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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 70'

아직까지 회수되지 못한 전시 작전지휘권

by 한종호 2015. 3. 19.

김삼웅의 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 70(13)

 

아직까지 회수되지 못한 전시작전지휘권

 

 

이승만은 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15일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에게 보낸〈대한민국 육해공군 지휘권 이양에 관한 공한〉을 통해 한국군의 지휘권을 미군에게 이양했다. 아무리 전시라고 하더라도 기한도 명시하지 않은 채 국군지휘권을 외국군 사령관에게 이양한 것이다. 다음은 이승만이 맥아더 장군에게 보낸 공한이다.

 

“대한민국을 위한 국제연합의 공동 군사노력에 있어 한국내 또는 한국근해에서 작전중인 국제연합의 육ㆍ해ㆍ공군의 모든 부대는 귀하의 통솔하에 있으며 또한 귀하는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있음에 감(鑑)하여 본인은 현 작전상태가 계속되는 동안 일체의 지휘권을 이양하게 된 것을 기쁘게 여기는 바이오며, 여사한 지휘권은 귀하 자신 또는 귀하가 한국 내 또는 한국근해에서 행사하도록 위임한 기타 사령관이 행사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국군은 귀하의 휘하에서 복무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것이며, 또한 한국 국민과 정부도 고명하고 훌륭한 군인으로서 우리들의 사랑하는 국토의 독립과 보전에 대한 비열한 공산 침략을 대항하기 위하여 힘을 합친 국제연합의 모든 군사권을 받고 있는 귀하여 전체적 지휘를 받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또한 격려되는 바입니다.

귀하에게 심후하고도 따뜻한 개인적인 경의를 표하나이다.”

 

이렇게 미군에게 넘겨준 전시작전 지휘권은 65년이 지난 지금까지 회수되지 못하였다. 못한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은 것이다. 미국측이 되돌려 주겠다고 해도 받지 않은 것이다. 박근혜대통령은 2014년 거의 무기한으로 다시 연장시켰다. 유엔회원국가 중 전작권이 없는 유일한 나라가 되고 있다.

 

 

 

 

전쟁 중에 이승만(정부)의 행태는 국난을 극복하고 국민을 보호하여 자주독립국가를 세우려는 자세가 아니었다. 1951년 1월 국민방위군사건이 벌어졌다. 정부는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제정하여 제2국민병에게 해당하는 만 17~40세의 장정들을 국민방위군에 편입시켰다. 국군의 후퇴가 시작되어 방위군을 후방으로 집단 이송하게 되자, 방위군 간부들은 이 기회를 틈타 막대한 돈과 물자를 빼돌려 사복을 채웠다. 그 결과 보급부족으로 천 수백 명의 사망자와 환자가 발생했다. 이들이 부정처분한 돈과 물자는 당시 화폐로 무료 24억 원, 양곡 5만 2천 섬에 달했다.

 

국회는 진상조사에 나서는 한편, 4월 30일 방위군 해산을 결의함에 따라 5월 12일 방위군은 해산되고, 사건을 일으킨 김윤환 등 4명은 처형되었다. 국회조사단이 구성되어 국민방위군사건의 조사에 나서자 이승만은 국방장관 신성모를 해임하고 이기붕을 임명하면서 수습에 나섰으나 이승만과 정부의 행태, 군부의 부패 문제는 쉽게 시정되지 않았다.

 

6ㆍ25전쟁을 전후하여 거창사건을 비롯하여 전국(남한) 도처에서 100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군경과 우익단체에 의해 학살되었다. 민간인 학살은 국군과 경찰, 특무대, 서북청년단 등 우익세력에 의해 ‘빨갱이’, ‘통비분자’로 몰려 자행되고, 미군에 의해 집단 학살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특히 1950년 6~8월에 자행된 국민보도연맹(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수법이나 희생자 수에 있어서 천인공노할 만행이었다. 보도연맹은 1949년 반공검사 오제도의 제안으로 이른바 좌익운동 전향자들이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전과를 묻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조직하였다. 그런데 막상 전쟁이 발발하자 군ㆍ경ㆍ서북청년단 등이 이들을 무차별 검거하여 집단학살한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예비검속을 당하거나 자발적으로 경찰서에 출두할 때까지 생업에 충실한 민간인이 대부분이었다.

