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의 짭조름한 구약 이야기(8)

강간당했다고 몰살해?

- 디나 강간과 세겜 몰살 사건 -

 

야곱이 밧단아람을 떠나 가나안 땅의 세겜 성에 무사히 이르러서 그 성 앞에다가 장막을 쳤다. 야곱은 장막을 친 그 밭을 세겜의 아버지인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은 백 냥을 주고 샀다. 야곱은 거기에서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하였다. 레아와 야곱 사이에서 태어난 딸 디나가 그 지방 여자들을 보러 나갔다. 히위 사람 하몰에게는 세겜이라는 아들이 있는데 세겜은 그 지역의 통치자였다. 세겜이 디나를 보자 데리고 가서 욕을 보였다. 그는 야곱의 딸 디나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는 디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디나에게 사랑을 고백하였다. 세겜은 자기 아버지 하몰에게 말하였다. “이 처녀를 아내로 삼게 해주십시오.” 야곱이 자기의 딸 디나의 몸을 세겜이 더럽혔다는 말을 들을 때에 그의 아들들은 가축 떼와 함께 들에 있었다. 야곱은 아들들이 돌아올 때까지 이 일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세겜의 아버지 하몰이 청혼을 하려고 야곱을 만나러 왔다. 와서 보니 야곱의 아들들이 이미 디나에게 일어난 일을 듣고 들에서 돌아와 있었다…. 야곱의 아들들은 슬픔과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하몰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나의 아들 세겜이 댁의 따님에게 반했습니다. 댁의 따님과 나의 아들을 맺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사이에 서로 통혼할 것을 제의합니다. 따님들을 우리 쪽으로 시집보내어 주시고 우리의 딸들도 며느리로 데려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섞여서 여기에서 같이 살기를 바랍니다. 땅이 여러분 앞에 있습니다. 이 땅에서 자리를 잡고 여기에서 장사도 하고 여기에서 재산을 늘리십시오.” 세겜도 디나의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에게 간청하였다. “저를 너그러이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드리겠습니다. 신부를 데려오는 데 치러야 할 값을 정해 주시고 제가 가져 와야 할 예물의 값도 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많이 요구하셔도 요구하시는 만큼 제가 치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바라는 것은 디나를 저의 아내로 주시기를 바라는 것뿐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이 그들의 누이 디나를 욕보였으므로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짐짓 속임수를 썼다. 그들은 세겜과 하몰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할례를 받지 않은 남자에게 우리의 누이를 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부끄러운 일입니다.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당신들 쪽에서 남자들이 우리처럼 모두 할례를 받겠다고 하면 그 청혼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딸들을 당신들에게로 시집도 보내고 당신네 딸들을 우리가 며느리로 삼으며 당신들과 함께 여기에서 살고, 더불어 한 겨레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당신들 쪽에서 할례 받기를 거절하면 우리는 우리의 누이를 데리고 여기에서 떠나겠습니다.”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은 야곱의 아들들이 내놓은 제안을 좋게 여겼다. 그래서 그 젊은이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그들이 제안한 것을 실천으로 옮겼다. 그만큼 그는 야곱의 딸을 좋아하였다. 세겜은 자기 아버지의 집안에서 가장 존귀한 인물이었다.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이 성문께로 가서 그들의 성읍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들이 우리에게 우호적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우리 땅에서 살면서 우리와 함께 물건을 서로 사고팔게 합시다. 이 땅은 그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넓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딸들과 결혼할 수 있게 하고 그들은 우리의 딸들과 결혼할 수 있게 합시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기꺼이 우리와 한 겨레가 되어서 우리와 함께 사는 데는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들이 할례를 받는 것처럼 우리 쪽 남자들이 모두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의 양 떼와 재산과 집짐승이 모두 우리의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다만 그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대로 합시다. 우리가 그렇게 할례를 받으면 그들이 우리와 함께 살 것입니다.” 그 성읍의 모든 장정이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이 제안한 것을 좋게 여겼다. 그래서 그 장정들은 모두 할례를 받았다. 사흘 뒤에 장정 모두가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아서 아파하고 있을 때에 야곱의 아들들 곧 디나의 친 오라버니들인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들고 성읍으로 쳐들어가서 순식간에 남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그들은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도 칼로 쳐서 죽이고 세겜의 집에 있는 디나를 데려왔다. 야곱의 다른 아들들은 죽은 시체에 달려들어서 털고 그들의 누이가 욕을 본 그 성읍을 약탈하였다. 그들은 양과 소와 나귀와 성 안에 있는 것과 성 바깥들에 있는 것과 모든 재산을 빼앗고 어린 것들과 아낙네들을 사로잡고 집 안에 있는 물건을 다 약탈하였다. 일이 이쯤 되니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를 나무랐다. “너희는 나를 오히려 더 어렵게 만들었다. 이제 가나안 사람이나 브리스 사람이나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이 나를 사귀지도 못할 추한 인간이라고 여길 게 아니냐? 우리는 수가 적은데 그들이 합세해서 나를 치고 나를 죽이면 나와 나의 집안이 다 몰살당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다루듯이 하는 데도 그대로 두라는 말입니까?”(창세기 33:18-34:31)

 

 


<"Bugiardini Raub der Dina KHM" by Giuliano Bugiardini (c. 1475–1554)  Wikimedia Commons. >

1.

