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의 짭조름한 구약 이야기(7)
다말, 몸으로 울었다!
- 유다와 다말의 막장 드라마 -
1.
마태가 전하는 예수의 족보에는 기이한 인물이 몇 명 포함되어 있는데 다말, 라합, 밧세바의 세 여인이 그들이다. 다말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 하나인 유다의 며느리이고, 라합은 이스라엘 정탐꾼을 도왔던 여리고의 창녀이며, 밧세바는 다윗 수하의 장수 우리야의 아내였다가 다윗의 아내가 된 여인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문제 있고 구설수에 올라 있어 할 수만 있으면 족보에서 지우고 싶은 사람들이다. 철저하게 남성 위주였던 유대의 족보에 이들 여인의 이름이 올라와 있는 것부터 범상치 않다. 게다가 하나같이 구설수에 오를만한 여인들이라니! 족보란 가문을 자랑하려고 기록하고 후대에 남기는 것일진대 이쯤 되면 족보의 존재 이유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그나마 라합과 밧세바는 일정한 공로가 있다. 라합이 없었다면 어떻게 여리고 정탐에 성공했을 것이며 밧세바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솔로몬이 왕위에 올랐겠는가. 하지만 다말은 다르다. 그녀에게 무슨 공로가 있단 말인가. 다말은 남편이 요절하는 바람에 당시 관습을 따라 시동생에게서 자식을 얻으려 했지만 그마저 실패하자 소박 맞아 친정에서 눈칫밥 먹다가 시아버지의 자식을 낳은 여인이다. 이게 어디 자랑할 일인가. 이런 그녀가 예수의 족보에서 보란 듯이 올라 있으니 이게 어디 보통 일인가 말이다. 이 문제는 오랫동안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해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아무리 예수가 하느님, 또는 하느님의 아들, 메시야, 구세주, 주님이고 요셉과는 혈연적으로 무관하다지만 그래도 요셉 가문 족보에 이런 흠 있는 인물이 들어 있는 것 거시지하지 않느냐 말이다.
왜 이런 사람을 예수의 족보에 포함했을까를 심각하게 생각해봤다. 왜 그랬을까? 마태복음 기자도 수치스러웠지만 사실을 왜곡할 수 없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넣었을까? 아니면 그는 이 점이 전혀 부끄럽지 않았나? 마태복음 기자가 전해 받은 전승들을 다룬 방식을 보면 ‘울며 겨자 먹기’ 식은 아니겠다 싶다. 물려받은 자료를 다루는 데 있어서 상당히 폭넓은 재량권을 발휘한 흔적이 있으니 말이다. 이게 이 글에서 다루려는 점은 아니니까 더 얘기하진 않겠다. 그렇다면 이 점이 부끄럽지 않았다는 얘긴데, 그가 어떤 ‘철학’을 갖고 있었기에 그랬을까? 이 점이 매우 궁금하다. 그러려면 우선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이 등장하는 창세기 38장을 꼼꼼히 읽어봐야겠다.
2.
얘기는 ‘그 무렵에’란 말로 시작된다. 구약성서에서 이 말은 앞에 나오는 얘기와 연관되긴 하지만 그 관련성을 특정하지 않을 때 사용된다. 그 연관이 뭔지 밝히는 게 이 얘길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유다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형제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아둘람 사람 히라가 사는 곳으로 가서 거기서 수아라는 이름의 가나안 여인과 결혼했다고 한다. 그 사이에서 에르, 오난, 셀라라는 세 아들이 태어났고 맏아들 에르에게 다말은 아내로 맞게 했다는 거다.
