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숙의 글밭(4)
떡볶이와 보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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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떡볶이 시켜주세요!", 폰 너머로 딸아이의 목소리가 간절합니다. 저녁답 영어 학원 하나만 든 날에는 6시면 일찍 집으로 오는 날. 이런 날은 된장국, 김치찌게가 한 달에 두세 번 꼴로 떡볶이로부터 밀려나는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릴 적에 떡볶이는 주로 아이들의 군겆질거리였답니다. 물오뎅, 꽈베기 도너츠, 군만두, 오징어와 고구마 튀김과 떡볶이. 간식 정도로 허기를 달래주던 떡볶이를 먹던 우리 세대가 성인이 되면서 떡볶이도 함께 성장한 것을 보게 됩니다.
매콤하고 얼큰한 각종 전골 요리에 쫀득한 떡볶이 떡은 빠질 수 없죠. 허름한 분식점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입가에 고추장을 묻혀 가며 오뎅 국물로 혀를 달래면서 먹던 간식. 어느 레스토랑에선 갖은 야채와 고기와 치즈를 얹어 근사한 요리로 변신하기도 한 떡볶이의 모습에서 격세지감을 느끼기도 하고요. 저희 집에서도 가끔은 이렇게 떡볶이가 저녁밥이 되기도 하니까요.
6.25 전란을 기점으로 빨간 고추장으로 버무린 떡볶이가 나왔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답니다. 매콤하고 달달하고 입에 착 달라붙는 그 쫀득한 떡볶이 맛에 길들여진 세대. 세 살 입맛이 평생을 간다는 옛말이 틀린 말이 아닐진대. 일주일에 한두 번은 떡볶이 노래를 부르는 중2 딸아이와 아직은 어린 아들의 입맛을 막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마치 홍수에 둑을 막으려는 것과 다르지 않은 힘겨운 씨름입니다.
아무래도 밥보다는 먹고 난 후 뱃속이 편하질 않기에. 속이 부대끼거나 따끔거리기도 하고요. 우유로 혀와 속을 달래 가면서 먹으라며, 그러면 좀 낫겠지. 스스로 위안을 삼을 뿐. 건강 염려가 영 사라지는 것은 아니랍니다. 오늘 저녁에도 길들여진 입맛의 요구에 엄마의 건강 상식은 맥없이 밀려나면서 두 손을 들고 말았답니다. "떡볶이 시켜 먹자!"
아이들이 떡볶이를 먹으면서 입가를 깨끗히 하기란 어려운 일인 듯합니다. 잘 모르는 나이일 때는 장난끼가 발동해서 얼굴에 묻은 고추장을 보고, 코에 묻으면 코피가 난다고 했고. 입가에 주룩 묻으면 어! 피다. 하면서 서로가 순간 놀람 속에 웃음꽃을 피우던 추억이 더러 있답니다.
붉은 피와 붉은 양념. 대중이 사랑하는 붉은 떡볶이를 볼 때면, 예수의 붉은 보혈이 겹쳐져 보이는 건 어디까지나 제 사사로운 시선일 테지요. 찬송가와 복음송에서 흔하게 나오는 주의 보혈. 사실 전 그 표현을 대할 때면 구원의 감동 이전에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피니까요. 피를 보거나 생각만 해도 두 다리에 전류 같은 섬뜩한 것이 타고 흐르는. 피부로 느껴지는 피는 섬뜩하고 무서우니까요. 보혈의 피는 구원 이전에 아픔이니까요.
가끔은 주의 보혈을 찬송하는 제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볼 때가 있답니다. 예수의 삶이 그러했듯 제자로써의 저의 삶을. 낮아지고 작아진, 가난하고 소외된 자리에 있는 이들과 함께 하는 삶이었던지. 아픔과 고통 속에 흐르는 붉은 피에 응당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 지금도 이 세상 어딘가 구석진 자리에서 아파하는 이들의 신음 소리가 끊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나 자신이 교회가 되어 스스로의 모습을 그려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제 자신에게 던진 물음에 대한 스스로의 대답은 항상 그렇지 않다, 입니다.
적당히 아프면 되는 것입니다. 가끔은 설탕처럼 달콤한 성공도 취하고 싶고, 바쁜 일상을 핑계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깊은 묵상의 자리에 앉을 틈도 내지 않는 바쁜 하루 하루. 열심이란 무딘 옷을 입고서 그럭저럭 하루를 채워가고 있는 건 아닌지. 그렇게 살아가다가 문득 채워지지 않는 내면의 허기와 싱거운 하루와 마주하게 되고. 거기엔 간장처럼 짭쪼롬한 양념같은 부지런함으로 본질을 덮어버리며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새벽기도부터 잠자리에 들기까지 얼만큼 깨어 있는 의식이었던가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게 이런 건가, 사는 게 이게 다가 아닌데 하면서도 세 살 입맛 같은 익숙함에 밀려난 내면의 소리들. 성령이 주신 양심. 타성과 익숙함과 노련함이라는 종교 생활에 묻힌 본성과 영성.
붉은 떡볶이와 보혈의 피. 즐겨 부르는 보혈의 찬송이 내 입을 즐겁게 하는, 구미에 맞도록 겉만 붉은 떡볶이처럼 고추장으로 버무린 보혈은 아닌지. 오늘도 제 둘레를 돌아봅니다. 떡볶이 와 보혈의 차이점은 떡볶이는 겉 양념이 붉고, 보혈은 속이 붉다는 것일 테지요. 갈수록 매워지는 떡볶이의 양념이 무딘 세대의 마음과 영적 허기를 채우려는 억지스러움은 아닌지. 헤아려봅니다.
떡볶이를 먹을 때도 눈물은 흐르니까요. 입이 매워서 흐르는 눈물인지, 가슴이 아파서 흐르는 눈물인지 깨어서 바라보려 합니다. 구원의 기쁨과 보혈의 눈물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샘물처럼 우러나와 강물이 되어 세상으로 흘러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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