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11)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사랑
- <이스라엘 전도에 국한한 이유> 1936년 8월 -
성서를 읽다보면 종종 당황스런 내용을 접한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에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있다고 고백하던 신앙이 도전받을만한 구절들이다. 구약 본문에서 그런 ‘시험’에 들 만한 부분을 얼마나 많이 발견했으면 초대 기독교 신학자였던 마르시온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아예 다른 존재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물론 마르시온은 이단으로 정죄 받은 인물이나, 적어도 그가 신앙의 눈으로 성서를 읽다가 이스라엘만을 위해 이방민족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을 향해서도 마치 ‘분노조절장애자’처럼 행동하는 신의 묘사에 얼마나 당황했을지, 그 ‘심정’만큼은 이해가 된다. 하나님은 전 인류, 아니 이 우주의 창조자시라고 고백하는 신자로서, 어찌 그리 일관성 없고 편협하기까지 한 하나님을 받아드릴 수 있었겠는가?
물론 성서 배경사를 공부하고 저작연대들을 배우면서 우리는 구약의 하나님 이해가 수천 년 전의 사회 상황과 문화적 전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다. 분명히 성서는 하나님의 영감이 담긴 책이고 계시가 전달된 거룩한 텍스트이지만, 거룩과 초월도 인간이 받아 인간의 언어로 기록될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유한성만큼 ‘제한’되기 마련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만을 위한 ‘민족신’이셨을 리 없으나, 민족신 개념이 문화적으로 팽배했던 고대 근동에서 히브리인들은 사회적 약자였던 자신들의 해방과 구원을 이루시는 여호와를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으로 제한하여 이해했다. 이방 민족들은 기껏해야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경고하는 채찍 정도로 해석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편적 사랑을 지니신 분인데, 어쩌랴! 결국에 가서는 요나처럼 전 인류와 우주만물을 향한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을 인정할 만큼 그들의 신앙도 자라났다.
임종수 그림
예수는 그 무렵 태어났다. 유일신 사상이 자리 잡고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에 대한 이해가 등장하던 1세기 팔레스타인 땅에서 살았다. 아니, 설사 다수의 유대인들이 여전히 배타적이었다 해도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이는 적어도 ‘이스라엘만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 따위의 편협한 이해는 가지면 안 되는 일이었다. 하여 김교신도 예수께서 이스라엘만을 챙기는 듯 보이는 언행을 기록한 복음서의 구절들을 접하고는 적잖이 고민스러웠던 것 같다.
논할 것도 없이 기독교는 전 세계를 구제하려는 세계적 대종교이다. 그런데 복음서를 읽는 자로서 누구나 없이 의아를 금치 못하는 것은 예수가 그 12제자를 파송하여 천국 복음을 전하게 하실 때의 전도훈에,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어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태목음 10:5-6)고 하셨을 뿐더러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청에 대하여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마가복음 7:27)고 친히 자기 자신의 태도를 표명하셨다.
공생애동안 ‘이스라엘만’을 우선순위에 둔 듯 보이는 예수의 사역에 고민스러웠던 김교신은 이런 저런 주석서들과 신학적 해석들을 살펴보았다. 먼저 알게 된 것은 ‘이스라엘 선민설’이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특수한 은총을 입은 선민”인 고로, 먼저 이 백성에게 복음을 전해 구원을 얻게 하고 단계적으로 구원의 영역을 확장해나가기 위함이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김교신은 “어디인가 불만이 있고 불복(不服)이 남았고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 무엇이 잔존함을 의식하지 아니치 못하였다”고 밝힌다.
둘째는 ‘애국설’이다. 유대인으로서 신앙 본질과 나라의 독립이 모두 위태로운 이스라엘의 상황에 안타까워하며 애국심에 불타 복음 사역을 조국 이스라엘에 우선적으로 국한시켰다는 해석이다. 이를 읽으며 김교신은 ‘성서해석에 있어 진부한 냄새가 없어진 것만으로도 대성공이라 여기며 쾌재를 불렀다’고 표현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의 마음은 “체증 만난 사람처럼 무엇인지 윗배에 뭉치우고 드티지[내려가지] 않은 것이 남아 있어” 괴로웠다. 그러다가 <성서조선> 동인이었던 함석헌의 풀이를 접하여 김교신은 자신의 영적체증이 완전히 날아갔다고 고백한다.
