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18)
BWV 244 Matthäus-Passion/마태 수난곡
No. 19 우리의 중보자 예수
마태 수난곡 1부 34번~35번 마태복음 26:51~56 | |||
음악듣기 : https://youtu.be/54jonxBMC8s | |||
34(28) 내러티브 | 에반겔리스트 | 51. Und siehe, einer aus denen, die mit Jesu waren, reckete die Hand aus und schlug des Hohenpriesters Knecht und hieb ihm ein Ohr ab. 52. Da sprach Jesus zu ihm: |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
대사 | 예수 | 52. Stecke dein Schwert an seinen Ort; denn wer das Schwert nimmt, der soll durchs Schwert umkommen. 53. Oder meinest du, daß ich nicht könnte meinen Vater bitten, daß er mir zuschickte mehr denn zwölf Legion Engel! 54. Wie würde aber die Schrift erfüllet! Es muß also gehen. | 52.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
내러티브 | 에반겔리스트 | 55. Zu der Stund' sprach Jesus zu den Scharen: | 55.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
대사 | 예수 | 55. Ihr seid ausgegangen als zu einem Mörder, mit Schwerten und mir Stangen, mich zu fahen; bin ich doch täglich bei euch gesessen und habe gelehret im Tempel, und ihr habt mich nicht gegriffen. 56. Aber das ist alles geschehen, daß erfüllet würden die Schriften der Propheten. | 55.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
내러티브 | 에반겔리스트 | 56. Da verließen ihn alle Jünger, und flohen. | 56.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
35(29) 코멘트 | 코랄 판타지아 | O Mensch bewein' dein Sünde groß; Darum Christus sein's Vaters Schoß Äußert und kam auf Erden;
Von einer Jungfrau rein und zart Für uns er hie geboren ward, Er wollt der MittIer werden.
Den Toten er das Leben gab, Und legt' dabei all' Krankheit ab, Bis sich die Zeit herdrange, Daß er für uns geopfert würd, Trüg' unser Sünden schwere Bürd' Wohl an dem Kreuze lange. | 오 인간들아, 너희의 죄 인해 크게 슬퍼하라. 그 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품을 떠나 이 땅에 오셨음이라
우리의 중보자 되시려 순결하고 온화한 동정녀에게서 나셨도다.
죽은 자에게 생명주시고 모든 질고를 쫓아 내셨건만 이제는 우리를 위한 제물이 되실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구나. 우리의 죄, 무거운 짐 몸소 지시고 십자가에 매달리시려 하신다. |
1부와 2부 사이
마태 수난곡 1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마태 수난곡은 총 연주 시간이 세 시간에 육박하는 대작입니다. 청중들뿐만 아니라 연주자들을 위해서라도 쉬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바흐 역시 이 장대한 이야기를 부분으로 나누기 위해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바흐의 성격상 그는 아마 처음에는 세 부분으로 나누길 원했을 것입니다. 성경 본문을 기준으로 볼 때, 마태복음 26장 1절부터 겟세마네 장면인 26장 56절 까지가 1부, 가야바의 집에서부터 빌라도 총독에게 재판을 받으신 27장 26절 까지가 2부,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지시고 무덤의 돌이 닫히기 까지를 3부로 나누면 내용이나 분량 적으로 적당했을 것입니다. 마치 1700년 후에 바흐에 의해 수난곡으로 작곡될 것을 염두 한 마태복음 저자의 의도처럼 예수 수난 이야기는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실재로 마태수난곡의 전곡 음반은 세 장의 CD에 나뉘어 실려야 하어야 하는데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거의 모든 음반이 이런 식으로 나누어집니다.
저 역시 사순절의 날짜 수에 맞춘 40회에 걸친 연재를 계획하며 처음에는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 싶었는데 이 역시 너무나도 무난하게 나눌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신비로운 일입니다. 마치 수난곡으로 작곡 되고 40일 동안 이 이야기를 묵상하라는 듯 마태복음의 수난 이야기는 크게는 세 부분으로, 작게는 40일의 여정으로 말끔하게 나누어집니다.
하지만 바흐는 마태 수난곡을 세 부분으로 나누지 않고 두 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세 부분으로 나눌 때 첫 번째 부분을 1부(Erster Teil)로 정했고 나머지 두 번째 부분과 세 번째 부분을 합하여 2부(Zweiter Teil)로 정했습니다. 분량을 생각해도 2부가 1부 보다 두 배 정도 더 깁니다. 그런데 바흐와 피칸더는 왜 그렇게 나누었을까요?
