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자리의 종횡서해(5)
은혜 받은 자, 그 존재의 이유
앨버트 칸의 《첼리스트 카잘스, 나의 기쁨과 슬픔》
“1889년 바르셀로나의 한 고서점, 열세 살의 파블로 카잘스가 먼지와 곰팡이로 뒤덮인 악보들 사이에서 기적과도 같은 발견을 한다. 빛바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필사본, 바흐 사후 한 번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사멸된 이 곡은 천재 첼리스트의 손에 운명처럼 쥐어지고 그가 25세 되던 해에 비로소 공식적으로 연주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이것이 이 책을 읽기 전, 천재적인 첼리스트라는 것 외에 내가 파블로 카잘스에 대해 알고 있는 단 하나의 에피소드였다. 이나마도 그를 소개하는 TV의 어느 문화 교양 프로그램에서 얻어들은 것이었다. 잊혀졌던 바흐의 필사본, 사멸된 곡의 부활, 먼지 더미 속의 악보 속에서 바흐를 알아본 열세 살 소년의 맑은 눈 등이, 음악에 문외한인 나에게도 무척이나 신화적으로 다가오는 인상적인 에피소드였다. 그런데 이 책은 바로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으로 첫머리를 연다(카잘스의 음악을 모르면서도 나름대로 우호적인 감정을 갖고 책을 펼 수 있었던 근거가 책을 펴자마자 간단히 부인되자 사실 조금 허탈했다).
그러나 이 에피소드가 전혀 근거 없이 떠도는 전설은 아니었다. 그가 어둠 속에 묻혀 있던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처음 발견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 연습곡으로밖에 인정받지 못하던 이 곡의 음악적 가치를 불과 열세 살 나이에 그 음악적 가치를 꿰뚫어보았고 스물다섯 살에 혁신적인 첼로 주법으로 재해석해 모음곡의 형태로 연주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세상에 알린 것은 역사적 사실이었다. 이 사건은 음악사에서 그의 천재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중요한 분기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 이어지는 그의 탁월한 업적들에 대한 숭배는 이 에피소드를 보다 더 극적인 쪽으로 비약시켰던 것이다.
“한 예술가의 생애는 자기 이념과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1876년에 태어나 1973년에 사망한 카잘스의 삶은 숨가쁘게 이념과 분쟁의 파국을 헤쳐나가야 했던 백여 년 유럽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것이었다. 특히 유럽 역사의 가장 큰 아픔이자 상흔으로 남아 있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유태인 학살과 스페인 내전을 직접 겪었으며, 파시즘의 압제에 항거해 망명 생활을 선택한 그의 삶은 그 자체로 유럽 역사의 현장이었다.
스페인보다는 에스파냐 사람이라고 해야 더 적절한 그는, 에스파냐 왕정 통치 아래 있었지만 고유한 문화와 언어를 가지고 부단히 독립을 위한 노력을 해온 카탈루냐 사람이었고, 그의 특출한 음악적 재능을 알아본 왕실과 귀족들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게 된 음악가였지만 독립을 바라는 조국의 열망을 잊지 않았으며 평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진 공화주의자였다. 에스파냐의 공화 정부가 프랑코에 의해 침탈당하자 카탈루냐와 피레네 산맥을 사이에 두고 있는 남프랑스의 프라드에 망명한 그는 모든 공식 활동을 거부하고 망명자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그는 프랑코 정권이 지배하는 에스파냐로 돌아가지 않았으며, 자국의 이익 때문에 프랑코 정권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나라에 대한 연주 활동을 거부했다. 그의 안위를 염려한 각국의 명망가들과 음악가 동료들이 안락한 망명지와 후한 조건의 연주회 등으로 그를 움직이려 했지만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으로서 그리고 세계에 널리 이름이 알려진 음악가로서 자신의 책무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모독은 곧 나에 대한 모독입니다. …`예술가는 특별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특별한 감수성과 지각력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도 예술가의 목소리는 전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124쪽).
또한 그는 인간의 신념이 생각으로 지니고만 있거나 말로 표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실현하는 것이라는 걸 보여주었다. 연주자가 자신의 신념을 보여주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자신의 연주가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하는 것과, 신이 부여한 음악가의 책무이자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최대의 무기인 악기를 내려놓고 침묵함으로써 오히려 존재적 저항을 시도하는 것이다. 카잘스는 이 두 가지 방법을 자신의 상황이 아니라 시대의 요청에 따라 자신의 신념에 맞게 실행하였다.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도 예술가의 목소리는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을 실현하는 과정을 보면 예술가 역시 하나의 육체 노동자입니다”
“거의 모든 경우 수월한 연주는 최고의 노력에서만 나오는 결과입니다. 예술은 노력의 산물입니다”(117쪽).
