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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김기석의 새로봄

은총의 신비 속으로

by 한종호 2021. 1. 2.

은총의 신비 속으로

 

“아침에는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고, 평생토록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주십시오.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 수만큼, 우리가 재난을 당한 햇수만큼,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십시오.“(시 90:14-15)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어느덧 한 해의 끝에 당도했습니다. 험한 파도에 시달리며 항해한 배처럼 우리 몸과 마음에 새겨진 흔적이 깊습니다. 상처도 많고 달라붙은 것들도 참 많습니다. 그래도 우리 이렇게 견뎠습니다. 아슬아슬한 희망을 가슴에 품고 고단한 시간을 건너왔습니다. 아직 평안의 포구에 당도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새로운 한 해를 내다볼 수 있는 자리에 이르렀다는 것이 참 고맙습니다. 후회와 자책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스스로 자기 손을 끌어 머리에 얹고 장하다고 말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엊그제 TV를 보다가 가슴 찡한 광경과 만났습니다. 어촌 마을에 사는 할머니 한 분이 며칠 동안 어민들의 일상을 취재했던 이들이 작별인사를 건네자 그 시선을 외면한 채 ‘잘 가라’고 하시다가 문득 뭔가 생각이 났는지 잠시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창고에서 스티로폼에 포장한 뭔가를 들고 나왔습니다. 가재미라며 어촌에서 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다며 취재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받을 수 없다고 손사래 치는 이들에게 할머니는 “따뜻한 밥 한 끼라도 정성껏 대접해 드리지 못해 미안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산하기 이를 데 없는 시절에 할머니의 그런 마음 씀은 제 속에 온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저는 혼잣소리로 ‘저 마음 하나면 그만인데.’ 하고 말했습니다. 그런 따뜻함과 배려야말로 세상의 어떤 이론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아닐까요? 저물어 가는 한 해를 돌아보며 우리 마음의 풍경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코로나19가 처음 번져갈 즈음 저는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예배를 비대면으로 드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한 두 주만 잘 넘기면 상황이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 근거 없는 낙관론이었습니다. 부활절과 성탄절을 예배당에서 함께 경축하지 못한 것은 아마 우리 생애의 첫 경험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팬데믹의 한복판에 처해 있기에 이 시간의 의미를 온전히 가늠할 수 없지만, 먼 훗날 우리는 이 암담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할까요?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라고 말하지 않아도 되기만을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제3차 웨이브를 지나고 있습니다. 두 차례 경험했던 것보다 그 파고가 높고 또 장기화되고 있습니다. 큰일 없이 이런 상황이 지나가도 제4, 제5의 웨이브가 올 가능성도 있다고 하니 더욱 긴장해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구나 그렇지만 많은 분들이 난감한 시간을 견디고 계십니다. 코로나19만 우리를 괴롭힌 건 아닙니다. 기후 위기가 빚은 홍수 피해가 자못 심각했고, 도처에서 일어난 산불 피해도 막심했습니다. 자영업자들이나 소상공인들도 생존의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거리를 조금만 걸어보아도 문을 닫은 가게들이 즐비합니다. 인파에 떠밀려 다녀야 했던 명동 거리도 한산하기만 합니다. 소득은 줄고, 두려움은 증대되고 있습니다. 친밀한 관계의 가능성은 줄어들고 불확실성은 심화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시자가 되었습니다. 마스크를 쓰지 않는 분을 보면 눈살을 찌푸리고,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큰 목소리로 전화하는 이들을 보면 눈총을 주기도 했습니다. 행여 감염의 매개가 될까 무서워 사람들을 만나기를 꺼립니다. 낯선 외로움이 우리 삶을 휩쓸고 있습니다. 

 

유대교 랍비인 나오미가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70대 중반에 이른 외할아버지께 갑자기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사람을 빤히 쳐다보기만 하실 뿐 아무 일에도 의욕을 보이질 않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일평생을 함께 했고, 아들딸과 손자손녀들로 대가족을 이루고 있었고, 사업 또한 번창했고, 건강 또한 좋았습니다. 우울에 빠질 이유가 없다고 느낀 엄마가 할아버지께 여쭈었습니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잠자코 계시던 할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이제 아무도 없다!” 그리고 “키비츠(kibbitz) 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그에게 결핍된 키비츠란 무엇일까요?