바흐 당시의 루터교 예배를 생각하면 수수께끼가 풀립니다. 마태수난곡은 연주회장의 공연을 위한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위한 음악이었지요. 그 당시에는 대중적인 공연장조차 없었습니다. 세속음악(secular music)은 주로 왕실이나 귀족들의 저택의 커다란 방(chamber)에서 연주되었습니다. 그렇게 발전한 음악의 장르가 바로 실내악(chamber music)입니다. 그 무렵 산업혁명이 태동한 영국에서는 바흐의 시대부터 일반인들을 위한 대중공연이 활성화 된 반면 독일에서의 대중적 음악 공연은 50년 쯤 지나 중산층이 성장하게 된 모차르트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조금씩 활성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이 음악다운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곳은 교회 외에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음악사에서 바흐시대의 독일은 최고의 전성기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의 성가대는 매 주일 3~5분 정도의 작곡된 성가를 부르는 정도이지만 바흐시대의 교회에서는 매주 30분 정도의 칸타타를 작곡하여 오케스트라와 합창과 솔로를 연습하여 올렸으니 그 음악적 수준과 찬양을 향한 정성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함을 알 수 있습니다. 바흐는 교회력에 따라 1년을 한 사이클로 하여 세 개의 사이클의 칸타타를 작곡할 계획이었는데 그중에서 현재 200여 곡이 남아 있고 안타깝게도 수십여 작품은 유실되었습니다.
마태 수난곡은 사순절의 마지막 날, 성금요일에 열리는 예배를 위해 작곡되었습니다. 예배 중에는 최후의 만찬을 기억하며 성찬식이 열렸는데 일 년 중에 가장 의미 깊은 성찬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예배이기 때문에 말씀 중심의 루터교에서 설교가 빠질 수 없겠지요. 바로 마태수난곡의 1부와 2부 사이에 설교가 자리했던 것입니다. 오늘 만나실 부분의 마지막 곡 코랄판타지아가 끝나면 설교가 이어졌을 것이고 그렇게 1부가 마무리 됩니다. 설교의 분량을 고려하면 1부와 2부의 균형이 잡히는 것이지요.
귀가 잘린 말고
34번곡은 예수의 대사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의 대사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앞부분은 폭력을 써서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제자에 대한 꾸지람이며 뒷부분은 잡으러 온 무리들의 떳떳치 못한 행동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은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이루려 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이사야 53:12)
병행 본문인 요한복음 18장 10절에 의하면 칼을 가진 제자는 베드로였으며 귀가 잘린 대제사장의 종의 이름은 ‘말고’였습니다. 종의 귀를 자른 이야기는 네 개의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 원문과 독일어 성경에서는 지난 시간 유다가 등장할 때처럼 이 부분에서 ‘보라!//siehe!'라는 감탄사가 사용됩니다. 어떤 장면을 향해 주위를 환기할 때 사용하는 표현으로 우리말 성경에서는 번역 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었지요. 게다가 누가복음에는 예수께서 그의 귀를 만져 났게 하셨다는 기록도 추가 되어 있습니다.
저의 상상이긴 하지만 그 사건이 모든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고 그 이름과 치유 사건이 성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말고는 그 때로부터 십자가에 달릴 때 까지 예수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고 자신의 귀를 어루만지신 예수의 손길을 기억하며 예수를 믿었을 것 같습니다. 구레네 시몬과 그의 아들 루포의 경우처럼 말입니다.(마태복음 27:32, 마가복음 15:21, 로마서 16:13) 조금 더 상상력을 펼쳐서 말고가 자신의 귀를 자른 장본인인 사도 베드로 밑에서 초대교회의 종지기와 같은 역할을 하며 평생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사람이 되었다면 더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겠지요. 예수의 손길을 직접 느꼈기에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 모두를 방관자가 아니라 새로운 십자가의 주인공으로 끌어들이는 힘이 있습니다. 사도이건 종지기이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각자의 모양대로 예수를 따르는 삶이 우리 인생을 가장 가치 있고 충만하게 만들어 줍니다.
