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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 70'

전쟁통에 한가롭게 낚시를 즐긴 이승만

by 한종호 2015. 3. 14.

 

김삼웅의 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 70(12)

전쟁통에 한가롭게 낚시를 즐긴 이승만

 

김구와 김규식 등은 남북에 두 개의 정권이 수립되면 필연적으로 동족상잔이 벌어질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해서 남북협상을 통해 분단을 막고자 노력했으나 끝내 무위로 돌아가고,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40분을 기해 전면 남침을 자행했다. 소련제 T- 34형 탱크 240여 대, 야크 전투기와 IL폭격기 200여 대, 각종 중야포와 중박격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38선은 쉽게 무너지고 북한군은 물밀듯이 남하하여 26일 낮 12시경에는 야크기 2대가 서울 상공에 날아와 김포공항을 포격했다. 이승만 정부의 방비나 대처는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이승만은 25일 오전 10시 30분경에야 남침 보고를 받았다. 이날 이승만은 9시 30분부터 경회루에서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북한군의 전면남침 보고를 6시간 뒤에야 받은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당시 7시간 동안 행방을 알 수 없었듯이, 이승만은 국난의 시간에 한가롭게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그나마 긴급 국무회의는 전쟁발발 10시간이 지난 오후 2시에 열렸다.

국무회의에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적의 전면공격은 아닌 것 같으며 이주하ㆍ김삼룡을 탈취하기 위한 책략으로 보인다”고 엉터리 보고를 하였다. 채병덕은 26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군 제17연대가 해주로 진격 중이며 곧 반격으로 전환하여 북진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실제로 그 시각 제17연대는 인천으로 철수하고 있었다.

이승만 정부의 국군 수뇌부는 대부분 일군ㆍ만군 출신들로 포진하고 있었다. 이들은 국가안보는 뒷전이고 뇌물과 승진에만 혈안이 되었다. 남침 전야인 24일 저녁 군 수뇌부는 육군장교클럽 개관식을 기념하는 성대한 심야파티가 열렸다. 그리고 국군 전 장병에 대해 외출ㆍ외박과 휴가가 실시되었다. 이 파티에는 육군본부의 수뇌ㆍ미군사고문단ㆍ서울근교의 일선지휘관들이 초청되었다. 밤10시까지 파티는 계속되고, 2,3차까지 이어졌다. 채병덕도 새벽까지 술을 마셔 술이 덜 깬 상태에서 남침 보고를 받았지만 방어대책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국무회의에서는 엉터리 보고로 시종했다.

이승만은 27일 새벽 2시에 특별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 와중에도 육군교도소에 수감되었던 김구 암살범 안두희를 챙겨갔다. 직전에 국회에서는 수도사수를 결의했는데 이승만은 국회에도, 국무위원들에게도, 육군본부에도 ‘서울철수’를 통고하지 않았다. 이승만이 서울을 떠난 지 30분 후에 육군공병부대에 의해 한강철교가 폭파되어, 다리를 건너던 시민 600~1200명이 수장되고, 이후 서울시민들의 피난길이 막혔다.

대전을 거쳐 대구로 갔던 이승만은 너무 내려갔다는 판단에서인지, 다시 대전으로 돌아와 27일 밤 9시경 녹음 방송을 통해 “대통령과 정부는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군이 의정부를 탈환하고 있으니 국민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허위 방송을 내보냈다. 이 방송은 밤 10시부터 11시까지 서너 차례 녹음으로 방송되었다.

대전에 도착한 이승만은 27일 새벽 4시에 비상국무회의를 열어 정부의 천도를 의결하고, 대통령과 내각으로 구성된 망명정부를 일본에 수립하는 방안을 주한 미국 대사에게 문의했는데, 이는 그대로 미 국무부에 보고되었다. 대전에서 4일을 머문 이승만은 7월 1일 새벽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이리에 도착했고, 7월 2일에는 목포에 도착하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이동했다. 이승만은 6.25전쟁 발발 초기의 로얄 타임을 도망치느라고 국토방위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분단정부 수립 이후 특히 49년과 50년의 38선 부근은 남북 양측 군대 사이에 크고 작은 충돌이 속출하여 준전시 상황을 방불케 했다. 이 같은 상황인데도 신성모는 “아침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다”는 허언장담을 일삼고, 이승만은 이를 곧이곧대로 믿었다.