구약성서에 난처하고 곤혹스런 얘기가 많다는 얘긴 여러 번 했지만 이 얘기만큼 곤혹스런 것은 흔치 않다. 얘기는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이란 가나안 사람에게 강간당했다는 걸로 시작된다. 여기서 세겜은 한 개인의 이름이자 그가 사는 성읍의 이름이기도 하다. 요즘 흔한 강간범죄가 옛날이라고 없었을 리 없다. 그런데 강간범 세겜이 디나를 죽고 못 살게 사랑하면서 얘기가 의외의 방향으로 꼬인다. 그는 아버지 하몰과 함께 야곱을 찾아가 디나와 결혼하게 해달라고 통사정했다. 둘이 천생연분이라면 그럴 수 있겠지만 그런 일은 흔치 않다. 다윗의 아들 암논은 남이 아닌 이복누이 다말을 강간한 다음 곧바로 마음이 변해서 꼴 보기 싫다며 그녀를 쫓아내지 않았나(사무엘하 13장). 암논과 비교하면 세겜은 ‘의리’와 ‘사랑’을 갖춘 괜찮은 친구가 아닌가 말이다.

야곱이 세겜의 청혼을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동안 그의 아들들은 몰래 누이의 복수를 꾀했단다. 그들은 세겜의 청혼을 받아들이겠다며 조건 하나를 걸었다. 세겜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으면 디나를 그 집에 시집보내겠다는 거다. 세겜이 이 조건을 지체 없이 받아들인 걸 보면 디나를 진정 사랑했나 보다. 하몰과 세겜은 성읍 남자들을 설득해서 할례를 받게 했다. 그들이 할례를 받아 거동이 불편할 때 디나의 친 오라비 시므온과 레위가 그들 모두를 칼로 쳐 죽였다. 야곱은 이 소식을 듣고 여타 가나안 주민들로부터 보복 당할 게 두려워 두 아들을 나무랐지만 그들은 오히려 “그럼 누이를 창녀 취급하는데 가만히 두고 봐야 하냐?”고 화를 냈다.

이 얘긴 여러 가지 점에서 곤혹스럽다. 우선 ‘강간’이라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부터 그렇다. 이건 분명 나쁜 짓이고 범죄다. 하지만 자기가 저지른 악행을 결혼함으로써 합리적이고 우호적으로 해결하려던 세겜에 대해 야곱의 아들들이 ‘속임수’로 대응한 것도 잘했다고 할 수는 없다. 또한 하몰 집안사람뿐 아니라 세겜의 모든 남자들을 몰살했다는 게 어떻게 도덕적으로 용납되겠나. 그 속임수가 하느님과 맺은 언약을 상징하는 ‘할례’였다니 무슨 말을 더하겠나. 강간은 용납할 수 없는 범죄지만 그렇다고 강간범을 죽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강간범만이 아니라 세겜의 모든 남자들을 몰살했다니 이게 빵 한 조각 훔친 사람을 수년간 감옥에 집어넣는 것과 뭐가 다른가. 장발장도 이보다는 덜 억울하겠다 싶다.

곤혹스러운 게 하나 더 있는데 그건 이 얘기가 앞뒤의 얘기들과 별 관계가 없다는 점이다. 창세기 33장은 야곱이 오랜 타향살이를 끝내고 고향에 돌아와 형과 ‘감격적’으로 재회하는 얘기이고, 35장은 그가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베델로 올라가 거기서 살았다는 얘기다. 34장 얘기는 앞뒤 얘기들과 장소가 다를 뿐 아니라(33장은 숙곳, 35장은 베델인데 34장은 세겜이다) 내용도 무관하다. 이런 경우 학자들이 34장을 편집자의 삽입으로 치부한다는 얘기는 지난번 유다와 다말 얘기할 때 했다.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사실은 얘기가 처음에는 결혼하느냐 마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는데 나중에는 재산문제가 슬며시 끼어들어와 관심을 끈다는 점이다. 처음엔 하몰과 세겜은 야곱에게 세겜에 같이 살면서 땅도 차지하고 통혼도 하면서 재산을 늘리라고 권한다. 참으로 너그러운 처사가 아닌가. 그런데 이들은 동족 세겜 사람들에게 할례 받으라고 권하면서 그래야 그들(이스라엘)의 재산을 자기들이 차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너그러운 하몰과 세겜’이란 인상이 이 대목에서 순식간에 사라진다. 정작 나중에 재산은 세겜 사람들을 이스라엘의 차지가 되지만 말이다. 그들은 무슨 권한으로 그렇게 했을까? 텍스트는 하느님이 이런 행위를 인정하거나 허락했는지 여부는 밝히지 않는다. 이 행위가 법적, 도덕적으로 합당했는지 궁금해지는 이유다.