그런데 큰아들이자 다말의 남편인 에르가 갑자기 죽었다. 설화자는 그가 “야훼께서 보시기에 악했기 때문”에 죽었다고 말하는데 왜, 어떤 점에서 그랬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자 유다는 둘째 아들 오난을 과부가 된 맏며느리에게 들여보낸다. 그러니까 형수와 시동생이 동침했단 얘기다. 현대인에겐 기이하기 짝이 없는 조치지만 이유가 없었을 리 없다. 그런데 오난은 형수와 동침할 때마다 질외사정을 했는데 이게 야훼의 눈에 곱게 보이지 않아서 그 역시 죽어버렸단다. 졸지에 아들을 둘씩이나 잃은 유다는 셋째까지 잃을까봐 다말을 친정으로 쫓아버린다. 다말에게는 셋째 셀라가 장성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했지만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셋째마저 죽을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란 거다. 설화자는 여기서 깨알같이 유다의 속마음을 드러내 보여준다. 독자는 유다가 겉과 속이 다른 사람임을 알게 된다. 그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세월이 흘러 유다의 아내 수아가 죽었다. 아내를 위해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자 유다는 아둘람 사람 히라와 더불어 양털을 깎으러 딤나로 올라갔단다. 다말이 이 소식을 들었다! 그러자 다말은 과부 옷을 벗어버리고 베일로 얼굴과 몸을 감싼 다음 딤나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앉았다고 했다. 우린 이 행색에 뭘 의미하는지 모르지만 유다는 그녀를 보고 단박에 창녀로 여긴 모양이다. 그는 자기 며느리인 줄도 모르고 그녀를 돈으로 사려고 했단다. 그녀가 자기를 성매수하는 대가로 뭘 줄 거냐고 묻자 유다는 나중에 염소 한 마리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 말을 못 믿겠다는 듯이 담보물을 달라고 한다. 그녀는 이미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거다. 그녀는 도장과 허리끈과 지팡이를 달라고 해서 그걸 담보로 잡는다. 유다는 무슨 생각으로 그것들을 담보로 줬을까? 자기가 누군지 단박에 드러내는 물건들인데 말이다. 그걸 줘 가면서까지 여자의 몸을 갖고 싶었을까? 아내를 위해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자마자 말이다.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은 끝에 다말은 임신한다. 설화자는 다말이 유다와 동침한 후 그 자리를 떠나 베일을 벗고 과부 옷을 갈아입기도 전에 임신 사실을 확인한 것처럼 적는다. 이치에는 닿지 않지만 그걸 트집 잡을 여유는 없다. 유다가 나중에 담보물을 찾겠다고 친구를 보냈지만 거기엔 그런 창녀는 있지도 않다는 말만 듣는다. 그는 담보물 찾기를 포기하고 하룻밤의 탈선을 잊어버린다.
석 달은 임신 사실이 알려질 만한 기간이다. 석 달이 지나자 다말의 임신 소문이 유다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는 노발대발해서 그녀를 불태워 죽이라고 명했다. 아마 그땐 시아버지가 탈선한 며느리를 태워죽일 권한도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자 다말은 담보로 잡은 물건들을 시아버지에게 보내서 아이 아버지는 그것들의 주인이라고 말한다. 이에 유다는 바로 자기가 한 짓을 인정하고 “그 아이가 나보다 옳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해산할 달이 이르러 다말이 쌍둥이를 낳았다는 말로 얘기는 마무리 지어진다.
3.
이 얘기에는 설명이 필요한 대목이 몇 군데 있다. 우선 유다가 가나안 여인 수아와 결혼했다는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는 게 납득되지 않는다. 이스라엘 사람은 이방인과 결혼하는 게 엄격히 금지됐으니 말이다. 따라서 유다가 가나안 여인과 결혼했다는 건 보통 ‘사건’이 아니다. 감출 수 있으면 감춰야 할 얘기다. 창세기 34장에 나오는 디나 얘기만 봐도 그렇다(이에 대해선 나중에 쓸 계획이다. 순서가 바뀌었지만 말이다). 히위 족속 하몰의 아들 세겜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반해서 그녀를 겁탈한 후 그녀와 결혼하게 해달라고 야곱에게 통사정했단다. 하지만 디나의 형제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세겜 사람들(여기서 세겜은 개인의 이름이자 도시의 이름이다)이 모두 할례를 받으면 디나를 세겜에게 시집보내겠다고 거짓말한다. 디나와 얼마나 결혼하고 싶었는지 세겜이 이에 동의하여 세겜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고 괴로워하는 동안 디나의 오라비 시므온과 레위가 그들을 몰살했다.
