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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

검사를 꿈꾸는 딸에게 딴지를 거는 나쁜 엄마

by 한종호 2020. 3. 15.

신동숙의 글밭(110)

 

검사를 꿈꾸는 딸에게 딴지를 거는 나쁜 엄마

 

지금으로부터 2년 전, 딸아이가 다니던 초등학교 체육관 졸업식장에선 진풍경이 펼쳐졌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준비하신 졸업생들을 위한 고별 인사가 참석한 모두에게 감동을 안겨준 사연입니다. 특이하게도 졸업생의 이름을 한 명씩 호명하면, 한 명씩 강단에 오릅니다.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졸업장을 받고, 악수를 나누며 인사를 하는 의식입니다. 그때 커다란 스크린에 띄운 배경 화면은 한 학생의 꿈입니다. 화면 왼편으로 학생의 인물 사진과 이름 그리고 꿈이 커다랗게 적혀 있는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진 학부모들도 있었습니다. 마치 졸업식장을 가득 메운 졸업생들과 배웅을 나온 5학년 후배들과 모든 선생님들과 학부모들 앞에서 선서라도 하듯, 미래의 꿈을 다짐이라도 하듯, 그렇게 졸업생들의 꿈이 날개를 펼치듯 펼쳐졌습니다. 마지막 반에 한 명의 졸업생에게까지 교장선생님의 고별 인사는 시냇물처럼 길게 길게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교장선생님은 졸업생 한 명 한 명의 손을 다잡아 주시며, 중학생이라는 더 넓은 물줄기로 나아가는 어린 꿈들을 응원해 주셨습니다.

 

졸업생들의 꿈은 다양한 듯했지만, 비교적 인기 있는 직업군들이 눈에 띄기도 했습니다. 유행에 따라서 컴퓨터 프로게이머, 아이돌 가수, 디자이너 등. 제 딸아이의 꿈은 흔치 않은 '검사'였습니다. 그 꿈은 이미 그전부터 딸아이의 입에서 심심하면 나오던 그런 꿈이었습니다. 딸아이의 입에서 '검사'라는 단어가 튀어 나올 때마다, 엄마는 가슴이 뜨끔뜨끔해지곤 했습니다. 솔찍한 엄마의 심정으론 딸아이가 '검사'가 되고 싶다고 할 때마다 뜯어 말리고 싶었습니다. 상대해야 하는 사회적 관계가 주로 범법자와 범죄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세계가 얼마나 머리 무겁고 마음을 슬어내려야 하는 일들이 많을까 싶은 마음에, 겁없이 '검사, 검사' 멋진 노래를 부르듯 되뇌이는 딸아이의 모습이 내심 못마땅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직업에 따르는 사회적 책임감이라는 무게가 가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게 가슴을 눌러오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딸아이를 6학년이 될 때까지 그 흔한 영·수 학원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문제집을 풀게 하지만, 비교적 자율에 맡기다 보니 허술한 곳이 많았습니다. 잠시 잠깐씩 시켜본 학습지도 그저 그랬습니다. 그 대신 다니던 피아노 학원을 접고 피아노 개인 레슨을 받게 한 것과 합기도가 유일한 사교육이었습니다. 6학년 첫 시험을 일주일 앞두고서, 학교에서 돌아온 딸아이가 하는 말이, 자기가 학원을 다 알아봐뒀으니, 엄마는 가서 등록만 해주면 된다면서, 더는 느린 엄마를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엄마의 손목을 붙잡고 끌고 가다시피 딸아이가 앞장 서서 찾은 걸음이, 처음으로 학원에 입성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날 마침 피아노 레슨이 있던 시각이라 레슨 선생님은 영문도 모른채 바람을 맞으셔야 했고, 엄마는 죄송하다는 인사를 거듭 드려야했습니다.

