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호의 너른 마당(8)
모두가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전도서는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의 왕, 전도자”라고 이 글을 쓴 사람이 누구인가를 밝히고 있다. 시작은 다윗의 아들이며, 그 삶의 중심은 왕이고, 결론은 전도자가 되는 셈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부터 우리는 전도서가 지향하는 최종 목표를 알게 된다. 그것은 이 세상의 영광과 권세, 그 모든 것을 쥐고 있었으나 그 자신이 결국 마지막에 도달한 모습은 다름 아닌 “전도자”라는 것이다.
이 전도서의 저자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인지, 아니면 그와 정신적 계보를 같이 하는 존재인지를 규명하는 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전도서가 다윗의 혈통에 속하는 이스라엘의 권력, 그 정통성의 중심에 있는 존재이자, 그 권력을 스스로 누린 최고 통치자의 신앙고백이라는 점에서 주목되는 것이다.
상처와 희생, 그리고 욕망의 뒤엉킴
이스라엘이 미미한 종족의 연합 결사체에서 국가 단위로 성장하고 이 과정에서 치열한 권력투쟁이 전개된 것은 사울과 다윗, 그리고 다윗의 아들들 간의 골육상쟁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사울과 다윗은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관계였으나 정적이 되고 말았으며, 다윗은 아들 압살롬에게조차 추격당하는 신세가 되기도 한다. 솔로몬 대에 이르면 최고 권력을 둘러싸고 유혈의 정치적 쟁투가 벌어지게 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이스라엘의 국가 권력은 이렇게 맹렬한 권력욕이 개제된 역사의 산물이기도 했다. 애초에 이스라엘의 통치 권력은 하나님에게 받은 축복의 능력으로 출발하지만, 현실에서 인간들은 그러한 출발은 망각하고 당장의 권력을 손에 쥐고 자신의 개인적 영광을 추구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고 만다.
사울은 12지파 가운데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 겸손하게 출발했지만, 일단 힘을 얻고 나서 그는 교만과 독선에 빠져버리고 만다. 다윗이라는 신진세력의 등장은 사울에게 극도의 긴장과 초조감을 안겨다주고, 그러한 경쟁적 권력관리 방식은 마침내 사울 자신의 몰락을 가져오는 씨앗이 된다.
다윗이라고 또한 모든 것이 순조롭거나 언제나 영광스러웠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사울과의 대치 과정에서 최고 지도자로서의 훈련과 경륜을 쌓게 되지만, 그 역시 권력자가 되고 난 후 남의 것을 부당하게 빼앗거나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유혹에 빠지고 만다. 뿐만 아니라 왕권 계승의 질서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결과, 국가 혼란의 지경에 몰리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가족 내부의 권력투쟁이 벌어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솔로몬은 또 어떠했는가? 그의 출생에는 아버지 다윗의 욕망과 관련된 사건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가 성장하면서 치룬 배다른 형제들과의 권력투쟁은 처절했다. 솔로몬의 집권은 저절로 온 것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살아생전에 무리한 건축과 무거운 징세로 백성들의 불만을 샀으며 그 결과로 그의 사후, 이스라엘은 일부 지파의 반발과 봉기, 그리고 마침내 국가분열의 사태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따져보면, 이스라엘의 영광이 정점에 도달했다고 여긴 다윗과 솔로몬 체제의 이면에는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인간의 추악함과 유혈의 드라마가 있는 것이다. 당장의 놀라운 성취를 이룬 것 같지만, 그것이 가했던 상처와 희생, 그리고 욕망의 뒤엉킴은 두고두고 이스라엘 정신사에 힘겨운 멍에를 둘러씌우게 된다.
모두가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전도서의 기자가 솔로몬이라고 하면, 이 글은 그의 말년에 토해냈던 고백이었음이 분명한데 그가 마침내 당도했던 성찰의 내용은 그러한 인간적 욕망과 성취에 대한 추구,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벌였던 일체의 일들이 얼마나 덧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모두가 그의 영광과 성취를 칭송하고 그 자신도 그에 취해 살았던 시절을 지나 이제 그가 말했던 것처럼 “혈기왕성한 청춘은 덧없이 지나고” 그 또한 조상이 갔던 길로 돌아가야 하는 때가 왔다.