카잘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그는 누가 보아도 내추럴 본(Natural born) 천재 예술가이다. 십대 소년 시절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싸구려 카페에서 시간제 아르바이트 연주를 해도 ‘꼬마’의 소문을 듣고 멀리서 청중들이 몰려들고, 전통적인 첼로 주법과 손의 위치 등을 무시하고 자신이 연주하기 편한 자세로 첼로를 다루어도 매번 그의 연주에 감동한 교사는 연주법을 교정하라 하지 않았으며, 보잘것없는 그의 출신과 초라한 차림새를 비꼬던 브뤼셀의 콧대 높은 음대 교수도 그의 단 한 번의 연주에 무릎을 꿇었다. 유럽의 왕실들과 막역한 친분을 쌓고 최고의 지성들과 교류하며 최고의 무대를 연출했던 그로서는 늘 연주를 위한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굳이 노동자에 비유할 것까지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노동자라 칭한다.
“내가 예술가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예술을 실현하는 과정을 보면 역시 하나의 육체 노동자입니다. 나는 일생 내내 그래왔어요”(117쪽).
그도 예술가의 자질로서 무엇보다 직관과 감성 그리고 그것을 깊이 있게 표현해 낼 수 있는 지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직관과 감성의 실현이 결국은 부단한 노력과 단련된 육체적 노동의 결과물로 나타나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음악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언어로 연주해야 한다는 생각 또한 확고했다. 자신이 예술 노동자인 만큼 그리고 음악이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예술이어야 하는 만큼, 청중의 범위도 귀족이나 교육받은 지성인, 경제적으로 여유 있고 잘 사는 사람들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노동자도 음악을 듣고 연주하며 향유할 엄연한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동정적인 시혜를 베푸는 무료 자선 음악회의 형태로 노동자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의 자긍심을 살려주면서 그들에게도 음악을 향유할 수 있게 지혜를 짜낸 것이 바로 노동자 음악회였다. “그 비용은 누가 지불합니까?”라고 묻는 노동자 대표들에게 그는 대답했다. “당신들이 하지요.” 당시(1928년) 환율로 따져 약 100달러 미만의 월급을 받는 사람들로 제한된 회원들이 일 년에 1달러씩 모아서 음악회 기금을 마련하는 것이다. 오케스트라는 카잘스가 제공하고 자신도 연주하고 다른 독주자들도 섭외하는, 형식과 내용이 제대로 갖추어진 프로 음악회였다. 그는 이렇게 개최된 제1회 노동자 음악회를 회상하며 말한다.
“200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회장에 모였습니다. 소박한 차림의 남녀들이 연주회가 시작하기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내 가슴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차올랐습니다. …`바르셀로나 노동자들의 환호는 그때까지 내가 받은 그 어떤 박수갈채보다도 의미가 컸습니다.”
에스파냐 왕실은 물론이고 영국과 브뤼셀 등 유럽 왕실들 그리고 백악관의 존 F. 케네디 부처 앞, 세계 14개국에 중계되는 유엔 회관에서 연주했던 그가 1달러의 기금으로 마련한 노동자 음악회의 감흥을 그 어떤 갈채보다 벅차고 각별한 것으로 전하는 모습은, 위대한 음악가이기 이전에 진정한 형제애를 가진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은혜는 어디에 있는가
자서전을 써 보라는 몇 번의 권유에 “내 생애가 자서전을 써서 기념할 만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나는 그냥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라고 답했던 카잘스. 그런 그를 잘 알고 있는 작가 앨버트 칸은 이 책을 통해 ‘예술과 인간적 가치 사이의 뗄 수 없는 친화력’이라는 믿음에 대한 신앙고백을 전 생애에 걸쳐 최우선으로 삼았던 사람의 모습으로 그를 제시하고자 했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작가의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자칫 현학적이거나 잰 체하듯 읽힐 수도 있는 이야기들을,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깊이 있지만 어렵지 않게, 어둡고 무거웠던 시대의 진술이지만 따뜻하고 정감 있게, 단호하지만 흥분하지 않고, 확고하지만 부드럽게 옮겨 놓을 수 있었던 것은, 작가 앨버트 칸이 보여주고자 했던 휴머니스트 카잘스에 대한 접근 방식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이들이 이루어 놓은 일들은 감히 따라갈 수 없는 영역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위대한 천재 예술가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해치는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고 형제에 대한 도리를 지켜온 카탈루냐 사람 카잘스의 삶은 조용히 묻는다. 자신의 재능을 형제를 위해 사용하는 것은 천재 예술가에게만 부여된 책무인가를.
이 땅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았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많다. 고백을 빙자해 노골적으로 ‘받은 은혜’를 자랑하고 그것을 이용해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는 사람들도 많다. 가벼이 드러내진 않아도 자신의 ‘받은 은혜’에 내심 우월감을 가지고 자기 옆 사람을 은근히 얕보는 사람은 더욱 많다. 그 은혜의 섭리를 회중 앞에서 공공연히 떠들면서도, 그것조차 특권으로 향유하거나 위협적으로 휘두르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물어보자. 지금 이 글을 쓰고 읽는 이 순간, 은혜 받은 자의 책무와 그것을 마땅히 사용해야 할 곳을 아는 사람의 자리는 어디인가.
김경실/<아름다운 날> 출판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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