세겜은 베델과 실로의 북쪽,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가는 도상에 위치한 지역으로서 구약성서에선 창세기 12장 6-7절에 처음 등장한다. 거기서 야훼는 과거 아브람에게 했던 약속을 확인해준다(“아브람은 그 땅을 지나서 세겜 땅 곧 모레의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 때에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의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 아브람은 거기에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야훼께 제단을 쌓아서 바쳤다”). 세겜은 그밖에도 야곱(창세기 33, 34장), 요셉(여호수아 24:32)을 통해 이스라엘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야곱은 사건이 벌어지기 직전에 하몰에게 은 백 냥을 주고 밭을 샀다(33:19). 그는 거기서 살 작정이었던 거다. 세겜에서 벌어진 일들을 보면 디나 사건만 빼면 이스라엘 사람들과 세겜 사람들은 대체로 우호적 관계를 맺고 살았다.

그렇다면 디나 강간사건을 계기로 세겜의 모든 남자들이 살육당한 얘긴 대체 뭘 말하려는 걸까? 그게 왜 여기에 있는가? 강간하고 강간당하고, 죽고 죽이는 사건에 어떤 신앙적 교훈이 있을까? 이제부터 찬찬이 따져보자.

2.

다시 말하지만 세겜이 디나를 강간한 건 비난받아 마땅하다. 옛날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살인이 동서고금 문화권의 다름과 상관없이 벌 받아야 하는 범죄인 것처럼 강간도 가증스런 범죄다. 하지만 강간범 처벌방식은 시대와 지역과 문화권에 따라 다 다르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이스라엘에서는 강간죄를 그리 엄하게 처벌하지 않았다. 신명기 22장 28-29절은 강간범은 이렇게 처벌하라고 규정한다. “어떤 남자가 약혼하지 않은 처녀에게 욕을 보이다가 두 사람이 다 붙잡혔을 때에는 그 남자는 그 처녀의 아버지에게 은 오십 세겔을 지불해야 한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욕을 보인 대가로 그 여자는 그의 아내가 되고 그는 평생 동안 그 여자와 이혼할 수 없다.” 이건 내가 아는 한 강간범에 대한 가장 관대한 처벌이다. 신명기는 마치 딸이 아버지 재산이나 된다는 듯 강간범이 여자의 아버지에게 돈을 주고 그녀를 아내 삼으면 된다고 한다. 21세기 여자가 이걸 읽으면 분노하지 않을까?

세겜이 디나를 강간한 후에 한 행동을 보면 혹시 그들이 신명기를 알지 않았나 싶다. 하몰과 세겜은 신명기 규정을 뛰어넘어 아무리 많은 지참금을 요구해도 다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두 텍스트가 사용한 ‘붙잡다’ ‘눕다’ ‘욕보이다’ 등의 동사도 같다. 그들은 야곱 집안과 사돈이 되면 자기들 땅에 살면서 장사도 하고 소유도 늘리라고 제안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신명기 규정보다 더 많은 걸 약속한 셈인데 왜 야곱의 아들들은 그걸 거부했을까? 그들은 세겜 남자들을 다 죽이는 복수를 할 만큼 디나를 사랑했나? 그들 속마음을 읽을 길 없으니 그걸 알 도리는 없다. 텍스트는 강간에 대해 말한 다음 지나가는 말처럼 그 행위의 성격을 “이스라엘 사람에게 부끄러운 일, 곧 해서는 안 될 일”로 규정한다. 짧지만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이다.

문제는 이 강간을 어떻게 성격 규정하는가에 있다. 디나 오라비들은 누이가 당한 일을 단순히 몸을 더럽힌 사건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에게 이 일은 개인적 수치에 그치지 않고 민족적 수치, 또는 종교적 수치였다. 여기선 강간을 ‘타메’라는 말로 표현하는데(5, 13, 17절) 이 말엔 그냥 더럽다는 뜻 이외에 종교적 의미도 들어있다. 단순히 몸만 더럽힌 게 아니란 거다. 우리말 성서가 ‘부끄러운 일’로 번역한 7절의 ‘느발라’ 역시 여기선 성적(性的)으로 부끄러운 일 또는 종교적 더럽혀짐과 거기서 비롯된 수치를 가리킨다.