6.25직전 북한은 기동훈련의 명분으로 군을 38선으로 집결시키고 있었다. 그런대도 국방당국은 근거 없는 ‘태평가’에 취해 몽롱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여기에 대통령과 국방장관 등 군통수권자들의 무능ㆍ무책임으로 북한군은 손쉽게 남한의 대부분을 점령할 수 있었다.

 


 

6.25전쟁은 몇 가지 국내외적 요인이 겹쳐 발생하게 되었다. 국외적 요인으로는 ➀ 1949년 10월 중국대륙이 공산화되고, ➁ 1949년 8월 주한미군이 500명의 고문단을 남긴 채 철수, ➂ 1950년 1월 미국무장관 에치슨이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한국을 제외시켰고, ➃ 1949년 12월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 남한의 무력침공계획에 대해 스탈린의 동의를 받았다.

국내적인 요인은 ➀ 김구ㆍ여운형 등 민족지도자의 정치적 암살, ➁ 농지개혁의 미진으로 농민의 불만. ➂ 반민특위 해체로 국민의 분노. ➃ 남로당의 붕괴로 남한내부의 ‘인민혁명’가능성 희박. ➄ 5.30총선(제2대 국회)의 결과로 정부에 대한 국민 불신. ⑥ 민족해방투쟁의 경쟁 상대로서 김일성과 박헌영의 대립, ⑦ 북한군에 대한 국군의 병력 열세 등이 지적된다. ⑧ 정치적 위기에 몰린 이승만이 적절한 규모의 국지전을 바라고, 남침 정보를 방치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북한군은 1948년 10월 소련군이 철수할 때까지 4개 보병사단과 소련제 T - 34중형전차로 장비한 제105기갑대대가 편성되고 1949년 3월에는 북ㆍ소간에 군사비밀협정에 이어, 같은 해 3월에는 중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중국에서 일본군과 싸웠던 조선의용군 2만 5천 명이 북한에 인도됨으로써 10개 사단 13만 명이 38선에 배치되었다.

남한은 1946년 1월 미군정 산하의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가 1948년 8월 정부가 수립되면서 각각 육ㆍ해군의 국군으로 개편되었고 1949년 4월에 해병대, 10월에 공군이 편성되어 그 병력이 10만에 이르렀다.

이승만 정부가 피난에 급급할 때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26일 오전 4시(한국시간) “북한군의 즉각적인 전투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 철수”를 9대 0으로 결의했다. 소련 대표가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은 풀리지 않은 의문으로 남는다. 소련이 북한을 전쟁에 내세워 중국과 미국이 군사적인 적대관계를 갖도록 유도하고자 하는, 스탈린의 책략이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유엔군의 개입으로 전황은 역전되었으나 초기 전세는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한을 석권하였다. 4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3개월 만에 대구ㆍ부산 등 경상도 일부를 제외한 전 지역을 장악했다.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을 계기로 서울 탈환 ⟶ 38선 넘어 진격 ⟶ 평양점령 ⟶ 국군 일부 압록강 근처 초산까지 진격하게 되었다.

유엔군의 북진에 위협을 느낀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한국군이 오산까지 후퇴했다가 다시 38도선을 넘어 철원ㆍ금화까지 진격하고, 국제전으로 비화하면서 소련의 휴전제의를 미국이 받아들이면서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에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3년 동안 전개된 6.25전쟁은 남북 쌍방에 약 150만 명의 사망자와 쌍방 360만 명의 부상자, 국토의 피폐화를 가져왔고, 남북에 이승만과 김일성의 독재체제가 강화되었으며, 민족분단체제가 더욱 굳어졌다. 이후 한반도는 동서냉전의 분계선이 되었다.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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