 

또래 친구들에 비해서 3~4년은 늦게 학원에 들어간 딸아이는, 그동안 학습에 대한 굶주림이 컸던지 무섭도록 흡수를 했습니다. 이후로 중학교 2학년, 전과목 올 A 등급을 받았다는 점수도, 겨울 방학이 끝나갈 무렵에야 엄마는 성적표를 보고서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에 받은 표창장에 이어서, 중학교 1학년에 올라가서도 반대표로 표창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엄마는 너무나 게으른 엄마입니다. 중학교 영·수 학원을 알아보는 일도, 딸아이는 친구들과 셋이서 여러 친구들에게 물어본 후, 적합한 곳을 선택한 후 엄마에겐 결재만 부탁했으니까요. 그렇게 딸아이에게 '검사'라는 꿈은 초등학교 4~5학년 무렵부터 3년이 넘는 제법 긴 기간 동안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엄마로써 딸아이를 길들이는 방법이 딱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럴거면, 학원 가지마! 공부하지마!" 이 말이 유일한 벌이자 브레이크가 됩니다. 어디까지나 인성의 터전을 다지기 위함입니다.

 

평점 90점이 넘지 않을 거면 학원에 가지 말고, 집에서 공부해도 충분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딸아이는 학원을 다니기 위해서라도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는 듯 보이기까지 했으니까요. 학원 선생님들과 친구들과 함께 하는 공부가 그렇게 재미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딸아이가 학원보다 더욱 좋아하는 곳은 학교였습니다. 초등학교 입학 이후 단 한 번도 학교에 가기 싫단 소리를 들은 적이 없으니까요. 심지어는 아침잠을 깨워본 적도 거의 없답니다. 딸아이는 엄마보다 항상 먼저 일어나서 머리를 감고 왔다갔다 하곤 합니다. 단 중학생이 되고 밤10시까지 다니는 학원을 쉬게 된 토요일에 "엄마, 토요일이 왜 좋은 줄 알겠어. 쉴 수 있으니까." 그러면서 또 그런 말을 하는 자신이 재미난 듯 웃습니다.

 

 

 

 

초등학교에선 일년에 두 차례, 학교 전체 공개 상담 기간이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교실에서 담임선생님과 마주앉게 됩니다. 늘 담임선생님들로부터 고맙다며 좋은 인사를 들어오곤 했습니다. 5학년 담임 선생님께서는 학부모인 저를 보시자마자 허리를 90도로 굽히시면서 "따님을 잘 키워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정중히 인사를 하시는 바람에, 몸둘바를 몰라하는 저에게 자리에 앉으시라며, 살뜰한 인사를 해오시기도 하셨습니다. "원이는 남자친구들하고도 잘 놀고, 여자친구들하고도 잘 놀고, 모듬 수업에선 늘 리더를 잘 합니다." 딸아이는 학원을 다니지 않아서 상대적으로 시간이 남다 보니, 학원으로 바쁜 친구들을 대신해서 과제들을 꼼꼼이 챙기곤 했으니까요. 딸아이는 그렇게 늘 사회적 평판을 후하게 받곤 했습니다. 미술상, 글짓기상, 시 교육청에서 주최하는 과학의 날 행사에선 2인 1조 학교 대표로 나가서 장려상을 받아오기도 했습니다. (사교육 경험이 없이요.) 그동안 받은 상장을 벽지로 붙이면 ㄱ자로 다 붙일 정도입니다. 자꾸만 자녀 자랑으로 흘러가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조금 더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어서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맨 마지막에 있습니다.

 