그런 시간이 되었어도 여전히 욕망에 휘둘려 지내게 된다면 그는 추한 노년을 보내고 말았을 것이다. 아버지 다윗은 그의 몸이 늙고 기운이 떨어지자 신하들이 젊은 여인을 침소에 들여보내 회춘을 시키려 했을 정도이니, 다윗보다 강성한 권력을 휘둘렀던 솔로몬은 그러한 노년의 쇠해진 기력을 복구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솔로몬은 아버지 대와 자신의 대에 이르러 겪었던 일체의 경험을 성찰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길에 대한 깊은 마음을 일깨운다. 전도서에서 가장 중요하게 사람들의 뇌리에 남은 말이라면,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을 보니 그 모두가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1:14)…내 손으로 성취한 모든 일과 이루려고 애쓴 나의 수고를 돌이켜 보니, 참으로 세상 모든 것이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고 아무런 보람도 없는 것이었다”(12:11)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고백은 권력과 영광과 성취에 취해 사는 인생의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고 또한 아무런 영원한 기쁨도 줄 수 없는 것인지 깨달으라는 그의 권고이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는 자칫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이 별 볼 일이 없으니 그저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고 애를 쓸 필요가 없다는 염세적 세계관을 설파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전도서의 이 “헛되고 헛되도다”라는 말씀을 흔히 그런 각도에서 이해하고 현실과 결별하고 죽고 나서 갈 천국에만 신경을 쓰라는 식의 설교와 교리를 강조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전도서의 정신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는 “탐욕은 지혜로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든다”(7:7)고 탐욕이 끼치는 악영향을 경계했고, “구덩이를 파는 자는 거기에 빠질 수 있고, 담을 허무는 자는 뱀에게 물릴 수 있으며 돌을 떠내는 자는 돌에 다칠 수가 있고 나무를 패는 자는 나무에 다칠 수 있다”(10:8-9)고 자신의 성취를 위해 발휘하는 계략과 간교함이 도리어 자신의 파멸을 자초한다고 짚고 있다. “어리석은 자는 악한 일을 하면서도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5:1), “적게 가지고 편안한 것이, 많이 가지려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낫다”(4:6)고 자족과 함께 선하게 살아갈 것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급하게 화내지 말아라. 분노는 어리석은 사람의 품에 머무는 것이다”(7:9). 분노는 인간을 어리석게 만든다. 사람의 품에 머물러야 하는 것은 사랑과 생명, 평화와 따뜻함이다. 분노가 자라면 반드시 죽음이 그 품에 찾아오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영혼을 지배하여, 사망의 권세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여기게 만드는 것이다.
한 마디로 전도서 기자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욕망하고 갈구하는 것들이 대체로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말하고, 그것을 그토록 구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스스로 병들게 하고 결실을 무망한 것으로 하고 있는가를 알고 있기는 한 것인지 되묻고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그는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3:12) 하면서 세상을 각성시키고 있다.
자기의 재능을 믿고 그걸 앞세워 세상에서 영광을 차지할 줄 알고 돌진하는 인생에 대해 전도서의 기자가 나누고 싶어 한 지혜는 실로 매섭다. “나는 세상에서 또 다른 것을 보았다. 빠르다고 해서 달리기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며, 용사라고 해서 전쟁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더라. 지혜가 있다고 해서 먹을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며, 총명하다고 해서 재물을 모으는 것도 아니고 배웠다고 해서 늘 잘되는 것도 아니더라”(9:11). 자기가 빠른 것을 자랑하며, 용사라고 재고 지혜가 있다고 까불대는 것은 모두 어리석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 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3:10)고 하면서, 그 “제 때”에 대한 지혜에 눈을 뜨고 살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전도서는 무리한 욕심을 부리지 말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며 세상의 영광과 칭송, 권력과 성취에 인생을 던지지 말고 취하지도 말며, 가장 소중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사는 것이 최고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은 일찍 있을수록 좋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젊을 때에, 너는 너의 창조를 기억하여라. 고생스러운 날들이 오고, 사는 것이 즐겁지 않다고 할 나이가 되기 전에”(12:1)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늙어가고 또 기력이 쇠하여 어쩌지 못하는 때가 반드시 오기 마련이다. 그 어느 누구도 한때의 젊은 시절의 힘이 늙어 죽을 때까지 그대로 간다고 장담할 수 없으며, 그 자랑으로 한 평생을 자기 영광을 구하며 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권좌의 영광에 취해 교만해지고, 자신의 간교한 지혜에 자만하여 구덩이를 파다가 자신이 그 구덩이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전도서의 기자는 “책은 아무리 읽어도 끝이 없으며 공부만 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한다”(12:12)고 말하고 있다. 세상에는 알아야 할 것들이 널려 있고, 그걸 쫓아다니면서 사는 것은 피곤한 일이라는 것이다. 최고의 지혜자라고 알려진 전도서의 기자는 지식에 의한 명성을 도리어 거부하고 있으며 그것에 사로잡혀 사는 인생을 택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지혜를 전도서의 기자는 말하기를 “전도자는 지혜로운 사람이기에 백성에게 자기가 아는 지식을 가르쳤다. 그는 많은 잠언을 찾아내어 연구하고 정리하였다. 전도자는 기쁨을 주는 말을 찾으려고 힘썼으며, 참되게 사는 길을 가르치는 말을 찾으면, 그걸 바르게 적어 놓았다.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찌르는 채찍 같고, 수집된 잠언은 잘 박힌 못과 같다. 이 모든 것은 모두 한 목자가 준 것이다”(12:9-11)라고 자신의 지혜의 근원을 밝히고 자신이 살면서 애써온 바를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도 모두 자칫 12절의 말씀에서 밝혔듯이 끝이 없고 곤고한 삶이 될 수 있다고 하면서 가장 중요한 근본이 어디에 있는지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 그 한 목자가 자신에게 준 말씀의 결론적 취지에 속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그분이 주신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의무이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를 심판하신다.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든 은밀한 일을 다 심판하신다”(12:13-14).
