟세마네

 

마태 수난곡 1부 24번

마태복음 26:36~38

음악듣기 : https://youtu.be/R-AEzm3v630

내러티브

18(24)

에반겔리스트

36. Da kam Jesus mit ihnen zu einem Hofe, der hieß Gethsemane, und sprach zu seinen Jüngern:

36.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대사

예수

Setzet euch hier, bis daß ich dorthin gehe und bete.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37. Und nahm zu sich Petrum und die zween Söhne Zebedäi, und fing an zu trauern und zu zagen. 38. Da sprach Jesus zu ihnen:

37.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이에 말씀하시되

대사

예수

Meine Seele ist betrübt bis an den Tod, bleibet hie, und wachet mit mir.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겟세마네와 아인잠카이트(Einsamkeit)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렀습니다. 특별한 날 특별한 목적으로 그곳에 가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머무르실 때면 습관처럼 매일 밤 그 곳을 찾아가셨습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누가복음 22:39)

 

왜 예수께서는 그곳을 그렇게 자주 찾아가셨을까요? 쉬러 가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무가 우거지고 조용한 그 곳을 좋아하셨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라는 강렬한 사건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열광주의적 선입관 때문에 우리는 예수께서 매일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뜨거운 철야 산기도를 했으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겟세마네는 예수께 있어 쉼과 평화와 고요함의 장소였습니다. 복음서, 특히 예수 수난 이야기는 사건의 나열입니다. 예수의 말씀과 성경의 기록을 통해 사건과 사건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그 사이의 일상을 읽을 수 있어야 우리는 예수를 제대로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누가복음 21:37)

 

반면, 우리들의 교회와 우리들의 삶에는 쉼과 평화와 고요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위기 상황에는 목 놓아 부르짖어야 하고 영적 전쟁과도 같은 신앙 여정에서 긴장과 간절함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이 그러하셨듯이 하나님 안에서 세상의 그 무엇도 침해 할 수 없는 쉼과 평화와 고요함을 매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는 언제나 프로그램이 가득하고 우리는 저마다 맡은 일들과 인간관계와 표정관리로 분주합니다. 예배 중에도 말이 끊기거나 소리가 끊기면 불안함을 느낍니다. 통성기도, 방언기도만 제대로 된 기도처럼 느껴지고 기도를 할 때도 음악이 없으면 허전함을 느낍니다. 언제든지 울부짖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고 울부짖는 기도가 끝나자마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원래대로 돌아갑니다. 고조됨과 여운이 없는 이러한 기도가 진정한 기도인지, 집단적 히스테리인지, 혹은 우리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만나는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는 세상의 모든 기도 중에서 가장 깊이 있고 가장 강렬한 기도였습니다.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누가복음 22:43~44)

 

하지만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는 마태복음 26장 시작부터 준비되어 그 여운이 십자가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는 강렬한 기도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리 내어 외치는 기도는 아니었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소리를 치시며 기도했다면 지척에 있던 세 제자들이 단잠에 빠져들 수 없었겠지요. 예수께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부르짖는 기도, 성대가 아닌 마음을 찢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홀로 기도하셨고 그러한 기도의 모범을 보이심으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쉼과 평화와 고요함이 그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예수의 겟세마네의 기도와 같은 고조됨과 여운이 있는 깊이 있고 강렬한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쉼과 평화와 고요함을 얼마만큼 누리고 있을까요? 대부분의 교인들에게 주일은 가장 피곤하고 가장 분주한 날이 되어버렸습니다. 가뜩이나 피곤하고 분주한 삶 속에서 쉼과 평화와 고요함은 그렇게 우리와 멀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매일 밤 누리셨듯이 우리의 신앙과 삶의 바탕이 되는 도화지는 쉼과 평화와 고요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신뢰의 관계에서 우러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입니다. 그러므로 쉼과 평화와 고요함은 또 다른 강렬한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소리들이 모여 음악이 되었다고 쉽게 생각하고 소리가 크거나 많을수록 멋진 음악이라고 생각하지만 소리의 바탕은 침묵입니다. 음표가 없는 곳에 쉼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쉼표가 있어야 할 곳에 쉼표가 있는 것이지요. 또한 우리는 음악을 누구에게 들려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 심연의 고독과 연결되지 않고는 음악의 깊은 맛을 누릴 수 없습니다. 소리로서의 음악뿐만이 아닙니다. 어떤 이의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연주자와 작곡자가 나누는 대화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아무리 화려한 연주라 하더라도 그 연주를 들려주기 위해 홀로 고민하고 연습한 연주자의 고독과 투쟁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독일어 ‘Einsamkeit/아인잠카이트’는 ‘고독’이라고 번역하기에는 그 충만함과 지금 머물고 있는 배경이 소외되기에 부족하고, 누군가를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홀로됨’이나 ‘외로움’이라고 번역하기도 어려운 묘한 단어입니다. ‘숲, 바다, 공간, 우주, 하나님의 품 등 커다란 실존 안에서 먼지만큼 작은 나를 발견하고 그런 나를 충만하게 느끼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인잠카이트’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사람들 사이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셨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깊은 ‘아인잠카이트’를 누리셨습니다.

