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얘기마을(119)
무너지는 고향
단강 아이들과 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둥그렇게 둘러앉아 자기 꿈 이야기를 돌아가며 했습니다. 과학자가 되겠다는 아이도 있었고,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화가, 가수, 군인, 간호사 등 아이들은 차례대로 자기 꿈 얘기를 했습니다. 되고 싶은 게 많아서인지, 미처 생각을 정리하지 못해서인지 대답을 못하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중 미희와 은숙이 얘기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대답했던 4학년 미희와 의사가 꿈이라고 대답했던 6학년 은숙이는 이어진 질문,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무엇을 하고 있을 것 같냐는 질문에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했던 것입니다.
선생님이 꿈이었던 미희는 밭에서 담배나 고추를 따고 있을 것이라고 했고, 의사가 꿈이었던 은숙이는 어느 공장에 취직해 있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애써 가진 꿈이 미리 그려보는 자신의 모습 앞에 어이없이 지워지고 있었습니다.
이 다음에 커서도 계속 단강에 살고 싶은 사람을 물었을 때, 아무도 손을 드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승혜는 심심해서 단강이 싫다 했고, 연경이는 친구가 없어서, 경림이는 죽도록 일만 하는 것이 싫다고 했습니다. 일만 하는 부모님이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조금 큰 녀석들은 도시로 나가서 살다가 가끔씩 자식들 데리고 들리고나 싶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있어 가끔씩 찾는 너희를 맞아줄 것 같냐는 말에는 아무도 대답을 못했습니다.
얼마 전, 종숙이과 종설이 두 남매가 원주 시내로 전학을 갔습니다. 근근한 살림, 그런데도 종숙이 부모님은 두 남매를 원주로 내보냈습니다. 돈도 돈이지만 이제 4학년과 6학년, 걱정 때문에 자식들 늘 눈에 밟힐 텐데도 안 그런 척 내보냈습니다. 어떻게든 자식만은 공부를 시켜 지지리 고생뿐인 농사를 물리지 않겠다는 안쓰러운 몸부림이었습니다.
부끄러움 많은 단강 아이들 중에서도 유독 부끄러움을 잘 타는 종숙이와 종설이, 녀석들이 원주로 나간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 한 구석 힘없이 헐리는 소리와 함께 부끄러움 많은 녀석들이 새로운 학교 새로운 친구들 앞에 서서 인사나 제대로 할까 걱정도 되었습니다.
뿌리가 깊고 튼튼하다면야 왜 걱정을 하겠습니까만 오늘의 농촌은 아이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습니다. ‘고향’이라는 말도 아이들을 품지 못합니다. 무관심 속에 우리의 고향이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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