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얘기마을(94)
삶이 우리를 가르치는 방법
지금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기에 이야기합니다. 안갑순 속장님이 담배를 대한 건 놀랍게도 일곱 살 때부터였습니다. 충(회충)을 잡기 위해 담배를 풀어 끓인 물을 마신 것이 담배를 배운 동기가 된 것입니다.
그 옛날, 감히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속장님은 시집을 갈 때에도 담배를 챙겨갔다 합니다. 끝내 고집을 부려 풀지 않는 보따리 하나를 두고선 모두들 땅문서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담배꾸러미였습니다.
어느 날 며느리가 담배를 핀다는 것을 우연히 눈치 챈 시아버지는 노발대발하는 대신 아무도 모르게 은근히 담배를 전해 주었다고 합니다. 시아버지가 어디 밖에 나갔다 오신 날 서랍을 열면, 말없이 약속된 서랍을 열면, 거기엔 언제나 담배 몇 갑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당시로선 가장 좋은 담배가.
그렇게 담배와 벗한 것이 어느새 60년 세월이 지났습니다. 환한 불빛이 자신에게로 내려오는 꿈을 연이틀 꾼 것이 속장님에겐 교회를 찾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곰곰이 그 범상치 않은 꿈을 생각하다가 스스로 교회를 찾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다고 이해한 것이었습니다.
그게 몇 년 전의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면서도 담배는 못 끊었습니다. 60년 동안이나 인이 박힌 담배를 끊는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세례를 받던 날, 그날부터 속장님은 거짓말처럼 담배를 뚝 끊었습니다. 놀란 건 며칠이나 가나 보자 했던 주위 사람들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좋던 담배가 냄새조차 역겹더랍니다. 속장님이 놀랐습니다.
속장님은, 눈물 많은 속장님은 지난 이야기를 하며 또 주르르 눈물을 흘립니다. 담배를 끊고 나서야 담배 냄새가 그렇게 역겹다는 걸 알게 됐는데, 그걸 알고 나니까 돌아가신 어머니가 겪으신 고초가 생각났던 것입니다.
어머니 계신 방에서 담배를 피우면서도 어머니 생각은 조금도 못했었는데, 생각해 보니 결국 담배를 모르시던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못하신 채 담배 냄새의 역겨움을 그냥 참고만 계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뒤늦게야 깨닫게 되는 후회스러움. 삶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방법 중엔 그런 게 있나봅니다.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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