나중으로 ‘인간주의의 최고부’인 교회 정신 교권자들을 폭격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에게만 전도하시다가 나중에 ‘자기가 육탄이 되어서’ 십자가 위에 죽으신 것이라는 함석헌 군의 설명을 읽음에 미쳐서 비로소 다년간 적체했던 것까지 일시에 삭아 내려간 감을 느꼈다.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에게 국한하여 전도한 것은 인간주의의 최고 발달인 교회주의를 폭격하기 위함이요, 그 폭격용의 육탄이 곧 예수 자신이었다고.
함석헌도, 김교신도 ‘무교회 정신’에 고무된 신앙인이었던 바, 제도 종교의 타락한 물질주의와 교권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신 예수의 행적에서 구체적이고도 보편적인 사랑의 힘을 발견했던 것 같다. 이집트, 바빌로니아, 로마를 비롯하여 제국의 압제에서 자유를 빼앗기고 인간다움을 보장받지 못한 삶도 가엾고 억울한 일인데, 해방의 하나님을 고백하는 대안적 공동체였던 이스라엘이 어찌 처음의 ‘율법 정신’은 잊어버리고 종교 안에 또 하나의 인간주의를 만들어 백성들을 죄인 만드느냔 말이다.
“너희들이 지키는 것이 사람의 법이지 어디 하나님의 법이더냐?” “사람이 제 아비 집을 드나들면서 세금 내는 경우가 어디 있더냐?” “성전은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들이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구나!” 가난한 자들과 소유를 나누고 비천한 자들과 권위를 나누면서 하나님 나라의 평등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라는 율법 정신을 버리고, 종교지도자들의 물질적 풍요와 세속적 권위를 보장하는 온갖 ‘율법주의적 항목’들을 만들어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을 착취하는 이스라엘의 참혹한 상황이, 예수에게는 그가 맞서 싸워야하는 아주 구체적인 삶의 현장이었던 거다. 눈앞에 구체적으로 맞서야하는 사람들이 있고, 구체적으로 자유하게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당면한 싸움과 과제를 두고서 어찌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보편언어의 유희만을 즐기겠는가?
그러나 예수의 주장은 몸을 입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가진 인간의 유한성 안에서 그가 발을 딛고 삶으로 부딪히는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사랑하기 위함이었지, 율법 정신이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은 아니었다. 김교신을 당황하게 만들었다는 바로 그 일화에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는 예수의 도발적이고 모멸적이기까지 한 언급에도 수로보니게 여인은 굴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당당히 맞섰다.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아이들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는 법입니다”라는 반격으로 예수로부터의 긍정과 치유의 기적을 얻어내었다. 이 이야기가 ‘사람의 계명을 지키느라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다’는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예수의 비판 바로 뒤에 나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본다.
어쩌면 예수께서 진정 도전과 모멸감을 유발하고자 의도했던 대상은 율법정신을 율법주의로 만든 이들, 선민 운운하며 하나님의 사랑이 마치 배타적으로 자신들의 것인양 우쭐대던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을 ‘넘어’ 보편적으로 미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은 한 이방여인과 멋지게 듀엣으로, 거기 모인 유대인들의 편협하고 배타적인 신앙을 비웃고계셨는지도 모른다.
배타적 사랑은 ‘배제하는 것이 없는’ 보편적 사랑과 함께 갈 수 없지만, 구체적 사랑은 지금 내 앞에 대면하고 있는 ‘너’를 사랑함으로써 모든 생명을 빠뜨림 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에 참여하게 한다. 구체적인 실천성을 담아 보편적 사랑의 메시지를 전했던 정점의 사건 십자가, 이를 묵상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들의 사랑의 지표로 삼을진대, 이번 사순절의 날들은 구체적으로 사랑해야겠다. 내 앞의, 내 옆의 ‘너’를… 입으로만 말고, 영으로만도 말고….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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