예수 곁의 빈자리
1부는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1부를 마무리 하는 에반겔리스트의 마지막 내러티브를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Da verließen ihn alle Jünger, und flohen/그 때 모든 제자들이 그를 버렸고 도망갔다’라고 증언하는 에반겔리스트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묵직하게 들리며 이어지는 오케스트라와 오르간의 마무리는 바로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라고 선언하는 재판정의 망치 소리처럼 단호하게 들립니다. 그 소리 후에 1부의 마지막 코랄이 시작하기까지 짧은 적막이 흐릅니다. 홀로 남겨진 예수 곁의 빈자리가 느껴지는 적막입니다. 우리가 있어야 했던 바로 그 빈자리 말입니다.
두쵸(Duccio), 잡혀가는 예수, 시에나 대성당 제단화(Maesta)의 일부, 1310년 경
우리의 중보자(der Mittler) 예수
이어지는 코랄 판타지아는 1부의 마지막 곡입니다. 코랄 판타지아는 코랄선율을 기본으로 하여 작곡가가 음악적인 상상력을 발휘해서 좀 더 다채롭고 장대하게 펼쳐낸 합창곡을 말합니다. 마태수난곡의 시작곡도 코랄 판타지아였지요. 전체의 마지막 곡도 코랄 판타지아는 아니지만 세 개의 합창단과 솔리스트가 함께 부르는 장대한 합창곡으로 마무리됩니다.
앞서 이 1부의 마지막 곡 후에 설교가 이어진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러므로 이 코랄은 오늘날로 말하면 예배설교 전에 올리는 성가대의 찬양곡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 역할에 걸맞게 이곡은 십자가의 의미를 함축시킨 음악적 설교처럼 들립니다. 이 코랄의 가사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의미와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를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Er wollt der MittIer werden/그는 우리의 중보자가 되려하신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디모데전서 2:5)
혹여 이 코랄의 가사 내용을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하셔서 대충 넘겨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합창단 소년들이 정성스럽게 노래하는 한 구절 한 구절을 마음에 새겨가며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목사님들의 설교 또한 성도들이 복음의 정수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다는 전제로 전달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은 아무리 반복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복음은 지식이 아닙니다. 한번 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복음은 삶의 방식입니다. 매일 지속되는 삶을 이끄는 삶의 방식 우리의 새로운 존재를 재정립시켜 주는 새로운 원리로서 날마다 우리 삶에 새롭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번 원고를 쓰면서 이 합창곡의 가사를 다시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코랄 멜로디에 얹어 부를 수 있도록 노래가사로 도 만들었습니다. 이 멜로디로 펼쳐낸 바흐의 오르간 전주곡을 들으며 번역을 하는데 마치 이 복음의 내용을 새롭게 듣는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특히 이 합창곡의 마지막 소절이 겟세마네에서 끌려 내려가시는 예수의 모습과 오버랩 되어 도무지 참을 수 없는 눈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죽은 자에게 생명주시고
모든 질고를 쫓아 내셨건만
이제는 우리를 위한 제물이 되실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구나.
우리의 죄, 무거운 짐 몸소 지시고
십자가에 매달리시려 하신다.
이 코랄의 가사는 1530년 제발트 헤이든(Sebald Heyden, 1499~1561)이 썼습니다. 바흐는 이 코랄을 깊이 사랑하여 마태수난곡에서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코랄 모음곡집(BWV 402)과 46곡의 코랄 전주곡이 담긴 오르겔 뷔힐라인(Orgelbüchlein, BWV622)에도 이 멜로디를 사용했습니다. BWV 402번 코랄 멜로디를 들으시면서 아래에 노래용으로 번역한 가사를 붙여서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코랄 BWV 402 듣기 : https://youtu.be/q3lXCPxlmq8
부디 늘 새롭게 성육신과 십자가의 은혜를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노래로 부르고 또 불러도, 듣고 또 들어도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주는 것이 바로 복음,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입니다.
오 슬퍼하라 너의 죄악을
아버지 품을 떠나서
이 땅에 내려 오셨네.
동정녀에게서 나시고
우리를 위해 오셔서
중보자 되어 주셨네.
죽은 자 살려 주시고
아픈 자 고쳐 주시고
죽기까지 사랑하사
피흘려 죽으셨도다
무거운 죄짐 지시고
십자가 지셨도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현재 이천중앙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하며 중앙연회 사모합창단을 지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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