만일 디나가 이스라엘 사람에게 강간당했다면 이런 말로 표현하진 않았을 거다. 세겜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이방인이었다는 게 문제였던 거다. 디나가 이스라엘 사람에게 강간당했다면 은 오십 세겔을 주고 아내 삼으면 됐다. 그런데 세겜은 이방인이라서 그의 범죄에 종교적 의미가 덧붙여졌고 오라비들이 분노했던 거다. 많은 고대 해석자들이 그렇게 해석했다. <유딧 Judith>은 “… 내 조상 시므온의 야훼 하느님, 야훼께서는 시므온에게 칼을 쥐어 주셔서 이방인을 처벌하게 하셨다.”(9:2)고 적었고, <희년서 Jubilee>도 “너 모세는 이스라엘의 자녀들에게 명하여 그들의 딸을 이방인들에게 주지 말고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지 못하도록 금하라…. 그래서 나는 세겜 사람들이 디나에게 행한 모든 것을 너를 위해 율법 속에 기록하였다….”(30:11-14)라고 전한다. 그렇다면 왜 창세기 38장에서 이스라엘 남자 유다가 이방인 여자 수아와 결혼한 데 대해선 부정적인 말 한 마디 안 하는데, 이방인 남자 세겜이 이스라엘 여자 디나와 결혼하려니까 오라비들이 왜 이렇게 길길이 날뛰는 걸까? 이것 말고도 이스라엘에 이방여인과 결혼하거나 그녀를 첩으로 맞아들인 경우가 많았는데 왜 이 경우에만 유독 대량살육을 벌였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신명기 7장 3-4절에는 이방인과 통혼이 엄격이 금지되어 있지만(“그들[이방인들]과 혼인관계를 맺어서도 안 됩니다. 당신들 딸을 그들의 아들과 결혼시키지 말고 당신들 아들을 그들의 딸과 결혼시키지도 마십시오. 그렇게 했다가는 그들의 꾐에 빠져서 당신들의 아들이 야훼를 떠나 그들의 신들을 섬기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야훼께서 진노하셔서 곧바로 당신들을 멸하실 것입니다.”) 실제로 이방인과의 통혼은 드물지 않게 이뤄졌다. 그런데 왜 세겜과 디나 경우만 이리 심각한가 말이다. 수십 년 전 미국에서 흑인들이 심하게 차별받았을 때도 백인과 흑인은 통혼했다. 그 중 백인남자와 흑인여자의 결혼은 상대적으로 용납됐던 데 반해서 흑인남자와 백인여자의 결혼은 용납되지 않았다는데 그게 이것과 비슷했을까?

그 다음으로 문제 되는 대목은 디나의 오라비들이 세겜 사람들을 ‘속였다’는 점이다. 목적이 아무리 옳아도 그걸 이루는 방법이 정당하지 않으면 비난을 면키 어렵다. 하물며 세겜 남자들 살육이라는 목적의 정당성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는 이 경우는 더 말할 게 없다. 디나 오라비들은 누이를 하몰 집안에 시집보낼 것처럼 거짓말했다. 은 오십 세겔 받고 디나를 시집보내지 않은 건 그가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라고 하자. 그러나 그게 그들을 속여서 살육할 명분이 될 수는 없다. 안 그런가? 게다가 그들은 ‘할례’를 속임수의 방편으로 썼다. 할례가 뭔가? 야훼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언약의 표가 아닌가. 그걸 이방인 살육의 방편으로 삼았으니 과연 그들은 이걸 정당하다고 여겼을까?

많은 학자들이 할례라는 종교의식이 이스라엘에 자리 잡은 때는 훨씬 후대로 본다. 바빌론 포로기 이후로 보는 의견이 강세다. 하지만 그것은 학자들이 ‘재구성한’ 이스라엘 역사 얘기일 뿐, 구약성서에선 얘기가 다르다. 할례제도는 창세기 17장에서 제정됐으니 대량학살이 벌어졌을 땐 이미 종교의식으로서 행해지고 있었다. 성서를 읽을 때 얘기가 전개되는 순서로 읽지, 학자들이 재구성한 역사를 따라서 읽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그러니 성서 독자들이 이 얘기를 읽을 땐 ‘이 자들은 무슨 맘을 먹고 하느님이 직접 제정한 할례 제도를 이 따위 일에 악용했을까….’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겠나.

고대 해석자들은 이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느님이 세겜 남자들 도륙을 명령했다고 해석했다. 그러니까 이들은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서 그렇게 행했다는 거다. 앞에서 인용한 <레위의 유언>은 “나는 세겜에 대한 하느님의 판결이 유죄였음을 봤다. 그래서 나(레위)는 아버지(야곱)에게 이렇게 말했다. ‘야훼여, 노하지 마옵소서. 야훼께서 아버지를 통해서 가나안 사람들을 멸망시키실 것이고 그들의 땅을 당신과 당신 후손들에게 주실 것입니다.”(6:8-7:1)라고 전한다. 세겜 사람들은 하느님에게 유죄 판결을 받았고 자기들은 단순히 그걸 집행했을 뿐이란 거다. <희년서>도 비슷한 취지에서 “세겜의 모든 남자들이 이스라엘에게 수치스러운 일을 범했기 때문에 그들을 칼로 멸절시키라는 판결이 하늘로부터 그들에게 내려졌다.”(30:5)고 적고 있다. 참으로 쉬운 논리 아닌가. 이치를 따질 것도 없고 논리를 논할 것도 없다. 그냥 하느님 명령이라고만 하면 모든 게 용서되니 말이다.

