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순례(20)
BWV 244 Matthäus-Passion/마태수난곡
No. 21 나를 보호하여 주옵소서
마태수난곡 2부 37~38번 마태복음 26:57~59 | |||
음악듣기 : https://youtu.be/i0EMLkRlswE | |||
37(31) 내러티브 | 레치타티보 | 57. Die aber Jesum gegriffen hatten, führeten ihn zu dem Hohenpriester Kaiphas, da nun die SchriftgeIehrten und Ältesten sich versammlet hatten. 58. Petrus aber folgete ihm nach von ferne, bis in den Palast: des Hohenpriesters; und ging hinein und satzte sich bei die Knechte, auf daß er sähe, wo es hinaus wollte. 59. Die Hohenpriester aber und Ältesten und der ganze Rat, suchten falsches Zeugnis wider Jesum, auf daß sie ihn töteten; und funden keines. | 57.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58.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쫓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았더라. 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
38(32) 코멘트 | 코랄 | Mir hat die Welt trüglich gericht't Mit Lügen und mit falschem G'dicht, Viel Netz und heimlich Stricken. Herr, nimm mein wahr in dieser G'fahr, B'hüt mich vor falschen Tücken. | 세상은 속임수와 간계와 거짓 증언으로, 곳곳에 놓인 그물과 숨겨진 덫으로 나를 재판하려합니다. 주여, 이 위험에서 나를 지켜 주소서 이 거짓된 계략에서 나를 보호 하소서. |
예수를 죽이려는 사람들
예수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끌려갑니다. 평소 끼리끼리 반목하던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기 위해 이 야밤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은 공회의 회원들이었습니다.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공회는 종교적으로 이전과 다름없는 중요한 역할을 했고 정치적인 영향력 또한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먼저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고 백성들에게 그 소식을 알려야 할 그들이 지금 창세기로부터 말라기 까지 그에 관한 약속과 예언으로 가득한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 줄도 모르고 그를 알아보지 못한 채 오히려 그를 죽일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지만 오늘날 교회의 모습에 비추어 보면 그다지 낯선 것도 아닙니다.
불신앙 보다 더 고약한 것이 왜곡된 신앙입니다. 불신앙은 참된 신앙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왜곡된 신앙보다 훨씬 많습니다. 예수의 길을 몰라서 방황하는 사람들 보다 예수의 길을 훼손하는 사람들이 더 위험합니다. 사랑의 예수께서도 그들을 향해서는 분노를 가감 없이 표현하셨습니다(마태복음 18:6, 마가복음 9:42, 누가복음 17:2). 신천지와 같은 이단에만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대부분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가르치(려드)는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의 욕망의 행렬 앞에 예수와 십자가를 억지로 세우고 예수의 길을 따른다고 떠벌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죽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군병이나 예수를 잡아온 말고와 그의 동료들이 아니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간교함과 올무로 그들이 뒤에서 모든 것을 계획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권위가 있어 보이고 신앙에도 열심히 있어 보이고 평범한 사람들에 비해서 더 귀해 보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죽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기독교’, ‘예수교’의 지도자들이지만 정작 예수의 길과 예수의 마음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어쩌면 예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것들만 골라서 하는 것만 같아 보일 때도 있습니다. 커지려 하고, 높아지려 하고, 스타가 되려하고, 부자가 되려하고, 군림하려 하고, 다스리려 하며, 사람을 도구 삼습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 없이 험한 곳에서 주무셨고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으며 그 일행은 늘 배가 고파서 안식일 율법을 어겨야만 하기도 했건만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의 모습은 세상의 상식적 기준에서 보아도 함량미달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는 그의 탄생과 삶과 죽음 그리고 만남과 말씀을 통해, 그리고 결정적으로 십자가를 통해 그의 길을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런 예수가 불편합니다. 자신들의 욕망과 달리 예수께서는 너무나도 분명하게 그 길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교에서도 예수님 이야기를 잘 하지 못합니다.
그들을 분별하는 법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에서 신앙생활 하기 위한 중요한 덕목이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분별하는 능력이 되어버렸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들은 예수 이야기를 잘 하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그들은 쉽게 패거리를 짓는 특성이 있습니다. 예수를 죽이려는 저 사람들을 보십시오. 늦은 밤임에도 잘들 모여서 동이 트자마자 예수를 재판에 넘겨버렸습니다. 악을 도모하려 할 때 사람들은 잘 모입니다. 서로의 악함에 위로 받으며 예수의 길이 아닌 인간의 욕심을 따르는 것을 합리화 합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예수를 죽이는 사람들은 겉으로 볼 때 누가 봐도 분명한 악당이나 핍박하는 자들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라인홀트 니버의 탁월한 성찰대로 도덕적으로 보이는 인간들이 모여서 집단화 될 때 쉽사리 비도덕적 사회를 이루며 악을 도모합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자기 스스로도 그런 일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 수가 늘어나고 건물이 커지는 것에서 영적 만족을 누리기 때문에 예수를 죽이고 있음에도 나름 영적으로 충만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를 죽인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이들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상태에서 묘사하기 때문에 우리 역시 오늘날의 삶 가운데 그런 부류들을 쉽게 분간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가 쉽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정체를 모른 채 속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서 신앙을 우습게 여기는 세속적인 사람들을 그런 부류로 착각하며 과도한 적대감을 드러냅니다. 진짜 적은 내부에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 가운데 예수의 길을 훼손하고 예수의 영을 죽이려하며 예수의 마음을 외면하는 자들을 분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인간적으로나 영적으로 고착된 관계에 있으면 더욱 어렵지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자기 의에 도취되어 있고 자신도 모르는 욕심의 마성에 지배받고 있기에 변화되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가장 지혜로운 방법은 어떤 식으로든 그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고 단호하게 관계를 끊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들에게 영향 받지 말고 참된 예수공동체를 바라보고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예수를 알아야 하고 예수를 사랑해야합니다. 