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객

한희철의 얘기마을(117)


낯선 객


산이 불씨를 품었다. 더는 못 견디겠다는 듯 이 골짝 저 능선 붉은 기운이 번져간다. 한꺼번에 펼쳐서는 안 될, 천천히 풀어 놓아야 할 그리움인 냥, 안으로 붉음을 다스린다. 자기 몸을 불살라 가장 눈부신 모습으로 자기를 키운 대지 품에 안기는, 기꺼이 순응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보아주는 이, 눈길 주는 이 없어도 뿌리 내린 곳 어디라도 꽃을 피워 올리는 들꽃이 아름답다. 연보랏빛 들국화와 노란 달맞이꽃, 길가 풀섶의 달개비꽃과 강가의 갈대잎, 저마다의 빛깔과 모양으로 피어나 찾아온 계절 대지를 수놓는다.


선선한 바람과는 달리 햇살이 따뜻하다. 한 올 한 올 손에 잡힐 뜻 나뉘어 내리는 햇살이 마음껏 가을을 익힌다.




텃밭에서 통이 커가는 배추하며 알 굵은 무, 산다락 밭 산 그림자 아래서도 밭고랑 금 그으며 익어가는 고구마, 길가마다 널려있는 벼와 고추들, 해마다 봄소식을 제일 먼저 전해 준 산수유도 올망졸망 빨갛게 익어간다. 산수유는 겨울철 좋은 소일거리가 될 것이다. 구들 따뜻한 방에 모여 싫도록 이야기를 나누며 손톱이 닳도록 씨를 빼 낼 것이다.


움푹 노란 물감을 찍어 휘휘 아무렇게나 덧칠해 놓으면 거반 비슷하지 싶은 가을 벌판도 제법 허전하다. 짚가리 볏가리가 배치 받은 병사처럼 빈들을 지킨다. 우두커니 선 모양이 초가집 같기도 하고, 노총각 헝클어진 더벅머리 같기도 하다. 키를 뒤집어 쓴 채 소금 얻으러 나선 오줌 싼 아이 같기도 하고, 운동회 날 기계체조 하는 아이들 층층이 올라선 것 같기도 하다.


지붕마다 호박들이 한가롭다. 거기가 제자리라는 듯 꾸물꾸물 잘도 올라가 편히들 누워 있다. 여기저기 헐리고 기울어진 폐가 담벼락에도 덩그마니 늙은 호박이 매달렸다. 쉽게는 돌아오지 못할 떠난 아들네 기다리는 옛 넋인지.


툭툭 떨어지는 알밤이며 도토리는 마을 아이들을 부르고, 머루 개암 등 보물이 가득한 산에선 아이들의 가을 해가 너무 짧다.


몸집과 색깔만 다를 뿐 다람쥐와 다를 바 없는 청설모는 잣과 밤을 까먹는데 선수다. 휙휙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는 재빠름은 혀를 내두를 정도지만 아이들은 고무줄 새총을 당겨 청설모를 잘도 잡는다.

변함없는 모습으로 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 깊어가는 가을이 아름답다. 그러나 무엇일까. 그 무엇이 이 변함없는 아름다움을 두고도 해마다 마을을 허전하게 하는가.


주름진 노인들의 분주한 손길뿐 참새의 재미도 예전만 못한, 풍년가도 오래 전 사라진 들녘, 다만 가을이 낯선 손님, 낯선 객인 냥 깊어가는 것은.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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