 

군ㆍ경과 우익 단체들은 이들이 북한군에 동조할지 모른다는 이유에서 예비검속하거나 강제로 검거하여 집단학살극을 자행하였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남한 전역에서 이들에 대한 본격적인 학살이 감행되었다. 육지에서는 산속이나 계곡, 강가 등 인적이 드문 곳에서, 해안지방에서는 배에 실어 돌을 매달아 수장한 경우도 많았다.

 

6·25한국전쟁 기간에 남한 국민들은 북한인민군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도 많았으나 군ㆍ경과 우익단

체ㆍ미군에 의해 희생된 경우도 이에 못지않았다. 일차적인 책임은 현지 관련자들이지만, 정치적 책임은 오롯이 이승만에게 있었다.

 

정부는 북한군에 밀려 대전에서 대구로 이전했다가 1950년 8월 18일 부산으로 옮겼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의 침략으로 선조가 국토의 최북단 의주로 피난한 이래 358년 만에 이번에는 이승만이 최남단 부산까지 피난한 것이다. 임진전쟁 때는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고, 6ㆍ25한국전쟁 때는 미국에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선조는 한때 명나라로 망명을 준비하고, 이승만은 일본으로 망명할 계획을 세웠다.

 

피난지 부산에 내려온 부통령 이시영은 이승만의 권력욕과 자신에 대한 견제, 끝없이 이어지는 동족상잔과 거창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한 정부의 은폐조작 등을 지켜보면서 1951년 5월 1일〈국민에게 고한다〉는 한 통의 서한을 신익희 국회의장에게 보내고 사임서를 피난국회에 제출하였다.

 

전시하에서 수많은 국민이 고통을 겪고 희생되고 있는데 정부관리들과 군부에서는 엄청난 부패가 자행되고 있었다. 이시영은 이 같은 사태를 지켜보면서 사임한 것이다.

 

6ㆍ25한국전쟁 발발 2년 차가 된 1952년이 되었다. 이승만의 임기가 끝나고 제2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되는 해이기도 했다. 1951년 7월 개성에서 처음으로 휴전회담이 개최된 데 이어 10월 25일 판문점에서 정전회담이 열렸다. 전쟁은 소강상태에서 휴전(정전)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6ㆍ25 한국전쟁시기 이승만의 행위 중에 그나마 손꼽히는 것은 1952년 1월 18일 한반도 주변수역에 한국의 주권을 선언한 해양선인〈대한민국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즉 평화선을 선언한 일이다.

 

‘이승만 라인’이라고도 불리는 평화선은, 해안에서부터 평균 60마일(약 53해리)에 달하는 평화선을 선포한 이유는 ① 한ㆍ일간의 어업상의 격차 ② 어업자원 및 대륙붕 자원보호 ③ 세계 각국의 영해확장 및 주권적 전관화 추세 ④ 일본 주변에 선포된 해역선인 ‘맥아더 라인’의 철폐에 따른 보완책 등에 따른 조처였다. 일본은 지속적으로 이 평화선의 철폐를 주장하였다.

 

이승만은 자신의 대통령 재선을 위해 여러 가지로 구상을 거듭하였다. 원래 국회 의석의 분포로 봐서는 도저히 재선이 불가능 구도였다. 그래서 짜낸 것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었다. 상식적으로 대통령선거가 직선제라도 전시하에서는 간선제로 바꾸는 것이 도리일 터인데 이승만은 거꾸로였다. 국가의 안위나 정치의 일반 상식보다 자신의 위상을 우선시하였다.