전도서 기자는 세상이 자신의 영광을 칭송하고, 자신 역시 자랑했던 그 모든 것을 이면에 자신만이 알고 있는 은밀한 생각, 소행, 사건들을 떠올린다. 아무리 대단하고 아무리 잘 났고 아무리 높고 아무리 강성해도, 그래서 남들이 모두 놀라워하고 칭찬하며 감탄할 지라도 이들이 알지 못하는 “은밀한 일”, 그것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든” 은밀한 일은 자기 자신과 하나님만이 알고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을 결국 하나님께서 일일이 다 아시고 기억하시며 또한 판단하신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산다면, 우리 인간이 세상에서 구하려는 영광과 성취, 그리고 부와 명성 이 모든 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갖겠는가, 돌아보라는 것이다. 자신과 세상에는 영광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위선이고, 자신과 세상에서는 성취와 명성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교만과 위선이라면 어찌하겠는가라는 질문이다. 자신과 세상 앞에서는 부와 권력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악행이자 죄라면, 그 모든 것은 결국 다 헛되고 말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전도서는 과연 인생의 덧없음과 헛됨을 일깨우고 말하는 책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도리어 인생이 헛되지 않고 덧없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길에 대한 성찰, 일깨움이라고 할 수 있다. 살아보니 사는 것이 별 볼일 없고 아무 것도 아니더라가 아니라 진실로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은 따로 있더라, 라는 것이다. 그러니 잘못된 길을 가지 말고 지혜로운 길로 가라는 것이다. 세상의 평판과 칭찬, 저주와 비난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의 눈,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에 바로 서라는 것이다. 그럴 때에 비로소 세상의 유혹과 칭송, 세상의 무시와 외면 그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고 보람 있고 뜻있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헛되지 않고, 덧없게 되지 않으려면…
전도서는 삶의 헛됨에 대한 염세적 철학을 주장하고 설파하는 책이 아니다. 모든 세상의 영광과 온갖 향락, 그리고 권력의 정점에 서 본 존재가 결국 도달한 가장 소박하고 진솔한 진실에 대한 고백이다. 다윗의 아들이라는 당대의 영광, 예루살렘의 왕이라는 권력의 정점, 그러나 이 모든 시간을 거쳐 나이가 드니 깊이 깨우쳐 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두렵게 대하며 그로 인해 얻게 되는 참 지혜로 인생을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헛되지 않고, 덧없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전도서의 말씀이 오늘날 우리사회와 교회의 현실에 주시는 뜻이 얼마나 큰가? 성장위주의 사회 발전 법칙에 휘말려 살아오면서 우리는 소중한 많은 것을 잃어왔다. 인간성은 물론이고, 자연의 생명력까지 파괴하면서 영광과 명성과 부와 권력과 그 밖에 세상이 구하고자 하는 것들을 손에 넣으려고 진력을 다해왔다. 때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구덩이를 파고 남들을 그곳에 빠뜨리려고 해왔다.
교회는 어떠한가? 교회 역시 자신의 몸집을 키우기 위해 부와 권력을 챙겨왔고, 그로써 이 사회의 현실에서 희생당하고 살아가는 이들을 외면해왔다. 그렇게 얻어진 교회의 성장과 영광은 과연 무엇일까? 세상은 모르지만 자신은 알고 있는 은밀한 죄는 또 얼마나 많을까? 이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생각과 판단을 내리실까?
하나님의 뜻을 외면한 영광과 성취, 그것은 아무리 강성하고 위대해보여도 다 헛된 것이다. 그런 인생, 그런 사회, 그런 국가는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다 악이며 결실 없는 행위에 불과하다.
오늘날 교회는 바로 이 전도서의 지혜에 깊이 머리와 가슴을 파묻고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헛되고 헛된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진실로 뜻있고 지혜로운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일찍 그렇게 할수록 좋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참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어갈 것이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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