고대 해석자들이라고 무턱대고 하느님의 명령을 여기 끌어댈 수는 없었을 거다. 그들이 그렇게 막 나가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세겜 남자들 도륙이 하느님 명령임을 강변하기 위해선 미미하더라도 텍스트 상의 근거가 있어야 했다. 그들은 레위와 시므온 겨우 두 명이 그 많은 세겜 남자들을 도륙했다는 데서 그 근거를 찾아냈다. 얼마나 다행인가! 세겜 남자들 숫자가 얼만지 몰라도 겨우 두 명이 능히 도륙할 만한 숫자는 아니었을 거다. 아무리 할례 받아 움직이기 불편했다 해도 말이다. 하느님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시므온과 레위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말이다. 그래서 <유딧>은 “오 나의 조상 시므온의 주 하느님, 당신은 그의 손에 칼을 쥐어주어 처녀 디나를 겁탈한 이방인들에게 복수하게 하셨습니다.”(9:2)라고 적었고 <요셉과 아세넷 Joseph and Aseneth>도 “시므온과 레위는 칼집에서 칼을 빼고 이렇게 말했다. ‘보라, 이 칼들을 본 적이 있는가? 이 칼로 주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모욕한 세겜 사람들을 심판했는데 이는 하물의 아들 세겜이 우리의 누이 디나를 더럽혔기 때문이다.”(23:14)라고 적는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도륙을 허락/명령했을 뿐 아니라 손수 칼까지 그들 손에 쥐어줬던 거다. 그들이 수많은 세겜 남자들을 순식간에 도륙할 수 있었던 건 하느님이 준 칼을 썼기 때문이란다. 여러분 생각엔 이 말이 그럴듯한가? 난 아닌데….

 

 


<"Figures Simeon Levi Slay Sichemites" by illustrators of the 1728 Figures de la Bible Wikimedia Commons.>

 

대체 왜 세겜 남자들이 모두 죽어야 했을까? 세겜은 강간범이니 그렇다 치자. 하지만 나머지 세겜 남자들은 왜 죽어야 했을까? 그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한 시민이 잘못했다고 도시의 모든 사람을 죽였다면 그건 집단학살(genocide)이다. 구약성서에 집단학살 얘기가 많이 나오긴 하지만 동조자도 아닌 사람들을 다 죽이는 건 누가 봐도 지나치지 않나.

고대 해석자들에게도 이건 곤란한 문제였다. 하지만 그들이 누군가, 없는 이유도 만들어내는 사람들 아니던가. 그들은 세겜 남자들이 모두 벌 받은 걸 보면 그들이 세겜이 저지른 범죄에 동조했을 거라고 추측했다. 이는 욥의 친구들의 그것과 기본적으로 같은 논리다. 욥이 고통 겪는 걸 보면 필경 그럴만한 죄를 저질렀을 거란 논리 말이다. 그들이 근거 없이 그런 추측을 했겠는가. 우리말 새번역 창세기 34장 27절을 보면 “…야곱의 다른 아들들은 죽은 시체에 달려들어서 털고 그들의 누이가 욕을 본 그 성읍을 약탈하였다.”라고 해서 강간 행위의 주어가 분명치 않은데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면 “야곱의 아들들은 살해된 자들에게 가서 그 도시를 노략했는데 이는 그들이 자기들 누이를 더럽혔기 때문이다.”가 된다. 디나를 더럽힌 자들이 복수인 ‘그들’이었다는 거다. 여기서 ‘그들’이 누굴까? 세겜 남자들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유딧>과 <희년서>는 ‘그들’이 세겜 남자들이고 따라서 그들도 하느님의 징벌을 받아야 했다고 전했다. 특히 <희년서>는 대놓고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세겜 사람들이 그들의 누이를 더럽혔기 때문에 그들에게 분노했다.”(30:3)고 적는다. 그래도 이 정도는 봐줄 만하다. 아람어 성서 <타르굼 네오피티>는 세겜 남자들을 ‘우상숭배자’로 규정했고 <레위의 유언>은 밑도 끝도 없이 세겜 사람들이 나그네를 환대하지 않아서 벌을 받았다고 적는다. 이에 따르면 세겜 사람들은 파라오와 아비멜렉이 사라와 리브가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짓을 디나에게 하려 했지만 하느님이 막았단다.

뭘 근거로 이런 얘기를 늘어놓은 걸까? 하몰과 세겜이 성읍 사람들을 설득하면서 한 “그렇게 하면(할례를 받고 야곱 집안과 같이 살게 되면) 그들의 양 떼와 재산과 집짐승이 모두 우리의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23절)가 그 근거였다고 추측된다. 고대 해석자들은 텍스트가 모호하게 남겨둔 빈 공간을 세겜 남자들을 ‘나쁜 놈’으로 만드는 걸로 메운 셈이다. 과연 이게 옳은 해석일까?