학자들은 이 끔찍하고 잔인한 살륙의 배후에 이방인과의 통혼을 절대 금하는 금령이 자리 잡고 있다고 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살륙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사정이 이럴진대 38장에선 유다가 가나안 여인과 결혼한 걸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하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물론 이방인과의 통혼 금지는 후대의 산물로서 그것을 유다가 살던 시대에 적용하는 건 시대착오다. 더욱이 실제론 이스라엘 사람과 가나안 사람 사이의 경계가 우리 생각처럼 그렇게 뚜렷했던 건 아니라지 않나. 하지만 최종 편집자가 통혼 금지령을 여기에다 적용하는 게 시대착오임을 몰랐을 리 없다. 그래서 유다와 가나안 여인의 결혼을 아무렇지 않은 듯이 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찌됐든 여기선 그게 문제 되지 않고 있다. 유다가 누군가, 야곱의 넷째 아들이란 말로는 그를 다 설명하지 못한다. 그는 다윗 왕조의 조상이다. 야곱이 자기 아들들에 대해 예언했을 때 유다를 가리켜서 “임금의 지휘봉이 유다를 떠나지 않고 통치자의 지휘봉이 자손만대에까지 이를 것이다”(창세기 49:10)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가 가나안 여인과 결혼한 걸 문제 삼지 않았을까? 왕의 집안인데 뭘 못 했겠는가 말이다. 그가 힘없는 남자였어도 그랬을까? 이방인과의 결혼을 모른 척 슬쩍 지나갔을까?
다음으로 여기서도 구약성서 설화의 특징인 ‘장남의 실패’가 되풀이 되고 있다는 점이 눈이 띤다. 구약성서에선 장남이 잘 되는 경우가 별로 없다. 이스마엘이 그랬고 에서가 그랬으며 훗날 태어난 많은 장남들이 그랬다. 그들은 장남으로서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37장에서도 야곱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주목받는 아들은 막내 요셉이다. 그래서 37장과 38장을 잇는 연결점 중 하나가 바로 ‘장남의 실패’라고 보는 학자도 있을 정도다. 38장에선 장남뿐 아니라 차남도 같은 운명에 놓이지만 말이다. 장남이 왜 야훼 눈 밖에 났는지는 밝혀지지 않지만 차남의 경우는 그의 치사한 의도가 드러난다. 형수에게 자식을 낳아주지 않으려고 질외사정이라는 치사한 방법을 썼다가 야훼 눈에 나서 죽은 거 말이다.
오난이 한 짓이 왜 야훼 눈 밖에 났을까? 오해하지 말 것은, 형이 자식 없이 죽었다고 해서 동생이 형수와 ‘결혼’한 게 아니란 사실이다. 총각이든 유부남이든 동생은 형수와 결혼하는 게 아니라 동침하기만 한 거다. 그래야 형수가 자식을 낳을 테니 말이다. 이 관습은 자식 없이 과부 된 여인은 시집에서나 친정에서 살아남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준수됐다. 아들을 낳아야 시집의 땅이나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이는 과부 된 며느리의 인권을 위한 관습이었던 거다. 그러니 오난이 한 짓이 얼마나 가증스러운가. 형수를 빈손으로 쫓아내려고 그런 짓을 했으니 말이다.
유다는 과부 된 맏며느리 다말 때문에 아들이 둘이나 죽자 덜컥 겁이 났던 모양이다. 그래서 다말을 친정으로 쫓아냈다. 말로는 아들 셀라가 장성할 때까지 친정에 가서 과부로 살라고 했지만 설화자는 그의 속마음을 드러낸다. 셀라를 다말에게 주었다가는 그도 제 형들처럼 죽을 걸 염려했다고 말이다. 유다는 애초부터 셀라를 다말에게 줄 의사가 없었던 거다. 아버지로서 그를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다말의 처지를 의도적으로 무시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 유다의 아내 수아가 죽었다. 얼마가 됐는지 모르지만 ‘오랜 시간’ 동안 다말은 철저하게 무시됐다. 그녀가 어떻게 사는지 관심 갖는 사람은 없었다. 그동안 그녀는 철저하게 잊혀졌던 거다. 유다가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자 친구와 함께 양털을 깎으러 딤나로 갔는데 다말이 이 소문을 들었단다. 그녀가 어떻게 이 소문을 들었을까? 시집과 친정이 가까워서 시집에서 벌어지는 일은 미주알고주알 다 알 수 있었나? 아니면 시집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전해주는 ‘첩자’가 있었나? 우연히 알게 된 것 같진 않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시아버지가 양털 깎으러 딤나로 간다는 소문을 듣자 그 동안 죽은 듯 잠잠히 지내던 다말이 드디어 행동을 개시한다. 그 전까지 전적으로 수동적이던 다말은 여기서 처음으로 능동적으로 행동한다. 유다의 뜻에 따라 그녀는 그 집안의 큰며느리가 됐고 남편이 급사하자 시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시동생과 동침했으며 그마저 죽자 그녀는 셀라가 장성할 때까지 친정에 가서 과부로 살라는 시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그렇게 했다. 철저하게 수동적이었다는 얘기다.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능동적으로 한 행동이 “과부의 옷을 벗고 너울을 써서 얼굴을 가리고 딤나로 가는 길에 있는 에나임 어귀에 앉았”던 것이었다. 그녀는 창녀 노릇을 해서 시아버지를 유혹하려 했던 거다. 이런 괴이한 일이 있나!