예수를 알고 예수를 사랑해야 예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흐의 마태 수난곡은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의 마음을 알게 하는 가장 위대한 신앙의 도구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들을 분별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흐의 마태수난곡은 코랄을 통해서 늘 그 사실을 재확인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라고 말하셨을 때 이어지는 16번곡 코랄은 “그것은 나입니다. 지옥에서 손발을 묶이고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라고 노래합니다. 또한 대제사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며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라고 물었을 때 이어지는 코랄은 “당신을 그렇게 때린 자는 누구입니까? 죄인들은 우리와 우리의 자손들 뿐”이라고 노래합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먼저 돌아보고 분별해야 할 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고 예수의 길에 서서 바라보면 교회와 교단 한국교회 내에서 그런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안에 그들과 같은 욕심이 생기고 그들 주변을 서성이게 되면 그들과 연대의식이 생기고 결국 분별력을 잃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의 마음으로 그들을 분별하고 분노하고 저항하되 그만큼 우리가 먼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그러셨듯이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조용한 기도의 시간을 늘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입니다. 예수의 길을 따르고,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참된 예수 공동체를 향해서 늘 개혁하는 마음으로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또 다른 희망
하지만 저는 곳곳에서 희망을 봅니다. 먼저 순하고 착한 성도들이 있습니다. 진정 교회를 교회답게 하고 진정 교회를 지키는 이들은 한사람의 유능한 목사가 아니라 순수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교회를 섬기는 이름 없는 성도들입니다. 또한 교회 내에서도 존경스러운 영적 지도자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분들은 잘 드러나지 않고 잘 모이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때마다 사람들을 피해 혼자 있거나 몇몇 제자들과만 머물렀듯이 말입니다. 그런 분들이 잘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뉴스의 맹점 때문이기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뉴스는 자극적인 나쁜 소식에 더 친근함을 보입니다. 좋은 예수님의 제자보다 문제 있는 목사들이 더 많이 부각됩니다. 비록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이 세상 곳곳에 묵묵히 예수를 따르는 참된 예수의 제자들이 있고 그들과 내가 예수의 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힘을 줍니다.
멀찍이
한편, 베드로는 예수를 쫓아가지만 ‘멀찍이’거리를 둡니다. 베드로는 나름 용기를 부려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하인들 틈에 껴서 앉아 최대한 자기를 감추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거기에 들어간 것은 단지 ‘그 결말을 보기 위함(58절)’이었습니다. 그 결말에 어떠한 영향력을 끼치거나 예수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저항하거나 예수를 변호할 용기는 아직 없었으며 예수를 사랑해서 쫓아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의 모습은 예수와 거리를 두고 기독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최대한 숨기며 사는 우리들의 모습과 닮아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침묵하고 그들의 권세와 집단성에 눌려 잠잠히 눈치만 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과 닮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어떻게 참된 제자로 변하게 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같은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진정 예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요한복음 21:15).
나를 보호하여 주옵소서
예수를 죽이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로부터 더 멀어지게 하려는 세상의 속임수와 간계는 점점 더 교묘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계략이나 고난이 아닌 안락함의 유혹으로 우리를 예수와 분리하려 합니다. 또한 교회를 떠나게 하기 보다는 교회 자체를 욕심에 사로잡힌 반 예수적 교회로 변질시킴으로 우리를 예수와 점점 멀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그들의 간계를 파악하고 이겨 낼 재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예수의 고난을 묵상해야하고 예수와 함께해야 하며 예수를 사랑해야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코랄 가사와 같은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코랄은 종교개혁시대의 회중찬송입니다. 종교개혁이 힘을 얻고, 뻗어 나가고, 열매 맺는 데는 코랄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마태수난곡에서도 코랄은 청중과의 소통의 끈이 되어줍니다. 코랄은 가톨릭 성가와 달리 민요적인 선율을 가지고 있었고 내용 또한 딱딱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의 복음성가와 비교하여 그 파급력과 역할을 생각하면 코랄의 중요성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코랄은 오늘날의 복음성가 보다 더 아름답고 품격 있는 가사와 선율을 담고 있습니다. 루터, 멜랑히톤, 파울 게르하르트 등 당대 최고의 신학자들이 단순하고 운율적으로 쓴 가사는 신학적 핵심내용과 개인적 은혜와 고백을 담고 있으며 종교개혁의 신앙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또한 코랄의 선율은 민족의 정서가 살아 있는 익숙하고 정감 있는 멜로디였습니다. 가사와 멜로디, 지성과 감성의 신앙이 코랄을 통해 성도들의 마음에 심겨졌고 이는 종교개혁 성공의 근간이 되어 주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에는 19세기 영미권 교회가 부흥하던 시대의 찬송가와 현대 미국교회와 대중음악의 영향이 지배적인 CCM으로 가득한 것 같습니다. 독일인들에게 코랄이 있었듯이 보다 신학적이고 은혜롭고 정감 있는 한국교회만의 노래가 나와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한국교회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종교개혁 시대의 신앙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제가 매주 코랄을 우리말로 부를 수 있도록 번역하고 서투르게나마 악보를 그려서 올려드리는 이유도 이런 희망 때문입니다. 링크된 음원 (https://youtu.be/knlHABUzN4A)을 들으시면서 꼭 함께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현재 이천중앙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하며 중앙연회 사모합창단을 지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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