3.

이젠 이 얘기가 뭘 말하려는지 따져볼 순서다. 이 얘기도 유다와 다말 얘기(창세기 38장)처럼 뭘 말하려는지, 무슨 교훈을 전하려는지 당최 알 수가 없다.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딱히 전하려는 교훈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이 사건의 결과로 뭔가 이뤄졌다는 말도 없다. 창세기 35장은 이런 사건이 없었다는 듯 야곱이 하느님의 명을 받아 베델로 올라가 제단을 쌓았다고 말한다. 텍스트는 디나가 아기를 낳았는지 안 낳았는지도 밝히지 않는다. 이후로 디나가 다시는 등장하지 않아서 우린 그녀가 어떻게 살다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다. 대체 이 얘기가 왜 여기 있는 걸까?

이 얘기가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가나안 사람들의 공존(coexistence)과 동화(accommodation)의 문제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그러니까 얘기의 핵심은 강간에 대한 보복이 아니라 가나안 사람들과의 통혼 금지라는 말이다. 일리 있는 주장이다. 통혼은 결국 이스라엘과 가나안이 공존하고 동화하는 한 방법이다.

강간사건 후 하몰과 세겜이 청혼했을 때 야곱이 취한 태도에는 애매한 구석이 있다. 청혼을 받겠다는 건지 받지 않겠다는 건지 아리송하다.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남자들을 몰살한 후에도 야곱은 그 때문에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보복 당할까봐 두려워했다. 그는 시종일관 모호한 태도를 보인다. 반면 아들들의 태도는 분명하고 단호했다. 적대적이고 호전적이더니 결국 시므온과 레위가 직접 칼 들고 나가서 그들을 도륙했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보인 상반된 태도는 가나안에 정착한(또는 정착하려는) 이스라엘의 딜레마를 상징한다. 그들은 가나안 사람들에게서 고립되고 적대하느냐, 그들 사이에 섞이고 공존하고 동화하느냐의 갈림길에 서있었던 거다. 이 고민은 디나가 강간당한 걸 종교적 의미가 담긴 ‘타메’와 ‘느발라’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점과 ‘할례’라는 종교의식을 도륙 수단으로 삼았다는 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사람들과 동화되는 두 가지 길은 서로 통혼하는 것과 하나의 경제단위를 이루는 것이다. 이는 하몰이 야곱에게 했던 제안, “우리 사이에 서로 통혼할 것을 제의합니다. 따님들을 우리 쪽으로 시집보내어 주시고 우리의 딸들도 며느리로 데려가시기 바랍니다.”(9절)라는 말과 “우리와 함께 섞여서 여기에서 같이 살기를 바랍니다. 땅이 여러분 앞에 있습니다. 이 땅에서 자리를 잡고 여기에서 장사도 하고 여기에서 재산을 늘리십시오.”(10절)라는 말에 잘 표현돼 있다. 야곱이 보인 애매하고 우유부단한 태도는 동화될 걸 심각하게 고민한 흔적이고, 아들들의 단호한 태도는 섬처럼 고립되어 살겠다는 입장의 표현이다. 특히 시므온과 레위의 살육행위는 가나안 사람들을 몰아내고 땅을 독차지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의 표현이다. 그들이 세겜 사람들에게 할례를 요구한 건 자기들에게 동화되라는 주장으로 이해된다.

고립이냐 동화냐 하는 데는 종교적 동기와 경제적 동기가 작용한다. 그들은 디나가 당한 일이 은 오십 세겔과 결혼으로 해결되리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해결될 수 없었던 것은 그게 이스라엘 안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이방인과의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민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였다는 거다. 그래서 야곱의 아들들이 통혼의 전제조건으로 할례를 내건 건 속임수가 아니라 그들을 자기 방식으로 동화하려는 시도였을 수도 있다.

한편 경제적 동기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하몰이 청혼할 때 섞여 살면서 장사도 하고 재산도 늘리라고 한 제안뿐 아니라, 세겜 사람들을 도륙한 후 성읍을 약탈한 데서도 드러난다(“야곱의 다른 아들들은 죽은 시체에 달려들어서 털고 그들의 누이가 욕을 본 그 성읍을 약탈하였다. 그들은 양과 소와 나귀와 성 안에 있는 것과 성 바깥들에 있는 것과 모든 재산을 빼앗고 어린 것들과 아낙네들을 사로잡고 집 안에 있는 물건을 다 약탈하였다”(27-29절). 이걸 보면 두 집안이 궁극적으로 원했던 건 경제적 이득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이 얘기를 읽으면서 미국을 비롯한 국제적 지원을 받아가면서 팔레스타인 땅을 독차지하려는 현재 이스라엘의 막가파식 만행이 오버랩 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거다. 안 그런가?

4.