5학년엔 친구들과 다함께 놀러간 친구집에서 친구들이 딸아이에게 금지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책 읽기 금지령' 그러면서 딸아이는 한바탕 웃습니다. 딸아이는 스마트폰을 얻기 위해서 아빠가 제안한 2년 동안의 약속을 다 이행하기도 했습니다. 잠언 암송과 성경 읽기입니다. 4학년이던 11월부터 5학년이 되던 2월까지 성경을 4독을 한 것입니다. 제대로 읽었는지 물어보면 읽었다고 대답을 합니다. 하기야 신학을 전공한 박사님들도 성경을 수차례 읽으셨다고 해도, 그 이해의 깊이는 주시는 만큼의 은혜 외에는, 더 깨칠 수 없는 책이 성경이기에 그쯤에서 읽기 이해의 확인을 그치기로 했습니다. 성경 읽는 모습을 별로 본 적이 없는데, 언제 읽었느냐고 물으니, 주일날 어른들 대예배 시간에 아빠 옆에 앉아서 읽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짜투리 시간을 합해서 4개월 동안 성경 4독을 하게 된 것입니다. 딸아이의 정직성은 저도 신뢰를 하는 입장이라서 더는 묻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만하면 충분하니 그만 읽어도 된다고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교만해지지 않을까 싶어서입니다. 그 당시에 교회 주보에는 전교인의 성경 읽은 횟수를 공개적으로 기록을 했었는데, 혹시나 어른들과 자신을 비교해서 자칫 어린 나이에 교만해질 것이 염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딸아이가 꿈이 검사라고 얘기할 때마다, 저는 결코 그 꿈을 추켜 세우지 않습니다. 검사라는 직업이 어떤 일인지 저도 잘 모르는 입장에서, 아무리 헤아린대도 결코 가볍지 않은 직업의 무게감과 사회적 책임감과 인생 전체를 둔 행복만족감에서 딱히 뭐라고 장담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딸아이가 검사라는 꿈 얘기를 해올 때면, 엄마는 언제나 딴지를 거는 입장입니다. 간혹 말투에서 또래들 사이의 거친 은어가 튀어 나온다든지, 별로 친하지 않다는 이유로 또래 친구 누군가를 좋지 않게 얘기를 한다든지, 인사를 제때 안한다든지, 딴지를 거는 이유는 그야말로 사소하지만, 인성의 기본 밑바탕이 되는 씨앗 같은 점들입니다. 그래서 엄마는 학업 점수엔 별관심도 안두면서, 그런 사소한 인성 부분에선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인성의 꼬투리를 잡을만한 낌새가 보일 때마다, 걸고 넘어지는 엄마가 거는 딴지의 한 마디는, "그럴거면 공부하지마! 공부는 인성이 기본이 된 사람이 하는 거다. 그렇지 않고 만약 자기 욕심에 공부를 잘해서, 중요한 공직자나 법조인이라는 직업을 갖게 된다면, 엄마는 자기 자식을 괴물로 키우는 거다. 엄마는 내 자식이 무식하면 무식했지, 괴물이 되어서 남들 괴롭히는 꼴은 못 본다!"

 

다행인지 딸아이는 청개구리 기질을 타고난 듯합니다. 유년기에 유일한 벌은 "책 읽지마!"였습니다. 놀이터에서 한창 재미나게 놀다가 모처럼 앉아서 책을 1시간 넘게 보고 있으면, "딸아 제발, 책 좀 그만 읽고 집에 가자아." 그러면 딸아이는 그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책 속으로 뛰어 들어갈 기세가 됩니다. 잠자리에선 "이것만 읽고 자야해에." 그러면 딸아이는 눈에 불을 켭니다. 딸아이의 놀이터였던,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구해온 새책을 두고서 "엄마가 잠시 갔다올 동안에 읽으면 안돼에." 그렇게 부드럽게 말해 놓으면, 딸아이는 여지없이 책 앞에서 안달을 합니다. 그 방법이 딸아이에겐 제법 효과가 있었기에, 동생에게도 그대로 적용을 시켜 보았지만, 동생은 언제나 엄마의 말을 곧이 곧대로 순종을 하는 순둥이였습니다. 그걸 뒤늦게 깨닫고서는 아차 싶었으니까요.

 

그렇게 엄마는 딸아이가 중 2학년이 될 때까지도 검사라는 꿈에 대해 끊임없이 딴지를 걸곤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잠언 한 절부터 시작된 암송이 점점 그 암송력이 늘어나서, 일년이 지나니 단숨에 20절을 외우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늦은 학원 입성에도 불구하고 영어단어 외우기에서 언제나 일등으로 마쳐서 일년도 안되어 상급반에 올라가기도 했습니다. 딸아이는 그렇게 승부욕과 두뇌 회전이 빨라서 늘 엄마를 긴장하게 만드는 자녀였습니다.

 