 

이승만은 제2대 대통령선거에 대비하면서 1951년 11월 23일 자유당을 발족했다. 원내의 공화민정회, 원외의 국민회, 대한청년단, 대한노총, 대한부인회, 농민조합연맹 등의 대표들을 모아 신당발기준비협의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당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원내파와 원외파로 분열되었다. 원내파는 이갑성을 중심으로, 원외파는 이범석을 중심으로 각각 자유당을 발족, 하나의 이름으로 두 개의 정당이 만들어지는 기형적인 모습으로 자유당이 창당되었다.

 

이승만은 재집권을 위한 대통령 직선제 및 양원제 개헌을 앞두고 두 개의 자유당을 하나의 정당으로 통합하여, 악명 높은 자유당을 만들었다. 자유당은 향후 10여 년 동안 집권당으로서 온갖 악행을 자행하게 되었다.

 

이승만이 1951년 11월에 제안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은 공고기간을 거쳐 1952년 1월 28일 국회의 표결 결과 재적 163명 중 가 19, 부 143, 기권 1로 부결되는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민국당 등 야권은 여세를 몰아 1952년 4월 국회의원 123명이 내각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에 당황한 이승만은 5월 14일 국회에서 이미 부결된 직선제 개헌안을 다시 꺼내 맞불을 놓았다.

 

직선제 개헌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이승만 측은 자유당과 방계단체인 국민회, 한청, 족청 등을 동원하여 1952년 1월 말부터 백골단ㆍ땃벌떼ㆍ민중자결단 등의 명의로 국회의원 소환 벽보와 각종 삐리를 뿌리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또 전국애국단체 명의로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 지지 관제데모, 가두시위, 국회 앞 성토대회, ‘민의 외면한’ 국회의원 소환요구 연판장 등 광적인 이승만 지지 운동을 전개하였다.

 

관제데모와 경찰의 방관ㆍ방조 등으로 국회와 사회의 반 이승만 정서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에 따라 야당은 국회에 개헌정족수인 3분의 2보다 1표가 더 많은 123명이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국회의 분위기가 내각책임제 개헌으로 기울게 되자 이승만은 강압적인 수법으로 나왔다.

 

합법인 방법으로는 직선제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5월 25일 정국혼란을 이유로 부산을 포함한 경남과 전남북 일부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영남지구계엄사령관에 측근 원용덕을 임명하는 등 군사력을 개헌 공작에 동원했다. 적과 대치 중인 전방 전투부대까지 후방으로 빼내어 계엄령을 선포한 것이다.

 

계엄사령부는 즉각 언론검열을 실시하는 한편 내각책임제 개헌추진을 주도한 의원들의 체포에 나섰다. 5월 26일에는 국회의원 40명이 타고 국회에 등청하는 통근버스를 크레인으로 끌어 헌병대로 연행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시영ㆍ김창숙ㆍ김성수ㆍ장면 등 야당과 재야 원로들은 부산에서 호헌구국선언대회를 열어 이승만 독재를 규탄하고 나섰다. 그러나, 6ㆍ25기념식상에서 김시현ㆍ유시태 등의 이승만 암살미수사건이 터지면서 야권을 완전히 전의를 잃게 되었다.

 

장택상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국회해산을 협박하면서 발췌개헌을 추진했다. 발췌개헌안이란, 정부가 제출한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에다 야당이 제안한 개헌안 중 국무총리의 추천에 의한 국무위원의 임명, 국무위원에 대한 국회의 불신임결의권 등을 덧붙인, 두 개의 개헌안을 절충형식을 취한 내용이었다.

 

발췌개헌안은 7월 4일 심야에 일부 야당 의원들을 강제연행하고, 경찰ㆍ군대와 테러단이 국회를 겹겹이 포위한 가운데 기립표결로서 출석 166명 중 가 163명, 기권 2명으로 의결하고, 7월 7일 공포하였다. 비상계엄은 28일 해제되었다.

 

발췌개헌은 이승만의 권력연장을 위한 사실상 친위쿠데타였다. 개정 헌법에 따라 8월 5일 실시된 첫 직선제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은 74.6%의 압도적 득표로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조봉암과 이시영은 각각 유효표의 11.4%, 10.7%를 획득했다. 전시하에서 이승만의 일방적인 선거운동의 결과였다.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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