이 얘기를 읽고 나면 ‘과연 이래도 되나? 누이가 강간당했다고 성읍 남자들을 몰살하는 게 정당한가? 그렇게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게 옳은가?’라는 의문이 안 들 수 없다. 보복이 됐든 종교적 열정이 됐든 경제적 이득이 됐든 대량학살을 해가면서 목적을 이루는 게 과연 정당할까? 그걸 야훼 하느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걸 우린 신앙의 이름으로 용인해야 하나? 야곱의 아들들은 끝내 집착을 버리지 않았다. 보복이 두려운 야곱에게 아들들이 퉁명스럽게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다루듯이 하는 데도 그대로 두라는 말입니까?”(31절)라고 대꾸하는 걸로 얘기는 끝난다. 여기서 “그들이 자살테러로 우리 동족을 죽이는데 그걸 그대로 두란 말이냐?”면서 대규모 공습을 감행하는 현재 이스라엘의 목소리가 겹쳐진다. 과거 그들이나 현재 그들이나 할 것 없이 경제적 이득에 눈이 멀어 자기들이 세계평화에 어떤 위기를 초래하는지, 공존과 협력의 가능성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못 보고 있다. 훗날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를 두고 한 “시므온과 레위는 단짝 형제다. 그들이 휘두르는 칼은 난폭한 무기다. 나는 그들의 비밀 회담에 들어가지 않으며 그들의 회의에 끼어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화가 난다고 사람을 죽이고 장난삼아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고 그 분노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들을 야곱 자손 사이에 분산시키고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흩어 버릴 것이다.”(창세기 49:5-6)라는 예언조차 자기들이 한 짓에 대한 추상같은 질책이 아니라 엄청난 상처를 내놓고 일회용 반창고 붙여주는 정도로밖엔 들리지 않는다.

이 얘길 세겜 사람 입장에서 읽으면 어떻게 될까? 바룩 할페른(Baruch Halpern)은 다윗 왕에 관한 책 <David's Secret Demons: Messiah, Murderer, Traitor, King>에서 다윗 왕의 일대기를 그의 입장(또는 그의 입장이 반영된 사무엘서의 입장)이 아니라 그의 적대자의 입장에서 서술한다. 이와 비슷하게 디나와 세겜 얘기를 야곱 집안사람들 관점이 아니라 세겜 집안사람들 관점에서 보면 어떨지 궁금하다.

역사서로서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입장에서 쓰인 책이다. 거기엔 이집트나 가나안이나 아시리아나 바빌론, 페르시아의 입장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후대로 가면 선민으로서 이스라엘의 입장과 지위가 약화되긴 하지만 여전히 역사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걸로 되어 있다.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한 사람은 누구나 아는 얘기다.

우리도 그 관점으로 구약성서를 읽어야 할까? 그들이 저지른 온갖 좋고 나쁜 짓을 그들이 평가한 대로 평가해야 하나? 야곱의 아들들이 행한 잔인한 살육과 약탈을 단지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행했다는 이유만으로 정당하다고 봐야 할까? 또는 판단을 유보하는 게 옳을까? 나는 과거에 이 처참한 얘기에 하느님이 등장하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긴 적이 있었다. 그게 옳은 태도일까? 그걸로 만족하는 게 성서를 바르게 읽는 걸까? 하느님 이름으로 자행된 살육과 약탈을 하느님 구원역사의 일환으로 보는 걸 어떻게 봐야 할까?

과거에 알라의 이름으로 자행됐고 현재도 자행되고 있는 폭력이 정당하지 않은 것처럼 야훼의 이름으로 과거에 자행됐고 지금도 자행되고 있는 살육과 약탈 역시 정당하지 않다. 이 판단은, 현재 내가 믿는 하느님은 이스라엘과 이방인 사이에 넘지 못할 장벽을 쌓아놓고 그들더러 동화되지 말라고 명령하는 하느님, 곧 이스라엘이 과거에 믿었던 하느님이 아니란 사실에 근거한다. 특정 종족 안에 갇혀 있는 신, 자기를 믿는 종족만 위해주고 그들을 적대하는 자들은 대적하는 신, 자기 말 잘 들으면 달라는 걸 모두 내주는 신, 나는 이런 신을 믿지 않는다. 자기를 믿는 자들의 실수와 죄는 적당히 견딜만한 징벌을 내려서 퉁치고 자기를 믿지 않는 자들의 실수와 범죄는 돌이킬 수 없이 멸절시키는 걸로 다스리는 신을 나는 믿지 않는다.