아무 것도 모르는 유다는 길을 가다가 다말을 봤지만 그녀가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알아보지 못한다.’ 그는 그녀가 창녀인 줄 알고 그녀에게 성매매를 제안한다. 참으로 뻔뻔하지 않은가. 아내의 죽음을 애곡하는 기간 동안 유다는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 그게 관습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 기간이 끝나자마자 성매매하려 했다는 거다. ‘오랜 기간 동안’ 과부가 된 며느리는 방치해놓았던 그가 의무기간이 끝나자마자 그랬다는 거다. 우리는 다말이 얼마나 성적으로 활발했는지 모르지만 ‘오랜 기간’ 과부로 금욕하며 지낸 다말과 애곡 기간이 끝나자마자 바로 성매매를 하려 했던 유다의 작태가 대비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유다가 다말을 몰라봤다는 말을 고대 해석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나 보다. 다말이 너울로 얼굴을 가렸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거다. 해석자들은 이번에도 야곱이 유다에 대해 남긴 예언에서 그 이유를 찾아냈다. 거기 보면 “그(유다)는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가장 좋은 포도나무 가지에 맬 것이다. 그는 옷을 포도주에다 빨며 그 겉옷을 포도의 붉은 즙으로 빨 것이다. 그의 눈은 포도주 빛보다 진하며…”라는 말이 있다(창세기 49:11-12). 유다는 포도주를 좋아했다는 얘기다. 아하, 그래서 그랬구나! 그가 포도주에 취해서 며느리를 알아보지 못했구나! 그가 딤나로 올라갔을 때 포도주를 마셨다는 얘긴 없지만 평소에 그렇게 좋아하던 걸 그때라고 왜 안 마셨겠냐 말이다. 더욱이 마지막 문장 “그의 눈은 포도주 빛보다 진하며…”는 “그의 눈은 포도주 때문에 진해졌으며…”로도 번역될 수 있다. 히브리어에서 전치사 ‘민’은 ‘~보다’(than)로 번역할 수도 있지만 ‘~로부터’(from)라고 번역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요즘 성추행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술을 핑계 대는 경우가 많다. 술 취해서 그랬다는 거다. 그게 핑계가 되는 나라는 대한민국 밖에 없을 거다. 범죄행위를 해놓고 술 핑계를 댄다? 그게 먹힌다? 살인해 놓고 술 핑계를 대면 정상참작이 되나? 그럴리 없다. 살인은 안 되는데 성추행은 된다는 게 말이 되나? 고대 해석자들이 이렇게 해석을 한 걸 보면 술 핑계 댄 역사가 무척 오래된 거 같아 입맛이 쓰다. <열두 족장의 유언>이란 문서 중 ‘유다의 유언’을 보면 유다가 가나안 여인과 결혼한 것도 역시 술 때문이었다는데, 참으로 어이없는 해석 아닌가 말이다. 술이 무슨 죄라고….
유다가 급하긴 급했던 모양이다. 화대 대신 도장, 허리끈, 지팡이를 달라는 다말의 청을 그대로 받아들인 걸 보면 말이다. 이건 요즘 식으로 말하면 현찰이 없으니 갖고 있는 신용카드를 몽땅 내준 꼴이다. 유다는 자기가 누군지 알려주는 물건들을 다 내줬다. 유다와 다말은 철저하게 상업적인 거래를 한 거다. 둘 사이의 대화도 꼭 해야 할 말만 한 건조하기 짝이 없는 대화였다. 몸을 두고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 벌어진 철저한 상업거래, 이런 얘기가 소위 ‘경전’에 담겨 있단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대체 구약성서라는 경전이 보여주는 막장의 끝은 어디란 말인가!
