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봉의 성서 묵상, 영성의 길(3)
자각하라!
“여러분도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그 때에 여러분은 허물과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우리도 모두 전에는, 그들 가운데에서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으며, 나머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로 베풀어주신 그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장차 올 모든 세대에게 드러내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에베소서 2:1-10).
오래 전 일입니다. 기도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미국에서 나온 기도 관련 책들을 꼼꼼히 살펴 본 일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상한 점이 하나 발견되었습니다. ‘회개기도’에 대해 제대로 논한 책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고백의 기도’가 전부였습니다. 고백의 기도와 회개의 기도는 비슷해 보이지만, 꽤 다른 것입니다. 회개의 기도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 자신을 돌아보고 통회하며 삶을 돌이키는 기도입니다.
기도 안내서에 회개에 대한 안내가 없다는 사실은 미국의 교회들이 죄에 대해 망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어느 나라 사람이든 죄에 대해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사는 미국에서는 그 도를 지나쳤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조는 누구에게도 “너, 잘 못 했어!”라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주제 넘은 것이고 교양에 있어서 뒤떨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소위 ‘정치적 정확성’(political correctness)입니다. “그건, 옳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것도 좋아! 그건 너의 선택이지!”라고 말해야 옳습니다.
이 풍조가 교회 안에까지 밀고 들어와 복음에서 가시를 뽑아 버렸습니다. 교회에서도 더 이상 ‘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죄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 당연히 회개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죄가 아니라 ‘상처’요 ‘아픔’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가 아니라 ‘치유’이며 ‘회복’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거룩하고 의로운 삶으로 향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더 나은 삶, 더 복된 삶, 더 향상된 삶으로 향하게 합니다.
세상과 마찬가지로 교회에서도 ‘웰빙’(well-being)을 말하지, ‘라잇빙’(right-being)을 말하지 않습니다. 상처와 아픔이 죄로 인해 만들어지는 것이고, 치유와 회복은 회개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 때 비로소 더 나은 삶, 더 복된 삶을 살게 된다는 진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웰빙’보다 ‘라잇빙’이 더 앞서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 현상은 미국만의 현상이 아닙니다. 미국제 복음을 가장 신속하게 수입해 사용하는 한국교회에도 이러한 현상이 뚜렷합니다.
복음에 숨겨져 있는 가시를 뽑아 버리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가시에 찔려야 복음을 제대로 믿고 그 복음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자신의 죄성을 자각하고 인정하며 회개해야만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복음’이란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자신이 처해 있는 불행과 슬픔을 알지 못하는데, 복음이 어떻게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습니까? 인간이 처해 있는 불행과 슬픔의 원인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 원인을 마지막까지 파고 들어가면 결국 죄에 닿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를 인정하지 않고 복음을 믿으려는 것은 마치 몸에 난 종기를 고운 천으로 감싸고 있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Goya Peter" by Francisco Goya, Wikimedia Commons.>
죄에 대해 말하다 보면, “내가 왜 죄인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법적인 의미에서의 죄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죄를 보통 ‘범죄’라고 부릅니다. 영어로는 crime이라고 합니다. 법을 어긴 것이 범죄입니다. 반면,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이다”라고 말할 때는 의미가 달라집니다. 이 죄를 영어로는 sin이라고 부릅니다.
죄는 범죄보다 훨씬 더 깊고 넓은 의미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며 나와 이웃에게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해를 주는 생각과 계획과 행동은 모두 죄입니다. 죄가 이런 것이라면, 우리는 자신의 죄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여러분도 전에는 허물과 죄로 인해 죽었던 사람들입니다”(1절)라고 말씀하시는데, ‘여러분’ 안에 우리 모두가 포함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 영적인 눈이 밝아지면 우리는 또 다른 종류의 죄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죄’(sins of commission)도 있지만,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죄’(sins of omission)도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자라가다 보면, ‘해서는 안 될 죄’를 범하는 일이 점점 줄어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이라는 착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조금 더 자라고 보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죄’들이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10절).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구속된 존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의 작품으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뜻입니다. 따라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사랑해야 하는데 사랑하지 못한 것, 용서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 내어 주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모두 죄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 없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죄에 관해 하나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죄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죄보다 더 깊은 죄가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더럽혀지는 죄입니다. ‘행함의 죄’(sins of doing)보다 더 깊은 ‘존재의 죄’(sins of being)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작품이 더럽혀지고 훼손되도록 버려두는 것이 가장 깊은 죄입니다. 죄에 대해 수산나 웨슬리(Susanna Wesley)는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당신의 이성을 약화시키는 것은 무엇이나, 당신의 양심의 예민함을 둔화시키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감각을 둔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나, 영적인 것에 대한 당신의 갈망을 약화시키는 것은 무엇이나, 즉 당신의 영혼보다 당신의 육신을 더 강화시키는 것이면 무엇이든, 그것이 아무리 순수해 보이더라도, 그것은 당신에게 죄가 됩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의 죄는 바로 이 존재의 죄로부터 발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가장 먼저 자각할 것은 바로 우리 존재가 오염되어 있고 파괴되어 있다는 사실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너져 “오, 제가 죽게 되었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게 됩니다. 이것이 영성이 깨어나는 순간입니다. ‘자각’ 즉 스스로에 대한 진실을 깨닫는 것이 영성의 출발점입니다.
(묵상)
눈을 감고 묵상하십시오. 위에서 이야기한 세 가지의 죄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얼마나 행했으며 또 행하고 있습니까? 당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당신의 마음과 영혼은 얼마나 맑고 깨끗합니까?
어떻습니까? 아직도 “나는 죄인이 아니다”라거나 “그래도 나는 평균 이상은 되는 사람이다”라고 말할 자신이 있습니까? 조용히 묵상하며 성령의 조명을 기다리십시오. 진정한 회개의 은총을 기다리십시오.
김영봉/와싱톤 한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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