 

“‘키비츠’는 이디쉬어로 친구들과 격의 없이 지내는 모든 것을 두루 일컫는 단어다. 몰려다니며, 농담하고, 수다피우고, 놀리고, 이야기하고, 마음을 짐을 풀어놓고, 귀 기울여 들어주고, 킬킬거리는 등등...”(나오미 레비, <아인슈타인과 랍비>, 최순님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p.213)

 

때로는 하찮아 보이고 시간 낭비처럼 보이는 일들이 어쩌면 우리 삶을 지탱하는 토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도 이런 시간을 그 어느 때보다 그리워합니다. 날이 갈수록 우정 공동체가 그립습니다. 이런 상황이 너무 길어지면 줌(zoom)으로라도 잡담회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창의적인 제안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올 한 해 무엇보다도 속상했던 것은 개신교회가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입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유난히 개신교회발 감염에 대한 보도가 많다 보니 사람들의 시선이 더 차가워졌습니다. 목회 데이터 연구소의 발표를 보니 불교와 가톨릭에 대한 호감은 커졌지만 개신교회에 대한 호감은 확연히 줄어들었습니다. 심지어 개신교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거리를 두고 싶은’, ‘이중적인’, ‘사기꾼 같은’이라는 대답이 많았다고 합니다. 성내고, 소리 지르고, 비꼬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시민적 상식으로부터 멀어진 교회에 대한 냉정한 평가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우리 일상적 삶의 자리에 하늘의 통치를 가져가는 것이건만 너무나 많은 이들이 배타적인 동시에 편협한 믿음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소설가이며 평화운동가인 아모스 오즈는 “광신주의의 씨앗은 언제나 결코 타협하지 않는 정당성에 기생”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타협하지 않음은 물론 신앙적 확신이라는 외피를 입고 등장합니다. 아모스는 모든 광신자들에게는 특별한 공통점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저속함(kitsch)을 몹시도 좋아하고, 그런 취미에 매달립니다. 대체로 광신자의 머릿속에는 ‘하나’라는 숫자밖에 없고 ‘둘’ 이상의 복수(複數)는 너무나 큰 숫자라 흡사 머릿속으로 집어넣지 못하는 듯한 형국이기까지 합니다. 동시에 광신자들은 대책 없이 감상적인 측면이 많습니다. 그들은 이성보다 감정을 좋아하고, 자신의 죽음에 지나치게 매혹되어 있습니다.”(아모스 오즈, <광신자 치유>, 노만수 옮김, 세종서적, p.61-62)

 

광신자들은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억지로라도 변화시키려 합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뭔가 결핍되어 있는 사람들로 여깁니다. 삶은 본래 모호하고 복잡한 것인데 그들은 스스로 정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모스는 광신자들에게 결핍된 것은 유머 감각이라고 말합니다. 유머란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비웃을 수 있는 능력에서 발현됩니다. 냉소주의자들은 유머를 모릅니다.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삶이 힘겨울수록 명랑하게 지낼 수 있어야 합니다. 명랑한 이들과 만나면 우리를 짓누르고 있던 삶의 무게가 조금 줄어드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한 해가 다 가기 전에 우리 영혼을 따뜻하게 만들어준 고마운 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 좋겠습니다. 

 

송구영신예배에도 우리는 직접 얼굴을 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늘 그러했듯이 떼제 찬양을 함께 부르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성찬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거룩한 시간을 통해 깊이 결속되기를 바랍니다. 여러 해 전 제가 미국의 버몬트 주에 있는 작은 수도원에 잠시 머물 때 한 수사님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그 수도원은 남미에서 정치적 박해를 피해 망명한 이들을 가족으로 맞아들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 늘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지냈고, 할 수 있는 한 외부인들과 접촉하지 않으려 했답니다. 그 가족들이 첫 번째 성찬에 참여했을 때, 수사들은 아기를 품에 안고 있던 한 어머니가 성찬 떡을 그 갓난아기의 입에 조심스레 넣어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들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수사님은 그 광경을 보며 성찬의 신비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성찬은 딱딱한 교회 의례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의식이었던 셈입니다. 두려움 속에 있는 이들을 어루만지는 하나님의 음식이었으니 말입니다. 여러분도 성찬을 통해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 해 동안 여러분이 계셔서 참 든든했습니다. 올해 우리 교회 가족이 되었지만 아직 깊은 친교를 경험하지 못한 분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올 한 해를 주님 안에서 잘 마무리 하시고, 가슴 벅찬 새해를 맞이하시기를 빕니다.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바라봅니다. 괴로움의 시간은 결국 지나갈 겁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2020년 12월 31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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