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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

3월의 푸른 차나무

by 한종호 2020. 3. 8.

신동숙의 글밭(103)

 

3월의 푸른 차나무

 

머리가 무거울 때면 산으로 갑니다. 산 좋고, 물 좋고, 인적이 드물고 그러면서도 안전한 곳으로 작은 암자만한 곳도 없습니다. 그럴 때면 암자가 있는 자리에 대신 작은 예배당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산 속 오솔길을 걷다가 작고 소박한 예배당 십자가가 보인다면, 도시락을 넉넉히 싸들고서라도 부지런히 찾아갈 텐데 말이지요.

 

헝클어진 머리칼을 빗듯이 뒤죽박죽 세상 뉴스에 헝클어진 마음의 결을 고르기에는 자연이 좋은 처방전입니다. 아무런 말없이 고요히 앉았다가 오는 일입니다. 산에선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집니다. 가슴에서 들려오는 작은 숨소리까지 귓전에 잔잔하게 울리면 가던 걸음을 잠시 멈추어 먼 산 능선을 가만히 바라보기도합니다. 그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 들뜨던 숨은 낮아집니다.

 

가끔 찾는 산 중에는 통도사가 있는 영축산이 있습니다. 많은 암자들 중에 가장 높이 있는 극락암을 종종 찾아갑니다. 대웅전 오른편으로는 네모난 돌확이 삼단으로 낮게 낮게 물을 흘려 보내는 약수터가 있습니다. 맨 윗물을 떠서 마시기도 하고, 물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기도 합니다. 저만치 노란 산수유가 피었습니다. 약수터를 끼고 뒷편 오름길을 따라서 오르면 동백나무가 줄지어 서서 다정한 길동무가 되어줍니다. 분홍 애기동백, 붉은 동백, 흰 동백이 다 다른 얼굴입니다.

 

 

 

소나무와 대나무가 병풍처럼 둥글게 감싸며 서 있는 모습이 시야로 푸르게 펼쳐집니다. 그리고 가장 먼 둘레에는 언제나 하늘이 커다랗습니다. 단단하던 마음으로 맑은 바람이 훑고 지나가는지 순간 텅 비는 느낌입니다. 그렇게 아무 말없이 슬어주는 푸른 손길이 한결같습니다. 소나무와 대나무 숲 앞으로 푸른 나무들이 정갈한 모습으로 나직하게 줄지어 서 있습니다. 혹시나 싶어서 가까이 다가가서 잎을 살펴보니 차나무가 맞습니다.

 

아마도 극락암에 거하시는 스님들의 맑고 푸른 차 도반이었을 테지요. 차나무가 정갈하다지만 더욱 정갈해 보이는 이유가 그런 연유가 아닌가 하고요. 아직 새순이 올라오기 전의 찻잎은 두껍고 단단합니다. 갈색 씨앗들이 떠나간 빈 씨방이 움켜쥔 것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마치 세상으로 활짝 피운 갈색 꽃잎처럼 열려진 빈 씨방에는 하늘만 가득합니다. 앞으로 봄비가 두세 번 정도 더 내린다면 어린 찻잎이 참새 혀처럼 뾰족이 얼굴을 내밀 것 같습니다.

 

성격도 차가운 차나무라서 그런지 지리산 노지에 있는 차나무 중에도 겨울을 지나면서 종종 냉해를 입기도 합니다. 푸르던 잎이 온통 붉은 빛을 띈 모습을 보는 것 만큼 처연한 모습도 없습니다. 하지만, 한 마을에 있는 차나무라도 노지가 아닌 소나무와 대나무 숲에 있는 차나무는 추운 겨울 바람에도 냉해를 입지 않습니다. 푸른 소나무와 대나무처럼 찻잎이 푸른빛 그대로입니다.

 

지난 겨울 동안 이곳 작은 암자 뒤에 있는 차나무 식구들도 속 마음이 따스했는가봅니다. 소나무와 대나무 숲이 곁에서 맑고 푸른 스승과 도반이 되어주니 든든했을 테고요. 임길택 선생님의 말씀처럼 소나무와 대나무는 하늘 높이 자랍니다. 낮은 하늘을 차나무와 작은 생명들에게 내어주려고요. 올해도 어김없이 따스한 봄날입니다. 모처럼 맑은 하늘에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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