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의 연장이 되어

의의 연장이 되어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겨서 불의의 연장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여러분을 하나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롬6:13)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기쁘게 즐겁게 한 주를 지내고 계신지요? 서늘한 바람이 기분 좋게 느껴지는 나날입니다만 뜻하지 않은 황사가 푸른 하늘을 가리고 있네요. 한 동안 미세먼지 걱정을 잊은 채 지냈는데, 우리가 처한 현실의 엄중함을 다시 자각하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시드럭부드럭 꽃들이 스러지고 있지만 개망초 쑥부쟁이 바늘꽃은 여전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장하고 예쁩니다. 말은 통하지 않으니 따뜻한 눈빛을 보내 그 명랑한 버팀을 응원합니다.

며칠 전 우리교회 청년의 사진 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 군에서 제대한 후에 인도의 갠지스 강이 보고 싶어 문득 찾아간 바라나시에 40일간 머물며 찍은 사진과 자기 마음의 풍경을 그린 글로 구성된 전시회였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삶과 죽음, 아름다움과 추함, 빛과 어둠을 나누는 일에 익숙하지만 이 둘은 나눌 수 없이 연결되어 있는 하나입니다. 사진을 보면서 그의 시선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아름답고 멋진 풍경을 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풍경 속에 깃든 삶의 본질을 읽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진을 둘러보다가 작가에게 어느 작품이 제일 마음에 드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가리킨 사진은 온갖 오물이 떠밀려오는 얕은 강물에 쪼그리고 앉은 상태로 조야한 낚시 바늘을 강에 던져둔 채 집중하고 있는 한 사내의 모습을 담고 있었습니다. 깨끗함과 더러움의 구분이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죽은 이의 재를 실은 강물을 더럽다, 불쾌하다 여기지 않고, 그 속에서 삶을 일구어가는 그 광경을 통해 젊은 작가는 성스러움을 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 해질녘 버스 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리며 주변에 있는 식물들을 살피고 있는데 바지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습니다. 모니터에는 연세가 많으신 권사님의 이름이 떠있었습니다. 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권사님의 음성은 맑고 또렷했습니다. “목사님, 많이 망설이다 전화를 올렸습니다.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저는 지금 00로 삶의 터전을 옮겼습니다. 내가 죽기 전에 목사님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괴질 때문에 만날 수 없으니 말입니다. 음성이라도 듣고 싶었어요.” 피차 안부를 주고받으며 눈시울이 시큰해졌습니다. 함께 걸어온 세월의 무게가 고마움으로, 안쓰러움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쇠락의 징조가 드러날 때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합니다. 집으로 돌아와 헬렌 니어링이 엮은 <인생의 황혼에서>라는 책을 찾아 읽다가 한 문장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남아 있는 힘이 줄어들수록 내게 그것은 더욱 소중해집니다. 나는 한쪽 귀를 잃었지만, 지금처럼 감미로운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내 눈이 너무 나빠져서 젊은 시절 자연이 보여주었던 그 빛이 희미해지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순수한 기쁨으로 자연을 마주한 적이 없습니다. 내 수족은 이내 지치겠지만, 무한한 창조의 섭리가 드러나는 이 활짝 열린 공간에서 내 수족을 움직일 수 있는 특권을 지금 이 순간처럼 소중하게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매일 꼬박꼬박 먹는 이 소박한 음식을 이렇듯 맛있게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비록 삐걱거리고 흔들리기는 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하나뿐인 나의 움막집에 너무나 큰 감사를 드립니다”(헬렌 니어링 엮음, <인생의 황혼에서>, 전병재·박정희 옮김, 민음사, 2002, p.30-31/윌리엄 엘러리 채닝이 ‘루시 에이킨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1840)

연세 드신 분들의 마음이 이 글 그대로이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지금 이곳에서 누리고 있는 생을 한껏 기뻐하며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결핍에만 마음을 둘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을 잘 누릴 줄 아는 것이 생의 지혜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잘 익어 땅에 떨어지는 열매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홀가분하게 인생을 마무리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세상 여정 마치는 그날이 새로운 여정의 출발임을 압니다. 무명의 시인은 땅의 길이 끝나는 순간 하늘의 길이 열린다고 노래했습니다.