유다는 금욕에서 비롯된 스트레스를 풀려고 성매수를 했는데 그렇다면 다말은 왜 이런 짓을 했을까? 그녀는 상대가 시아버지인 줄 알면서도 왜 그와 동침하려 했던 걸까? 대답은 분명하다. 그녀의 의도는 오직 하나, 자기 몸으로 유다 집안의 아들을 낳겠다는 것뿐이었다. 그래야만 자기가 생존할 수 있으니까! 그 외엔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거기에 맞춰져 있었다. 소름끼칠 정도로 무서운 집중력이 아닌가 말이다.
이와 같은 과감한 일탈을 벌이고 임신 사실을 확인한 다말은 너울을 벗고 옷을 갈아입었단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간 거다. 유다는 친구를 보내 담보물을 찾아오라 했는데 친구가 가서보니 마을 사람들 얘기가 거긴 창녀가 없다는 게 아닌가. 이게 무슨 일인가? 귀신에 홀렸었나? 있지도 않은 창녀와 동침하고 화대 대신 담보물까지 줬으니 말이다. 친구가 찾은 건 ‘성전창녀’(히브리어로 ‘케데샤’로서 제의행위로서 제사장과 성관계를 갖는 사람)였는데 유다가 만났던 건 그냥 ‘일반적인 창녀’(히브리어로 ‘조나’)였다. 텍스트는 이 둘을 구별하지만 그게 무슨 역할을 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성전창녀와 관계했더라면 윤리적으로 덜 문제 됐을까? 구약성서가 성전창녀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으니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좌우간 친구는 유다와 관계한 창녀를 찾지 못했고 담보물도 돌려받지 못했지만 유다는 더 이상 찾지 않고 잊어버리기로 작정했다. 맘 한 구석이 찜찜하긴 했겠지만 말이다.
그로부터 석 달이 지나서 다말이 창녀 짓을 해서 임신했다는 소식이 유다 귀에 들어갔다. 그는 그녀를 오랫동안 방치해둔 자기 잘못은 생각지 않고 분기탱천해서 당장 그녀를 끌어내서 화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다말은 담보물을 시아버지에게 보내 그것들의 임자가 아기 아버지라고 말한다. 그러자 일거에 전세가 역전되어 유다는 “그 아이가 나보다 옳다. 나의 아들 셀라를 그 아이와 결혼시켰어야 했는데”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 다음엔 “유다는 그 뒤로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나온다. 이 일만 없었더라면 그녀를 가까이 할 생각이었단 얘긴가? 좌우간 다말은 쌍둥이를 낳았다. 아들 하나를 얻으려고 별짓을 다 했는데 한꺼번에 아들을 둘이나 얻었으니 그녀의 노력이 가상해서 쌍둥이를 상으로 받았다고 봐야 하나….
4.
이 얘기는 창세기, 아니 전체 구약성서 안에서 가장 뜬금없는 얘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장 및 뒷장과 연결성을 찾기도 어렵다. 37장에는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서 이집트로 팔려가는 이야기가 나오고 39장에는 그가 이집트에서 승승장구하다가 보디발의 아내 때문에 투옥되는 이야기가 나온다. 38장의 유다와 다말 얘기는 둘 사이에 위치한다. 38장이 없다면 요셉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데 38장 때문에 맥이 끊어지는 셈이다. 학자들은 이런 경우 예외 없이 38장을 편집자가 삽입한 걸로 본다. 여기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거다. 그렇게 보는 게 지극히 합리적이다. 문제는, 왜 그랬냐는 거다. 편집자가 얘기의 흐름을 끊어가면서 왜 38장을 삽입했냐는 거다. 이유 없이 그랬을 리는 없다. 38장이 앞뒤 얘기와 모종의 관련이 있기에 그랬을 텐데 과연 그게 뭐냐는 거다.
오랫동안 구약성서 학자들을 괴롭혀온 이 문제를 가장 그럴듯하게 해결한 사람은 로버트 알터(Robert Alter)다. 그는 유대인이지만 구약성서 전문가가 아닌 일반 문학이론을 연구하는 학자인데 1981년에 출판한 <The Art of Biblical Narrative>에 이 문제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해결책이 들어 있다. 이 책은 구약성서의 설화비평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고전이 됐다.