 

바흐의 음악도 그 바탕에는 침묵과 아인잠카이트가 서려 있습니다. 일전에도 마태수난곡의 곡과 곡사이의 침묵의 미학에 대해 말씀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만 아무래도 언어가 없는 기악곡에서 ‘침묵의 소리’를 더 가까이 들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가 연주한 평균율 1권을 들어보시면 이 음악의 바탕이 차라리 우주의 침묵이며, 울려 퍼지는 소리는 바흐와 연주자의 대화요, 듣는 우리를 포함하여 이 음악과 연결된 모두가 ‘아인잠카이트’에 깊이 빠져들게 됨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https://youtu.be/Dkt75juxvxw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산에 오르는 또 다른 이유는 먼 곳을 바라보기 위함이기도 하지요. 예수께서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사랑하셨고 감람산에서 조용히 예루살렘을 바라보시곤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날 제자들도 그분의 조용함에 압도 되어 ‘조용히’ 예수께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감람 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묻되(마가복음 13:3)

 

예수께서는 때로, 감람산에서 이미 무너지고 있는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슬퍼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태복음 23:37, 누가복음 13:34)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가장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곳은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아직 예루살렘에 가 보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예루살렘에 가게 된다면 감람산 올리브나무 우거진 동산에 하루 종일 조용히 앉아 있고 싶습니다. 평화롭게 쉬며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아마 그곳에서는 그 어떤 종교적인 것도 사족이 되어버릴 것 같습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었던 그가 쉼을 누렸던 그 곳에서 그와 함께이고 싶습니다.

 

                                            겟세마네, Walter Mittelholzer, 1934년

 

고민하고 슬퍼하신 예수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세베데의 두 아들인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기도하러 나아가셨을 때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 왜 다른 제자들은 앉아 기다리라고 하시고 세 제자만 데리고 가셨을까요? 아마 예수께서는 최대한 자신이 당하실 고난을 숨기시고 홀로 감당하려 하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홀로 지고 가시기에는 십자가는 너무나도 큰 무게였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또한 완전한 인간이셨기에 위로가 필요했고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변화산 사건,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 등 보다 깊은 것을 나누었던 세 명의 제자들을 대동하셨습니다.

 

마태수난곡의 대본에 쓰인 루터 성경은 이 부분을 'und fing an zu trauern und zu zagen/고민하고 슬퍼하시기를 시작하셨다’라고 번역했는데 이 번역이 원문(에르사토/ἤρξατο/시작하다)에 더 가깝고 그렇게 읽을 때 세 명의 제자만 데리고 가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 앞에서는 간신히 참고 있었지만 한적한 곳에서 홀로 되어 기도하려니 고민과 슬픔이 엄습하듯 다가 왔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것이 다 준비된 상태에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완전한 인성을 지녔던 예수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아야 하는 십자가는 고민과 슬픔이었습니다. 또한 완전한 하나님으로써 그의 유일한 연약함은 인간을 너무나 사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들과 분리되어 십자가에서 겪어야 할 완전한 외로움은 예수의 고민이었고 슬픔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십자가의 순간이 다가오고 막상 홀로됨이 시작하게 되자 고민과 슬픔이 갑작스레 밀려오고 있습니다.

 

마태 수난곡에서 이 구절은 베드로의 배신 장면과 함께 에반겔리스트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고민하고 슬퍼하다’라는 뜻의 ‘zu trauern und zu zagen'을 어떻게 노래하는지 유심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음악적으로 ’trauern‘은 고민과 슬픔의 감정을 쏟아 놓는 표현으로 ’zagen'은 그 감정을 다시금 누르고 참아내는 표현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토록 애절하게 작곡한 바흐도 놀랍지만 그 오선지를 소리로 펼쳐낸 에반겔리스트의 노래는 임방울의 ’쑥대머리 구신형공‘에 비견될 서양 성악 예술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여러분이 듣고 계신 음반의 에른스트 해플리거는 마태 수난곡 녹음 역사상 최고의 에반겔리스트이며 제가 이 음반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합니다.

 

우리는 복음서의 내러티브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만, 마태 수난곡을 듣게 되면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무성영화에서의 변사처럼, 판소리에서의 아니리처럼 에반겔리스트는 이 이야기의 흐름을 쥐고 있습니다. 우리가 분석하고 깨달으려는 의도를 내려놓고 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에반겔리스트의 아니리’에 마음을 맡길 때 우리는 이야기에 빠져 들며 예수의 수난을 더 깊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장면에서 두 번 등장하는 예수의 음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앞선 대사에서는 마지막 단어 ‘bete’에 주목해야합니다. 이 단어는 ‘기도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beten/베텐’의 2인칭 복수 명령형으로 ‘(너희는)기도하라’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가사로 표현되는 순간 모든 악기들은 엄숙하고 간절한 느낌으로 기도를 함께 표현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대사는 반주가 보다 적극적으로 받쳐주고 있습니다. “Meine Seele ist betrübt bis an den Tod/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말씀하시는 부분부터 현악 모든 파트가 8분 음표 연음을 연주하기 시작합니다. 이 8분 음표 연음들은 고민하고 슬퍼하는 가운데 요동치기 시작하는 예수의 마음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 만나게 될 테너의 레치타티보 ‘O schmerz!/오 그 고통이여!’로 이어지면서 8분 음표 연음은 16분 음표로 바뀌어 두 배 의 속도로 빨라집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를 주님의 고민과 슬픔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합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하늘결교회 담임목사로 있다.

posted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