딸아이에게 가장 많이 들려주는 법조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효봉스님입니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인으로써 법복을 입은 수재, 한국인 최초의 판사입니다. 그는 자신이 내린 판결 중에서 독립 운동을 하다가 붙잡혀 온 청년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게 된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형 판결의 자리에서 그 자신을 쳐다보던, 그 청년의 마지막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내가 무엇이관대 한 청년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는가!" 그 후로 그는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판사복을 벗었습니다. 그리고 걸인처럼 세상을 떠돌아다니다가 승려가 되었습니다. 상좌를 받지 않기로 유명한 노승은 딱 두 명의 제자를 받습니다. 시인이 된 고 은과 법정스님입니다. 그 후로 고 은 시인은 파계승이 되어서 세상으로부터 최고의 찬사까지 받았지만, 알 수 없는 일로 더이상 매스컴에서 뵐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존경하던 시인이었기에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제 거의 딸아이에 대해서 간략하게 다 적었습니다. 그동안 참으로 많은 선생님들로부터 칭찬과 상장과 사랑을 참 많이도  받아온 것 같습니다. 게으른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건, 학교와 선생님들에 대한 햇살 같은 신뢰 뿐이었다고 할 만큼 뒷바라지라곤 없었으니까요. 사실 제 하루를 사색으로 채우기에도 저는 늘 부족합니다. 그리고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괜한 자식 자랑이 되었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재주가 인성을 넘어선 안된다는 입장입니다. 알 수는 없지만, 만약에 딸아이가 상위 1프로의 수재라고 해도 그 재주가 인성을 넘어선 안된다는 점입니다. 만약에 검사라는 사회적 책임이 무거운 자리에 앉은 자녀에게 일수록, 그 재주나 욕심이 지나쳐 양심과 정의를 넘어서는 일에 대해선, 극히 경계하고 또 경계하려는 부모의 입장은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초등학생 때부터 3년이 넘게 이어져 오고 있는, 자녀의 검사라는 꿈 앞에서 엄마로써 늘 당당하게 딴지를 걸 수 있는 이유입니다. 엄마 말고는 그렇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만약에 있다면, 그건 자녀 내면에 있는 양심일 겁니다. 제가 초점을 맞추는 곳은 겉으로 드러난 자녀의 재주, 뛰어남이 우선이 아닙니다. 물론 잘하면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근본으로 들어가 따져 보려고 합니다. 언제나 깨어서 살피는 곳은 자녀의 내면에 보이지 않는 양심입니다.

 

성철스님에게 제자가 되려고 찾아온 젊은 청년이 있었습니다. 제자가 되려면 한 가지를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제자가 들은 단 한 마디의 말씀은, "자기를 속이지 마라". 성경을 읽은 저에게 양심은 곧 성령이 됩니다. 진리의 영입니다. 예수가 하늘로 가시며 공평하게 주신 선물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나 없는 자나, 이방인에게나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신 양심이 있어서, 어느 누구도 자기의 내면에 빛나는 양심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책을 좋아하던 딸아이도 스마트폰과 단단히 유착이 되고부터는, 이제는 가끔 검사라는 꿈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아이돌 가수가 부럽다고도 합니다. 그런 와중에도 게으른 엄마지만, 늘 지켜보는 것은 공부가 첫째가 아닙니다. 잔재주도 부리면 좋지만 언제나 그 다음입니다. 첫번째 조건은 딸아이가 자신을 속이지 않고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직업에 책임윤리가 뒷받침이 되어야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양심과 책임감과 정의를 우선에 두어야 하는 법조인의 자리에서, 만약에 제 자녀가 사리사욕을 챙기려고 한다면, 그것은 도둑질이 되고, 엄연한 범법자와 법죄자가 되는 길입니다. 당연히 엄마로써 가슴을 치면서 회초리를 들고서 종아리를 쳐서라도 법복을 벗겨야 하는 경우가 됩니다.

 

세상을 속이는 일도 죄가 되지만, 자기 스스로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일, 공직자가 정의롭지 못하다면 그야말로 그 인생은 추하게 추락한 인생이 되니까요. 자자손손 그 만큼 수치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요? 만약에 내 자식이 그렇다면 당장에, "너! 검사하지마! 당장 옷 벗어!"라고 말해야지요. 유아기에 조막손에서 책을 뺏듯이, 중2의 2학기 기말고사 전날 밤에 '그럴거면, 공부하지마!'라는 말로 딸자식의 눈에서 눈물을 쏙 빼놓았듯이, 그렇게 법복을 벗길 일입니다. 그것이 내 사랑하는 자녀의 영혼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건물이 뭐라고, 땅이 뭐라고, 세상을 속이는 것보다 더 나쁜 죄, 양심과 정의를 지켜야할 공직이자 법조인의 자리에서 자기 자신을 속이느냐면서요. 결혼을 한 후에는 딸이라면 시어른,  아들의 경우에는 장인과 장모도 다같은 부모가 될 테지요.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복음 10장 26~33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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