알터에 따르면 37장과 38장을 이어주는 것은 ‘인식하다’(히브리어로 ‘나카르’)라는 동사다. 37장에서 형들은 미운 짓만 골라서 하는 요셉을 죽이려고 했다가 차마 그러지는 말자는 르우벤의 말을 듣고 옷을 벗기고 그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요셉은 구덩이 안에서 죽을 운명이었지만 이번에는 유다가 그를 죽이지는 말고 팔아넘기자고 제안한다. 이에 형제들은 그를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넘긴 다음 그의 옷에 염소피를 묻혀서 아버지 야곱에게 내놓으며 “우리가 이 옷을 주웠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지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히브리어로 ‘하카르-나’)”라고 말한다. 야곱은 그게 요셉의 옷인 줄 ‘알아보고서’(히브리어로 ‘야키라하’) 슬프게 울었다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단어는 ‘알아보다’라는 뜻의 ‘나카르’이다.
38장의 얘기에서 결정적인 순간은 다말이 유다에게 담보물로 잡은 도장, 허리띠, 지팡이를 유다에게 보내면서 “잘 살펴보십시오(히브리어로 ‘하카르-나’). 이 도장과 이 허리끈과 이 지팡이가 누구의 것입니까?”라고 묻는 순간이다. 그러자 유다는 그것들을 ‘알아보았다’(히브리어로 ‘야케르’)고 했다. 물건들이 자기 것인지 알아봤다는 거다. 야곱이 피 묻은 옷을 보고 그게 요셉의 옷인지 알아봤던 것처럼 말이다. 앞의 얘기에선 아들들이 아버지를 속이려고 했다. 야곱이 옷 임자를 알아봤지만 결국 그는 알아봤던 덕에 아들들에게 속고 말았다. 반면 뒤의 얘기에선 유다가 물건의 임자가 자기임을 알게 됨으로써 진실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앞의 얘기는 진실을 감추고 속이는 얘기였던 반면 뒤의 얘기는 진실을 드러내는 얘기였던 거다. 훗날 요셉이 이집트의 거물이 됐을 때 양식을 얻으러 그 앞에 섰던 형들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건 아이러니다. 속임수로 성공하려는 자는 속임수 때문에 망하는가….
알터는 이것을 설화자가 사용한 고도의 문학적인 기교로 이해한다. 단순히 어떤 이야기를 중간에 삽입하거나 단어 하나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의 문제에 그치는 게 아니라 설화자가 고도의 문학적 기교와 예술적 능력을 발휘한 걸로 봤다는 거다. 37장에서 요셉의 옷은 아버지 야곱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는 상징이다. 38장에서 도장, 허리띠, 지팡이는 유다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물건들이다. 이런 물건들을 매개로 얘기를 진행시킨 것도 설화자의 문학적 기교다. 39장에서 섹스가 다시 한 번 문제가 되는 것도 범상치 않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에 굴하지 않고 결국 감옥살이까지 했지만 유다는 애곡 기간이 끝나자마자 돈을 주고 여인의 몸을 사려 들었으니 둘의 대조가 얼마나 극명한가 말이다. 요셉 때문에 유다가 얼굴 들기가 더욱 어렵게 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5.
이 얘기를 읽는 사람들 맘속 깊은 곳에선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은 대체 이 얘기가 뭘 바라는가 하는 거다. 이게 우리 신앙과 무슨 상관이 있냐는 얘기다. 이 얘기가 왜 여기 있을까? 우리더러 뭘 어쩌라는 걸까?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의 근친상간 막장 드라마에서 우린 도대체 무슨 교훈을 끌어내야 하는가 말이다. 이 외설스런 얘기를 자녀들에게 해줄 수나 있겠나.
학자들은 교훈을 찾다 찾다 “그 아이가 나보다 옳다”라는 유다의 말에 집중했다. 과부는 모름지기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관습에 근거해서 다말을 심판하려던 유다보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깟 관습 쯤이야….’ 하고 이를 뛰어넘은 다말이 더 정의롭다는 게 얘기가 말하려는 교훈이란 거다. 그 어떤 고상한 도덕이나 윤리보다 더 중요한 건 생존권을 지키는 것이다. 그럴 수 있겠단 생각이 들긴 하지만 여전히 기분은 찜찜하다. 겨우 그 정도의 교훈을 전하겠다고 이런 막장 드라마를 쓴단 말인가? 아무리 교훈이 훌륭해도 굳이 이런 막장 소재를 썼어야 했나 하는 생각은 지워지지 않는다. 안 그런가?
이 외설스런 얘기를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하게 했고 드디어 경전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만든 동력은 뭘까? 구약성서에는 의도(intention) 없이 전해진 얘긴 없다. 그렇다면 이 얘기의 의도는 뭘까? 무슨 얘길 하고 싶어서 이 ‘뜨거운 감자’를 버리지 않고 보존해서 전했을까?