나는 텍스트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안다. 거룩한 책인 성서가 옳다고 하는 얘기는 뭐가 됐든 옳다고 판단하라고 텍스트는 때론 노골적으로, 때론 은밀하게 독자를 강요한다. 성서를 경전으로 받아들이고 읽는 독자는 이 강요에서 자유롭지 않다. 성서는 야훼가 한 일은 무조건 옳다는 입장에서 쓰였다. 안 그런가? 하지만 성서가 ‘야훼가 한 일’이라고 전하는 게 정말 야훼가 한 일일까? 혹시 이스라엘이 야훼가 한 일이라고 믿었던 일이 아닐까? 야훼가 한 일이라는 판단은 야훼 자신이 내린 게 아니라 이스라엘이 내린 게 아닐까? 그래서 자기들에게 유리한 건 죄다 야훼가 했다고 ‘강변’한 게 아닐까? ‘죄다’란 부사어는 과장일 수 있겠지만 자기들이 저지른 잘못을 야훼가 한 일, 또는 야훼가 허락해서 한 일이라고 주장한 경우도 있을 거다. 그렇다면 진짜로 야훼가 한 일과 야훼가 했다고 이스라엘이 주장한 일을 구별하는 게 문제가 아닐까? 나는 이게 구약성서 신학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라고 본다.

야훼 입장에서나 이스라엘 입장에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이 얘길 그들은 왜 후대에 전했을까? 무슨 목적으로, 왜 이 얘길 기록해서 전했을까 말이다. 여러 대답이 가능하겠다. 이 얘기가 가나안 사람들과의 통혼을 금지하는 계명의 본보기 역할을 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래서 이 얘기의 기원을 이방인과의 결혼이 불가피했던 바빌론 포로시기에서 찾는다. 다른 학자들은 시므온과 레위 지파는 창세기 49장이 묘사한 대로 여타 지파에 비해 안 좋은 조건 속에서 살았는데 이 얘기가 그 이유를 설명하는 역할을 했다고 본다. 이 주장의 문제점은 레위 지파가 사제의 지위를 누리는 걸 설명하지 못한다는 거다.

일부 학자들은 이 얘기가 특별한 메시지를 전할 목적으로 전승된 게 아니라고 본다. 특별한 뜻이나 목적 없이 밑바닥 히브리인들이 일상에서 겪은 얘기를 전한 것이란 얘기다. 가장 ‘비성서적’이고 ‘비신학적’인 주장이지만 한번쯤 귀 기울일 가치가 있다.

대부분의 역사는 권력 가진 자들이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워서 자기들이 사건을 이끌어가는 걸로 서술된다. 이름 없는 민초들은 그들 행위의 대상일 뿐이고 그들이 이끌어 가는 역사에서 수동적 역할을 하는 데 머문다. 구약성서 역시 여기서 예외는 아니지만 거긴 드물지만 민초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얘기가 있다. 대개는 히브리 민초들이 객체에 머물고 수동적인 역할을 하지만 간혹 그들이 주역으로 등장하는 얘기들이 있다는 얘기다. 디나 강간 및 세겜 학살 사건이나 지난 글에서 다룬 유다와 다말 얘기가 그 예가 된다.

이런 얘기의 특징은 겉으로 드러난 특별한 교훈이 거기엔 없다는 점이다. 특정한 도덕이나 윤리를 지키라고 하지도 않고 전통적인 관습을 따르라 하지도 않는다. 여기선 종교적, 도덕적인 교훈을 찾기 어렵다. 그런 게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드는 생각이 이거다. 이 얘기들이 하고 싶은 말은, 역사는 권력을 잡은 사람들과 그들을 후원하는 신들에 의해서만 굴러가는 게 아니라 “갖은 욕망과 탐욕이 이글거리며 분출하고 분출하면서 속이고 빼앗고 상처 입히고 죽이는, 그러기에 신음하고 탄식하며 기다리고 갈망하며 하늘을 보는 민중들과 그러한 민중들의 삶 속에서 꿈틀거리는 신이 역사를 굴리는 세력”(이정희, 《살림의 상상력》, 51-52)임을 말하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이 얘길 전한 사람들이 다양하기에 각각의 전승자가 다른 생각으로 얘길 전했을 수 있겠다. 이 얘길 여러 시각으로 읽을 수 있는 이유가 이거다. 통혼과 동화 금지가 중심 메시지일 수도 있고, 시므온과 레위 지파의 형편을 설명하는 게 하고 싶은 말일 수도 있으며, 메시지가 첨부터 없는 게 메시지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육당한 세겜 사람들을 제외하면 여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강간당한 디나가 아닐까 싶다. 그녀는 사건 전체를 통해서 철저하게 침묵당하는 객체요 대상이니 말이다. 그녀는 한 순간도 주체였던 적이 없다. 그녀는 강간당했고 세겜 집으로 끌려갔으며 오라비들이 그들을 살육했을 때 다시금 집으로 되돌려졌다. 모두 수동적이다. 그는 행위의 주체였던 적이 없다. 그녀가 이 사건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 아쉽게도 구약성서엔 다시는 그녀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녀는 밑바닥 히브리인들 중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던 사람, 그것도 이방인에게 강간당한 여자였던 거다. 사람은 자기의 억울한 사정은 알아주길 바라면서도 자기보다 더 처절한 처지에 있는 사람의 억울한 사정은 눈에 안 들어오는 걸까? 정말 그런가?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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