지난 주부터 교회당 수용 인원의 1/3이 모여 예배드리는 일이 허용되었습니다. 우리교회는 이번 주일부터 대면예배와 영상 예배를 병행합니다. 정말 오랜만에 교우들을 만날 생각에 설렙니다. 한 동안 사람들이 전혀 머물지 않았던 지하 친교실 공간도 깨끗하게 쓸고 닦았습니다. 아직 식사를 나눌 수는 없지만 행여 교인들이 생각보다 많이 오시면 그곳 공간에 머물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방송실을 담당하는 교우들도 예배가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1,2부 예배 리허설을 했습니다. 초봄부터 시작된 팬데믹 상황이 늦가을에 이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 힘겨운 시간을 뚫고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김광규 시인의 ‘춘추春秋‘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창밖에서 산수유 꽃 피는 소리//한 줄 쓴 다음/들린다고 할까 말까 망설이며/병술년 봄을 보냈다”. 산수유 꽃 피는 소리가 들릴 리 만무하지만 시인은 ‘꽃망울을 터뜨린다’라는 표현을 연상했던 것일까요? 그렇기에 ‘들린다고 할까 말까’ 망설였던 것입니다. 시인은 마침표 하나 쉼표 하나 허투루 쓰지 않습니다. 글 쓰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문장에 대한 고민을 합니다. 조사 하나를 바꾸는 순간 문장의 뉘앙스가 달라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고심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내는 허튼소리 말라는 눈치였습니다. 물난리가 지나가고, 열대야로 밤을 지새던 여름이 지나고 나서야 시인은 마침내 한 줄을 시에 더 보탰습니다. “뒤뜰에서 후박나무 잎 지는 소리”. “창밖에서 산수유 꽃 피는 소리”라고 적고 “뒤뜰에서 후박나무 잎 지는 소리”를 적기까지 세 계절이 지나갔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이렇게 형상화할 수 있다는 게 놀랍지 않습니까? ‘춘추’라는 시 제목이 참 적실하게 느껴집니다.

우리의 시간도 이렇게 흘러갔습니다. 그 사이 시간을 우리는 그리움으로 채웠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만나고 싶습니다. 어떻게 지냈냐고 안부를 물으며,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싶습니다. 밀린 이야기를 다 나누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차분하게 그 시간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번 주일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사실 개혁되어야 하는 것이 ‘종교’ 일반이라기보다는 ‘기독교신앙’ 전반이기에 상투적으로 쓰는 이 말이 적절하지는 않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가톨릭의 면벌부 판매를 반박하는 ‘95개조의 신학 논문’을 비텐베르그 성교회 문에 게시한 날을 사람들은 종교개혁기념일로 삼고 있습니다. 개혁 정신은 낡은 것, 변질된 것, 권력으로 변한 것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예수 정신이라는 알짬이 사라진 교회와 제도는 계속해서 개혁되어야만 합니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안타깝게도 지금의 교회는 스스로 자정 능력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각 교단들이 보이는 행태는 개혁 정신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많은 이들이 희망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희망은 품는 것이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희망을 품기 위해서는 먼저 위로부터의 은총이 주어져야 합니다. 잘못된 현실에 대한 비판과 조롱, 냉소와 비난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무너지는 교회를 바로 세우는 것은 기우뚱한 벽체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몸을 밀어넣는 이들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한 달음에 목표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더디다 하여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칠 뿐입니다. 잔뜩 찌푸린 날입니다. 그러나 저 구름 너머에 푸른 하늘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도 가끔은 어둠에 잠기지만 본래는 청정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루하루 건강하게 지내십시오. 주위에 명랑의 기운을 불어넣으십시오. 주님의 손과 발이 되는 기쁨 한껏 누리십시오. 평안을 빕니다.

2020년 10월 22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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