구약성서에는 굳이 이런 얘길 왜 후대에 전했을까 싶은 얘기들이 이것 말고도 많이 있다. 그 옛날 전쟁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인 얘기야 자랑스럽게 전할 만한 것이었을 수 있겠다. 도덕이나 윤리 같은 것은 전쟁터에선 힘을 못 썼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창세기 34장에 나오는 얘기, 곧 야곱의 딸 디나가 강간을 당했다고 그녀의 오라비들이 강간 당사자뿐 아니라 세겜의 모든 남자들을 몰살한 얘기 같은 건 결코 떳떳한 얘긴 아니었을 텐데 뭣 때문에 그 얘길 전했을까? 게다가 그들은 세겜 사람들을 속여서 할례를 받게 한 다음에 그들을 몰살했다지 않은가. 하느님과 맺은 언약의 상징인 ‘할례’라는 거룩한 종교의식을 살륙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은 자기들끼리도 하기 어려운 얘기였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성서에 나오는 얘긴 뭐가 됐든 좋은 교훈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잘못된 게 아닐까 싶다. 야훼 종교란 게 첨부터 이집트 지배자들의 종교를 거부하고 시작된 밑바닥 사람 히브리인들의 종교다. 그래서 지배자들 기준으론 애초부터 맞지 않은 점이 많았다. 종교가 됐든 역사가 됐든 이데올로기가 됐든 지배자들 세상에서 주인공은 늘 지배자들이었다. 그들은 떠돌아 다니던 수많은 얘기들 중에서 교훈이 될만한 세련된 얘기들만 추려서 후대에 전한 데 반해서, 밑바닥 히브리인들은 교훈이 되고 말고와는 무관하게 잡다한 얘기들을 그냥 있는 그대로 전했던 게 아닐까? 교훈이라구? 꼭 그런 게 있어야 하나? 그냥 이게 우리들 얘기니까 전한 것이거든! 반드시 교훈이 있어야 한다고 누가 그래? 교훈 없는 얘긴 잊혀야 한다는 거야? 아무리 추잡하고 외설스러워도 이게 우리들 얘기니 남기고 싶은 거지! 뭐, 이런 자세로 전한 얘기도 있지 않았겠나 말이다.
하느님은 누구 편을 들어주는가? 그걸 누가 어떻게 알겠냐마는 분명한 사실은 밑바닥 사람들보다 지배자들이 더 하느님은 자기편이라고 믿는다는 거다. 하느님이 자기들 편이니까 자기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게 아니냐고 믿는단 얘기다. 반면 밑바닥 사람들은 하느님이 자기편이란 믿음을 그리 강하게 갖고 있지 않다. 하느님이 자기들 편이라면 왜 자기들이 이렇게 찌질하게 살겠냐는 거다. 그렇지 않은가?
특이하게도 유다와 다말 얘기엔 첨부터 끝까지 하느님이 등장하지 않는다. 하느님이 에르와 오난을 죽게 했다지만 그게 유다나 다말을 편들어서 한 행동으론 보이지 않는다. 그는 유다 편도, 다말 편도 아니다. 하느님은 첨부터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는 에르와 오난을 죽게 함으로써 유다에겐 자식 잃은 슬픔을, 다말에게는 현실적인 곤경을 안겨줬다. 나름 공평하지 않은가?
하지만 얘기에서 하느님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암묵적으로나마 그가 유다보다는 다말의 현실에 더 공감하고 있는 걸로 볼 수 있다. 이게 지나친 억측일까? 하느님의 부재는 유다 같은 지배자의 경험이라기보다는 다말 같은 피지배자의 경험이니까 말이다. 하느님이 침묵하는 가운데 몸뚱이 밖엔 싸울 무기가 없는 다말이 승리함으로써 하느님은 부재로써 그의 편을 들어줬다고 이해한다면 그게 엑세제시스(exegesis, 텍스트에서 의미를 끄집어 내는 행위)가 아닌 에이스제시스(eisgesis, 텍스트에 독자의 생각을 집어넣는 행위)라고 욕을 먹을까? 글쎄…. 얘기가 뭘 전하려는지가 오리무중이라서 별 생각을 다 해봤으니 독자들은 그러려니 하고 너그럽게 이해해 주기 바란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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