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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

봄비, 얼마나 낮아지면('신의 날' Kol Nidrei)

by 한종호 2020. 3. 11.

신동숙의 글밭(106)

 

봄비, 얼마나 낮아지면('신의 날' Kol Nidrei)

 

온종일 봄비가 내립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비를 두고 떨어진다 하지 않고 내린다 합니다. 낮은 땅으로 가만가만 닿는 빗소리가 평온함을 줍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봄비는 말없이 가장 낮은 숨을 쉬며 이 땅을 하얗게 적십니다.

 

지난밤부터 마당으로 내리는 빗소리에, 온몸은 물기를 머금은 듯 아려옵니다. 그대로 마음이 가라앉으면 들뜨던 숨이 저절로 낮아집니다. 잔잔한 빗소리에 메마른 가슴에도 그리움이 흐르면, 앉은 자리 그대로 기도가 됩니다. 이 순간 쟈클린 뒤 프레(Jacqueline du Pre)의 첼로 연주곡인 브루흐의 '콜 니드라이'(Max Bruch, Kol Nidrei Op. 47)가 있다면 좋은 사우師友가 되어줍니다.

 

빗속에서도 땅으로 내려앉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얀 미소를 지우지 않을, 어제 본 매화꽃이 가라앉은 마음으로 하얗게 피어납니다. 우리네 옛 선비들은 문향聞香이라 했습니다. 봄에 피운 꽃은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귀로 그 향기를 듣는다 했습니다. 그 그윽한 말이 그대로 첼로 선율로 흐릅니다. 음악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선율과 하나가 된 가슴이 한 호흡으로 들으며, 온몸의 세포 하나 하나가 알알이 깊은 숨으로 들으며, 비로소 음악은 빗물처럼 젖어듭니다.

 

 

 

 

'콜 니드라이'는 브루흐가 고대 히브리의 전통적인 선율인 성가곡 <콜 니드라이>를 변주시킨 환상곡입니다. '신의 날'이란 뜻을 지닌, 유대 교회에서는 속죄의 날에 부르던 찬송가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곡은 낮고 느린 선율 속에 종교적인 영성이 넘쳐 흐르면서도 그녀의 연주는 철학적이고, 동양적인 사색과 명상과 서정적인 정서가 담박하고 농후하게 깃들어 있습니다.
 
한 하늘 아래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날들이 콜 니드라이, '신의 날' 아닌 날이 없겠지만, 무언가에 가려져 눈이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귀가 있는 그대로 듣지 못하는 이유를, 바쁜 일상 속에서 그저 습관적으로 얕고 가쁜 숨을 쉬며 살아가기에, 더 낮아지고 더 깊어지지 못함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봅니다.

 

땅으로 낮게 낮게 조용히 내리는 빗소리는 깊어짐입니다. 빗소리에 가쁘던 숨이 차츰 낮아지고, 그리움은 아득히 깊은 먼 데로 흐릅니다. 높은 하늘에서 가장 낮은 땅으로 내리는 팽팽한 빗줄기처럼 내 안의 그리움을 당기는 보이지 않는 팽팽한 줄이 잇닿아 있을 한 점 끝까지, 그리움은 빗물처럼 흐릅니다. 그렇게 빗소리는 고요히 머물다 흐르는 침묵의 기도가 됩니다. 고요히 머무는 기도의 자리는 비로소 내 영혼이 쉼과 안식을 누리는 하나님의 고독과 만나는 에덴동산이 됩니다. 처마 끝에 머물다 떨어지는 빗소리에 아득히 깊어지지 않을 심령이 어디 있을런지요.

 

이 땅에 탐욕이 쌓여 갈수록 건물은 높이 올라갑니다. 세상의 헛되고 거짓된 욕망에 단단하게 푸른 멍이 든 가슴에도 봄비는 공평하게 내립니다. 그렇게 봄비는 이 땅에서 말없이 깊은 숨을 들이쉬며 내쉽니다. 신발이 없던 그 옛날, 그 마음 얼마나 낮아지면 제자들 발아래 무릎을 꿇고 앉아서 더러운 발을 씻겨 줄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 이 땅에 모든 생명들을 향하는 그 존귀한 마음이 얼마나 낮아지면, 그 거룩한 사랑이 얼마나 지극하면 빗물처럼 낮아질 수 있을까요. 빗물이 눈물이 되어 흘러 넘쳐 온 땅과 메마른 심령을 적시는, 그 헤아림으로 '신의 날'을 듣습니다.

 

오늘처럼 온종일 봄비가 내리는 고요한 날에, 그녀의 첼로 선율에 숨도 몸도 마음도 매화꽃잎처럼 가벼이 내려놓습니다. 아릿한 손가락이 아픈 몸이 아픈 마음이, 평온한 숨으로 위안과 치유와 평화로운 안식을 얻습니다. 아픔이 아름다움이 되고, 사랑이 될 수 있는 것은, 고요한 기도의 시간 가운데 봄비처럼 내려주시는 하늘의 은총입니다.

 

Jacqueline du Pre, Max Bruch, (Kol Nidrei Op. 47)

https://youtu.be/i91RX2LhY8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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